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 베트남과 친구되기
김현아 지음 / 책갈피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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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27일, 나는 한겨레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월남 참전 군인 전우회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한겨레 신문사 앞에서 벌이는 시위를 현장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즈음, 한겨레 신문사에서 낸 월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사에 항의하면서 모인 전직 군인들, 그러니까 오십줄, 육십줄 먹은 할아버지들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제대로 된 시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은 반쯤 취해있었고 무절제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며 그 어디에서도 분명한 목적이란 것을 볼 수 없었다. 거기엔 의지도 없었다. 고함을 치고 돌을 던지고 차를 부수고 편집부 안으로 침입을 시도했지만 무기력했다. 그것은 그냥, 화풀이 같았다.

그들은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주 간단한 논리로 우리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경제적 수혜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도 묻고 싶었으리라. 혹은 자신들의 과거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부정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기억은 그들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령은 인간의 심연이 만들어내는 법이다.

전쟁터는 인간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곳이다. 그곳의 법칙은 오직 삶, 혹은 죽음이다.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적을 지닌 인간이라면 언제나 저 두가지 법칙에 따라 자신을 움직인다. 그것이 광기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추잡하고 지저분한 광기. 지옥을 거치고 살아난 인간은 되돌아 갈 수 없는 법이다. 상황논리에 비추어 자신을 어떻게든 정당화한다 하더라도 그의 손이 사람을 도륙하고 찢어죽인 피에 절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그의 손으로 저지른 일과 같은 정당한 재판 - 죽음의 순간이 올 때까지 그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가 타자가 되어 다른 국가의 역사에 폭력적으로 개입한 흔치 않은 사건이다. 그리고 참여의 동기나 그로 얻게 된 이득이나 이후의 역사나 어느 것 하나 정당한 것이 없다. 양민 학살, 고엽제 피해, 군사 독재의 가속화, 수많은 참전 군인들의 후유증들을 남기며 끝난 베트남 전쟁은 범국민적인 침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왔다. 하지만 상흔은 감출 수 없다. 우리는 잊어왔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잊지 못하고 있었다. 가해자인 당사자들은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밤마다 악몽은 되찾아온다. 피해자인 당사자들은 당연히 잊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가 동방의 등불이란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살해 당하는 걸 두 눈으로 봐야했다.

저자는 베트남으로 직접 날아가서 우리가 남긴 죄의 흔적들을 정면으로 목도한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다. 아주 분명하게, 자신들의 다리를 자르고 배를 뚫은 이들의 모습들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군사 정권과 문화가 만들어낸 월남 참전 군인의 환상의 실체를 보게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서 죄값을 치루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단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는다. 결국 그들은 그 지옥을 뚫고 살아남아 전쟁에서 이긴 승리자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제국과 맞서 싸워 이겨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 한가지만 바랄 뿐이다. 사죄. 미안하다고 하는 그 한마디.

기억은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그 고통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돈과 이데올로기의 광기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생채기를 남겼다. 우리는 '제국'이 우리에게 저지른 죄를 알고 있고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저지른 죄를 알고 있다. 이젠 우리의 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차례이다.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억이 필요하다. 우리가 차마 보지 않으려했던, 기만을 벗은 기억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심 어린 사죄를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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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역사
마이클 파렌티 지음, 김혜선 옮김 / 도서출판 녹두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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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도전적인 비주류의 역사는 (주로 기원후 서구 역사와 미국의 역사에 기초하여)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면서 배우는 것들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쓰여져왔는지를 사건과 인물에 대한 풍부한 증거들을 들어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기독교, 남성성, 보수 우익의 눈으로 그려져 온 세계는 수많은 영웅들과 인간이 이룬 성공적인 업적으로 가득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쓴 이가 바로 소위 '승리자'라는 지위에 올라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진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결국 행복한 것이고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도덕적 정당성을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눈에 그들은 절대 승리자가 아니다. 그들은 수많은 피지배 계급의 피를 뿌리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 착취자일 뿐이다.

일단 착취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계급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기억과 기록의 조작에 나선다. 그들은 정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를 장악하고 자신들이 의도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하여 모순되지만 겉보기로는 체계적인 과거를 구축한다. 이것은 단순히 미국과 서구의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절대 정당할 수 없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보아온 (주류)역사라는 놈은 시간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지배 계급의 논리를 교묘하게 정당화시켜주는 도구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순순히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거기엔 정보에 대한 비판과 공정한 증거의 수집, 그리고 그 기록의 보관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인식이야말로 지금의 '역사'를 만든 이들이 무엇보다도 바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역사라는 것은 그 기록이라는 행위 자체가 싸움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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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임권택.정성일 대담, 이지은 자료정리 / 현실문화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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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의 (충분히 긍정적 인식 하에서의 긴 설명이 덧붙여진)질문을 받은 임권택이 반추를 한다. 그러고는 한마디 내놓는다. '그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정성일이 표현한 것처럼 임권택은 장인이다. 그는 스스로의 말대로 영화 만드는 법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그것이 살아가는 경제적 밑천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가 만든 영화에선 장인의 기운이 살아있다. 진정 영화만을 보고 살아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이 있다.

이 두꺼운 인터뷰집은 예술가로서의 임권택이 아니라 장인으로서의 임권택을 살펴보는 작업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 작업은 예술과 기술의 구분에 대한 저 까마득한 시절의 논쟁으로 끌고 내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삶이 되어버린 영화에게 예술이란 이름은 타자(정성일)가 붙여주는 것이고 그는 임권택이 영화에서 썼던 기술적 정당성에서 그 해석에 대한 마땅한 근거를 발견한다. 임권택의 말마따나 정성일은 그의 영화들을 정리하고 해체하기를 반복하면서 임권택이라고 하는 궤적을 만들어 나간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과 삶에 대한 임권택 자신의 본능적인 반추이다. '먹고 살기 위해' 영화를 택했다는 것만큼이나 영화에 대한 진정성이 존재할 수 있는 말이 또 무어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감독 임권택은 자신의 영화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게 영화는 직업이지 일일히 기억해야 할 숭고한 가치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러티브 상에서의 도덕적 마땅함을 추구하고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완결성을 중시한다. 좌파적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던 원작을 뒤집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태백산맥>을 만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노는 계집 - 창>에서의 결말이 자신답지 않게 그토록 가혹해야 했던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감독인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시대와 사회에 대한 피해의식과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야했던(그렇게 강요 받았던) 한 개인이 말하는 한국 현대사인 동시에 흥미로운 전후 한국영화 통사이다. 그것은 배게로 써도 실용적일 이 무시무시한 두께의 책이 가지는 또다른 강점이다. 놀랍게도 이 책은 서편제가 한국 영화 흥행 기록을 갱신했다는 정도의 지식만 알고 있는 사람이 봐도 충분히 재미있다. 늘 동시대의 감독들(신상옥, 유현목, 김기덕)의 그늘에 가리워져 제대로 비평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자신의 80년대 이전 작품들을 회고하고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이후의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임권택은 자신의 눈으로 본 역사와 사회에 대해 솔직담백하게 애기한다. 그것은 2000년대를 넘어선 현재에 이르러서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영화 장인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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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랑전설 2 - 완결
오시이 마모루 스토리, 후지와라 카무이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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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개는 긍지 같은 가치를 모른다. 긍지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인간의 개에 대한 이야기다.

오시이 마모루는 배신에 대한 이야기를 즐긴다. 패트레이버 극장판에서 조직과 사회에 배신 당한 이는 그의 역할을 통해 비로소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사회를 향해 유령처럼 역습을 해오고 공각기동대의 공안 9과는 내부의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에서 태생에 대한 환멸로 인간과 흡혈귀 양쪽을 증오하면서 흡혈귀의 피를 뒤집어 쓰길 자청한 사야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인물들의 서사극이었던 그의 작품 세계의 결정적인 표상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가장 살아있는 인물이 파멸의 미래를 안고 있는 주인공들이었다는 걸 기억하자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다.(패트레이버 극장판에서 보여졌던 범인과 대비되는 고토와 조력자들의 유난히 무기력한 '표정'들을 주시하라.) 그의 작품에는 염세주의와 어쩔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모호한 태도, 인간의 역사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이 뒤엉켜 있다.(공각기동대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이지만 동시에 법가적 세계관을 갖고 있던 원작자와 인간에 대한 환멸이란 측면에서 공유할 수 있었던 의식의 결과일 것이다.)

명백하게 일본 전공투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견랑전설은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극명한 충돌이 일어나던 그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파멸에 대한 매혹으로 가득한 개떼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오시이 마모루의 캐릭터들이 그렇듯 결벽증적 숭고함의 미덕에 끌려 정해진 길로 나아간다. 온통 비장함으로 가득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숙적인 '섹트'뿐이다. 야생의 개는 야생의 개끼리만 알아볼 뿐이라고.

대체 역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비장함의 미학은 작품을 역사의 자장권에서 빼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견랑전설의 공간이 전공투 시기에 머물러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졌을 이데올로기 대립은 오시이 마모루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블러드 시리즈를 통해 이미 장황한 인간 환멸론을 준비해놓고 있었던 오시이 마모루로선 인간이라는 짐승이 가진 의식의 한계를 잠정적으로 결정 내린 상태에서 그와 같은 인간 간의 투쟁이 더없이 저열한 종류의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상 인간의 삶에 대한 가장 치열했던 투쟁은 비장할 수밖에 없었던 삶들을 치장할 들러리 정도로 격하된다.(물론 오시이 마모루가 무려 두 편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 시기에 매혹된 이유 또한 그 치열함이라는 시대적 진정성 속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여기서 사냥개로 길러졌으나 주인보다 더 나은 긍지를 가진 개들이 가질 우월함에 대한 근거가 주어진다. 개들은 굳이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억되고자 한다. 버림 받고 배신 당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긍지를 지키기 위해, 그 완고한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 기꺼기 죽음으로 달려간다.(이 부분이 시로 마사무네와 오시이 마모루가 갈리는 지점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시로 마사무네는 주체가 되는 '나'의 생존을 위한 농담 정도는 충분히 한다. 그에게 있어 삶은 쾌락이고 단 한 번만 존재하는 유일무이의 가치이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가 매혹된 것은 수도승과 같은 완고한 가치관이고 그를 통한 전승에 가깝다. 원작과는 그 분위기가 한참 다른 극장판 공각 기동대에서의 인물들이 그토록 심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매혹은 더없이 쓸쓸하다. 여기엔 영광도 없고 파멸만이 존재한다. 아니, 그들은 기억되기조차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한 존재에게만 기억되길 바란다. 그래서 오시이 마모루의 전작 속에서 그들의 귀환은 거의 언제나 악몽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이 아웃사이더들의 묵시록은 마지막, 유일하게 살아남은 특기대원 세 명을 실은 차가 어딘가로 떠나면서 끝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는 귀환할 황이처럼, 끝이 아니다. 비록 악몽이라 불릴지라도 그들은 돌아온다. 돌아오기 위하여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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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역사 - 이룸휴머니티즈 003
장 프레포지에 지음, 이소희.이지선.김지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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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학문적 연구는 커녕 이슈적인 측면에서조차 가질 기회가 거의 없었던 우리나라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축복이다. 가장 인류 지향적이면서 가장 오해되기 쉬운 아나키즘이라고 하는 인간 의식이 빚어낸 결과물의 한 분파에 대해서 이 책은 전혀 어렵지 않게 그 역사와 진행 과정을 통찰해 본다.

아나키즘은 그 어느 것보다 분명한 인간 욕구의 소산이다. 자유라고 하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 누구도 당연하게 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상주의적인 대안은 그렇기 때문에 계몽적이고 인류애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은 근본적으로 낭만주의자들이며 비타협적이다. 그들은 사상적인 결벽증 환자들이며 동시에 모든 의지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정신 상태를 보이고 있다. 방관적이면서도 통제적이고 국가에 저항하면서도 국가 존속에 대한 차선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여기서 아나키스트들은 무수한 분파와 사상적 경향을 가지고 소개된다. 그들은 하나 같이 같으면서 또 다르다. 그것이 완전한 자유의 결과물이라면, 이 이합집산의 공동체에게 내일은 있는 것일까.

아나키스트들을 기능론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도 있다. 즉, 그 존재 자체가 필요악이라는 것. 그 증거로 이미 무수한 아나키즘 운동이 불러 일으킨 사회 제도적 변화들은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신천지를 꿈꾸는 이들이 작용하는 역할을 그리 단순하게 한시적으로 끊어놓는다면 그들의 존재 가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저 그들은 통괄적인 시야 속에서의 부품으로만 머무르는 것인가.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정작 아나키스트들 자신이 그리 생각지 않으리라.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실현될 인간의 미래이고 그 날을 위해 영원히 계속될, 완전한 자유를 향하고 있는 인간의 의지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행동에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한 그들은 실패라는 말을 모른다. 미학적인 관점이든 그렇지 않든 그들 자신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일을 해낸 순간, 가장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행동함으로써 정당함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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