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하고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이게 정말 일주일이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수요일에 교내 독서경시대회가 있는데 책을 덜 읽어서 월요일에는 2시, 화요일에는 4시 반까지 책을 읽었고, 대회가 끝나고 나서는 대회때문에 미뤄놓은 수학숙제에 매달리느라 혼이 쏙 빠지고... 덕분에 토요일에 수학 과외를 하면서 자꾸 졸아서, 선생님이 잠시 자고 수업하자는 말씀까지 하셨다. 에고.
아, 월요일과 화요일 밤을 지나면서, 이번주만큼 나의 책읽는 속도가 느린 것이 한스러운 때는 없었다. 그래도 교내 독서 경시대회는 생각보다 잘 했는지, 교내 독서 토론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좋은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자습실로 돌아가야 했던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나는 토론대회까지 나갔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쏘냐! 토론대회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저 책의 내용을 알기에 급급했던 나로서는 꿀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속에 앉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 내용을 듣는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러고보니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 이런 부분이 있다.
……이현겸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고을 선비들이 무지하여 경전과 사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요.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과거공부 이외의 문장공부가 있고 문장공부 위에 학문이 있으며, 학문이란 글을 끊어 읽거나 글에다 훈고를 붙이는 것만으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이현겸은 또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자네들이 책을 읽는 데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글의 뜻과 이치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세. 평소 과거시험의 글을 익히던 버릇이 종이와 입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 그것을 벗어나 사색하지 않기 때문이지. 자네들이 진실로 나를 따라 배우고자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과정을 정하도록 하게. 그리하여 매일 경서 한 장과 주자의 강목 한 단을 빨리 읽거나 외우려 하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토론, 분변함이 좋겠어.' 이때부터 여러 사람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좇아 배운 지 수년 만에 비로소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우리 고을의 풍기가 점점 개명해갔지요. 유식한 사람들은 당시 선생님이 우리 고을에서 하신 일을 저 옛날 문옹이 촉에서 한 일이나 한유가 소주에서 한 일에 비유했지요" (42쪽)
과연!
사실 내가 이 시험을 치게 된 것은 중학교 때 그랬으니 당연히 쳐야지,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나에게 책을 읽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글을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 문제를 푸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래서 언어영역 모의고사에서 항상 종치기 일보직전에 간당간당하게 마킹을 시작하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게다가 매주 한 권씩 읽을 책이 나오는데 그걸 읽어내는 것도 이렇게 느려터져서야, 심한 압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 3학년까지 가면 분명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 시간이 많을 때 좀 더 글자와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필요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법. 방학과 대회라는 사건들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미래'는 결국 다 읽지 못했지만 나머지는 제대로 읽었고, 이런 좋은 결과-토론은 심하게 못했지만-를 얻을 수 있었다. 다음주 선정도서는 '나의 아버지 박지원'인데, 내가 글을 읽는 속도가 빨라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담이 덜해졌다는 건 확실하다. 좋은 책 세 권 반을 읽었다는 것, 그 토론현장에 있었다는 것, 거기에서 느낀 게 있다는 것, 부담감을 덜었다는 것. 이 정도면 책을 읽은 것에 대한 보답이 과할 정도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목요일에는 해민이의 송별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혜경이가 전학가고, 방학 중에 혜진이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더니, 이번에는 해민이가 전학가게 된 것이다. 전교에서 유일하게 21명인 최고인원 반으로 시작했던 우리반이, 이제는 18명으로 최소인원 반이 되어버렸다. 만남과 헤어짐은 너무도 가깝다는 걸 알지만, 적어도 1년 동안은 늘 같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친구가 한 명 떠난다는 것은 어찌나 서운하고 안타까운 일인지. 분위기가 슬프게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헤어지는 순간 울지는 않았지만, 해민이에게 편지를 쓸 때나 이렇게 글을 쓸 때면 눈물이 나고 만다. 이제는 해민이와 기숙사 침대에 누워 수다떨 수 없다는 것이 슬프도록 와닿는다. 그리고 이 눈물 속에는 두려움도 녹아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겠지만, 이들이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아, 금요일에 2학기 태권도수업을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반 제일 앞 줄에 서게 됐는데, 하필이면 반별로 동작을 해보여야 했다. 게다가 제일 앞 사람이 구령까지 붙이라니, 아니 너무 짓궂으신 거 아닙니까?! 아아... 나름대로 우렁차게 구령과 기합을 넣었는데, 아니 이 웬수같은 것들이 너무 조용했다. 나는 앞에서 악악거리고 있는데 니들 그럴 수 있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상태에서 태권도 수업이 끝나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려고 했던 나는 지나치는 아이들의 민망한 인사를 들어야 했다. "야, 그 태권도 시간에 낭랑한 목소리 너였지?", "남자들을 휘어잡는 목소리~(대체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잘 들었다.", "너무 귀여웠어~", 뭐 이런 식의. 아니, 나는 우렁찬 목소리라고 생각했다고! 일부러 그런 목소리(그런 목소리가 어떤 목소린지 본인은 잘 모른다) 낸 게 아니란 말이여... 그래도, 떨리고 민망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무대 체질까진 아니지만 역시 주목받는 걸 좋아하니까, 랄까. 호호.
뭐, 대충 이렇게 일주일이 지나가고, 주말을 탱자탱자 놀아준 다음 지금은 또 다른 일주일이 다가오는 걸 보고 있다. 넵, 저 개학 잘 했습니다~^ㅂ^ 2학기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