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여우를 보고, 조금만 생각해보기

14일째 달에는 희망이 없다.
보름달은 야위어가지만 14일째 달에는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치요코의 사랑(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민권운동가[사상가])의 말은 좀 웃겼다. 곧 찾아올 절망을 알고서 빛나는 '내일'을 바라보는 마음을 과연 희망이라 할 수 있을까.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로는 어떤 것도 열 수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열쇠로 무엇을 열 수 있는 건지는 나오지 않는다. 단지 '소중한 것'을 연다고만 할 뿐, 결국 치요코는 그 열쇠를 쓰지 못한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상에서,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는 '아무 것도 못 여는 열쇠'가 되어버린다. 소중한 것이란 없다. 열쇠를 준 남자를 찾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된 치요코, 그 자신이 있을 뿐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이 흘러가는 것.
'나는 너를 증오해, 하지만 너무 사랑스럽다.' 처음 이 물레잣는 노인이 등장했을 때, 이게 뭔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정체가 드러났을 때, 나는 숨을 죽여야 했다. 그 노인은 시간이었다. 늙어버린 모습을 그에게 보이기 싫었다, 고 말하는 치요코의 눈에 비친 노인의 모습은 더 이상 무서운 요괴가 아니다. 지나가 버린 시간, 그 자체. 자신의 모습이므로.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다.


약속은 야속하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였던 것 같다. 폐허가 된 마을의 한 건물 벽 위에 '그 남자'가 남기고 간 약속이 남아 있었다. 치요코의 모습과 함께 쓰인 문구,
 'いつか きっと(언젠가 반드시)'. 이 약속은 너무 야속했다. 언젠가 반드시. 언젠가라는 말은 너무 불확실한 반면, 반드시라는 말은 너무 확고한 것이다. 그 약속을 담은 액자에 비친 늙은 치요코의 모습과,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그림 속의 치요코의 모습이 함께 화면을 메울 때, 그 약속의 야속함에 슬픔을 느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明卵 2004-10-23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계시네요^^
저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고 있었는데 이쪽에 개봉을 안 한 것 같더군요^^; (게다가 그 때가 시험기간이었고.) 오늘 보니 비디오가 있어서 빌려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녹음이더라구요. 흑.. 일어로 듣고 싶었는데..ㅜㅜ (애니메이션은 잘 안 나가면 우리말 녹음밖에 없어요)

明卵 2004-10-23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DVD도 나왔을 거예요^^ (이쪽 대여점엔 없지만ㅜㅜ) 엄마는 재미없다고 중간에 자버렸지만 저는 재밌게 봤어요. 일본사를 알았으면 좀 더 재밌게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더군요.

明卵 2004-10-29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처음에는, 정신이 없었어요. 치요코의 극중 모습이랑, 과거의 치요코, 현재의 치요코가 뒤섞여서는.
자막으로 보셨다구요!!ㅠㅠ 정말 좋으시겠어요, 엉엉... 더빙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치요코의 극중 모습 부분은 좀 말투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너무너무 궁금하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