시험 결과가 나왔다. 예상대로 형편없는 등수, 전교 23등. 이 빌어먹을 등수는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왜? 내가 노력을 안 해서? 맞다. 나는 지독히 노력을 안 하는 인간이다. 스스로를 통제할 줄도 모르고, 뭐든지 대충대충. 사실 이런 등수마저도 엄마가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격은 타고나는 걸까, 만들어지는 걸까? 엄마가 '애 성격 나빠져요,'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 걸로 보아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내 성격은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당연히, 그렇게 살아도 지금껏 잘했기 때문이겠지. 죽도록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윗대가리에서 놀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머리가 좋다는 것(그렇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다. 물론 '좋다'에도 등급이 있으므로 천재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꽤나 쓸만한 이해력과 적용능력을 가진 머리라, 지금껏 학습 활동에 있어서 크게 힘든 바를 느껴본 적은 없다.)과, 나보다 훌륭한 두뇌의 위협을 못 느껴본 것, 이 두가지가 내 성격의 형성에 있어서 무시무시한 맹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인지 아닌지 분간은 잘 안 되지만) 나는 성적에 있어서, '될대로 되라'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로, 성적 문제를 제외하면 나도 다른 악바리들과 똑같이 '오기' 혹은 '애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많이 드러낸다. 거기다 그, 나조차 감당못할 '완벽주의'까지.) 그 사고가 얼마나 뿌리가 깊어졌느냐 하면, 나는 등수가 23등까지 내려가도 크게 기분이 나쁜 걸 모르겠다.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정말 공부는 하기 싫다.
그렇구나. 나는 '공부가 하기 싫다.' 바로 이게 가장 큰 원인인 것 같다. 결국 다 성격 문제로 모아지는 이야기이긴 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는 열의를 드러내지만 흥미를 잃으면 지지리 하기 싫어하는 이 극단적인 성격이 문제다. (솔직히 다들 그렇지 않나 생각하지만.)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공부'를 매우 사랑한다. 공부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존 M.피니의 'It's such a pleasure for me to learn'이란 말은 나에게도 해당된다. 다만 문제는 그 '배움'의 대상이 너무 한정적이라는 데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공부'와 '필요에 의한 공부'. 불행하게도 학교 '시험'공부는 둘 중 어느 쪽에도 못 낀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공부'는 또 두 가지로 나뉘는데, '매우 흥미를 느끼는 공부'와 '어느 정도 흥미를 느끼는 공부가 있다. 그러면 '매우 흥미를 느끼는 공부'를 살펴보겠다. 국어, 영어, 일어, 한문, 역사, 독서를 통한 지식의 습득 등이 있다. 다음은 '어느 정도 흥미를 느끼는 공부' : 중국어, 과학, 수학, 기술. 마지막으로, '필요에 의한 공부'에 들어가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언제든지 '흥미를 느끼는 공부'와 호환된다. 음악(부르는 걸 '공부'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음악사다.), 미술(감상을 말한다. 수업시간에 작품을 만드는 건 '공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다지 내 흥미를 끌지 못한다.), 가정(아무튼 살아가는 데 유용하니까 필요하다. 단, 나는 아주 싫어한다.),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 매체를 통한 지식의 습득 등이 있다.
그러면 이렇게 분류를 했을 때, 각각의 특성은 어떻게 다를까. 먼저 '매우 흥미를 느끼는 공부'의 원소들같은 경우에, 나는 <유혹하는 글쓰기>의 한 부분에서 스티븐 킹이 강조하듯, '즐거움'을 가지고 몰두할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배움을 구한다. 그 다음, '어느 정도 흥미를 느끼는 공부'에는, 하면 재미가 있기에 몰두한다. 따라서 배움이 있으면 즐긴다. 마지막, '필요에 의한 공부'는 뒤죽박죽이라 뭐라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위에 적혀있는 원소들에는 교과 과정의 대부분 과목이 포함되어 있다. 국어, 영어, 한문, 사회, 과학, 수학, 기술·가정, 음악, 미술. (내 도덕, 체육, 환경 점수가 대체로 늘 더러운 것은 얘네들은 어느 축에도 못 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 당연히 내 시험 성적은 무지 좋아야 되는 게 아닌가? 아니다. '시험 공부'를 안 하면 '시험'은 못치게 마련이다. 이처럼 내가 배우기를 즐거워하는 과목은 많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시험 공부'는 어느 쪽에도 못 들어가기에, 시험 공부는 고역이다. 결과도 안 좋다.
중학교에서 왜 우리는 열 개가 넘는 과목을 배울까. 다 필요해서일 것이다. 이 정도는 알아야지! 하고 생각하기에 넣어놓은 내용일 것이다. 그 점은 나도 동감한다. 비록 살면서 난층운이 형성되는 원리 따위를 써먹을 일은 희박하겠지만, 그만한 지식을 갖고 산다고 나쁠 것도 없다. 이만큼 쓰고보니 어쩌면 내 성적하락의 원인은 목표의식의 상실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통역을 하려면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 되어야겠지, 하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먼 목표(어머, 그리 멀지도 않나?)는 내 시력으로는 너무 흐릿하게 보인다.
그래, 나도 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겠는가. 학교만 다녀도 그것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난다. 학교에 다니면 내가 아무리 하기 싫어도 왁스 청소를 해야 하고, 선생님이 시키면 좋다고 대답해야 하고, (지난 여름방학의 그 악몽같던 독서신문의 경우처럼) 뭔가를 제출했을 때 '다시 해 오라'는 청천벽력같은 요구도 웃는 얼굴로 받아들여야 한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어떤 축소판이 있을 때, 원판이 그보다 더 큰 것은 당연한 이치이므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진짜 사회에 나가면 더 지독할 거라는 정도의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시험 공부가 싫어서 공부를 안 하겠다는 식의 모난 성격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안다. 잘 안다. 그런데, 못 바꾸겠다. 그게 문제다. 뭘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막막할 뿐이다.
요즘 머리가 이쪽으로밖에 안 돌아가기에 또 다시 떠오르는데, 내 성격은 내가 국제고를 가려고 하는 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위기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 하는 쪼다이기에, 분명 나보다 잘하는 친구들이 많을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 학원에서 좋은 성적을 내며 반을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 있겠지, 위기감에. 지금껏 튀어왔기 때문에, 나는 튀어야 하는데, 내가 제일 잘 하지 않으면 튀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그 위기감을 원동력 삼아 달린다. (글쎄, 민사고에 간 박원희가 느낀 정도의 위기감은 아직 안 느껴봐서, 지긋지긋할 만큼 끔찍한 위기감이 나를 어떻게 몰아갈 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적당한 위기감이 항상 기폭제가 되어왔다.)
아까 아빠가 들어오셔서 '엄마한테 보여주기 위한 것을 치지 마라. 네 생각을 적어라.'라고 말씀하셨다. 물론이다. 만약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고 있었다면 좀 더 신중을 기해서(참회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며) 썼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내 생각을 갈겼다. 그저 생각의 흐름만 따라서 쓴 것이다. 그래서 일관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이 생각 저 생각, 잡생각이 많은 게 나니까.
뜬금없지만 결론은, '나도 잘 모르겠다' 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길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느낌을 '방황'이라고 쓰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