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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헤븐 3 - 완결
다카하시 츠토무 지음 / 아선미디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거대 유람선, 인간이 사는 이 세계를 상징하는 동시에 페쇄 공포증을 유발시키는 공간, 악마적 살인마, 살인마로 개조되어 이미 그 우수한 성능을 유감없이 입증해 보인 괴물. 악마의 가족,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했지만 도덕적으론 바닥을 모르게 망가진 또다른 괴물들. 무고한 피해자들, 세계의 사람들. 무의식적 폭력, 인종주의. 그리고 그 아비규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자들.
써놓기만 하면 정말, 이만한 이야기가 없다. 모든 상황은 서스펜스의 황금비가 있다고 하면 바로 이것이라 할 정도로 딱딱 이가 맞게끔 만들어놨다. 오오, 이거 장난 아니다. 단지 상상만으로도 몬스터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의 대단한 아우라가 풍겨나지 않는가? 이런 기본적인 단서들만으로도 사람을 제압해 버리다니 과연 다카하시 츠토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를 보여줄 것인가.
그런데, 딱 그 정도다. 딱, 상상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 패를 손에 쥐고도 이 정도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건, 실패다.
우선 저 패들을 잘 살펴보라. 어딘가, 어딘가에서 본 무척 낯익은 요소들이지 않은가? 실로 그렇다. 거대 유람선이라는 폐쇄 공간이야 헐리웃 고전시대서부터 즐겨 쓰여오던 것이고 악마적 살인마야 네오 느와르의 단골 주인공. 작가의 의도가 뻔뻔스러운 것은 돈 많고 싸가지 없는 쥬노 패밀리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는데 여기 당주인 영감은 한니발의 멋없는 악역인 메이슨과 붕어빵이다. 그런데다 그외 등등... 이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나머지 가족들의 정신 상태가 닳고 닳은 종류. 아.... 워낙 개성이 출중한 인간들이 이렇게 포진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나머지 캐릭터들, 뭐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별로 상관도 안 하게 되버렸다. 존재감 상실. 이 정도쯤 되면 보는 사람이 피곤할 정도니 그리는 사람이 짜증이 나겠다.
물론 아주 새로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한대로 이 재료들은 재료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요릿감이 나올 수 있는, 지나간 이야기들의 역사가 증거해주고 보장해주는 일종의 모범 답안에 가까운 것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재료들을 다루는데 실패했다.
생각해보면 작가의 대표작인 지뢰진 또한 그리 새로운 작품은 아니었다. 주인공 이이다 쿄야는 더티 하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성질 더러운 형사의 충실한 일본식 변형이었고 그 안에서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은 현대라는 이름의 지뢰밭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작가는 카리스마적인 인간 말종을 보다 극단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러한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지뢰진은 그런 인간 말종들 간에 벌어지는 긴장감과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포착해내는 스토리, 그리고 스타일리쉬한 작화에서 그 탁월함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블루 헤븐은 과잉이 가져오는 함정에 빠진 작품이다. 저 모든 매력적인 조건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확인해 보라. 너무 단단하면 부러지기 마련이고 끝까지 다다르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여기서 쓰일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이토록 개성 강한 캐릭터들과 긴장감이 폭발해야 할 상황들은 푹 불어버린 우동을 먹을 때처럼 물렁물렁하고 뚝뚝 끊어지는 느낌만을 안겨주게 되버렸다. 그렇기에 작가가 의도했을 인종주의와 미국에 대한 은유가 그리 힘없게 들려오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