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냥 - 하
텐도 아라타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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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옴 진리교 사건은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를 부숴버렸다. 그것은 거품 경제 붕괴 이후 끝을 모르고 지속되던 경제 불황 속에서 마지막 확신으로 가지고 있던 위태위태한 도덕적 가치마저도 깨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도 정당할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오직 인간의 광기의 충족이란 측면에서 허용될 수 있는 그것은 어둠의 산물이었다. 일본이라는 거대한 욕구 불만의 사회 지하에 묻혀있던 음침한 광기의 도발. 옴 진리교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워버렸다. 전방위적인 피해의식의 확산, 학벌과 계급을 잣대로 기능적 측면에서 인간을 구분하는 의식에 대한 철폐. 그리고 그 사건을 전후로 연이은 근친간 살인 사건의 횡행은 사실상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을 의식적인 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외부에서의 피해 의식과 내부에서의 피해 의식은 하나로 겹쳐졌다.

가족 사냥은 그런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전반적인 사회 불안의 와중에서 가족에 대한 희망마저 저버리게 된 일본인들에게 이 책은 르포와 비슷한 수준의 공포를 선사했으리라. 작가의 힘있는 필체는 잔혹한 살인 장면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서부터 시작하여 느릿하게 각자의 문제를 가진 이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들이 얽혀서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흐름은 이 작가가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데에 일가견이 있음을 충분히 증명할 정도로 매끄럽고 설득력이 있다. 인물 하나하나는 현대 일본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어른들의 아이콘이며 현상을 다루는 그들의 행동엔 각자의 삶의 궤적을 따르는 정당성이 있다. 이것은 작품의 현재적 가치를 보장해주고 악몽이 만들어지게 된 근원을 밟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작품에서 진정한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아이들에 와서는 작가의 필치가 한없이 약해진다. 사건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현상 그 자체인 아이들에서 말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자신감 결여를 드러낸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단면적인 측면에서만 다루어지는 아이들에 대한 묘사는 앞서 말한 것처럼 아이들을 어른과 동등한 입장에서의 분석 대상이라기보다는 현상 그 자체로만 보여지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진정한 '괴물'은 범인이지만 그 '괴물'을 탄생시키게 만든 촉매인 아이가 너무도 뻔하고 가정 연구소에서의 공식 그대로 따라서 그려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이 분석적인 측면에서의 패배를 뜻하는지 아니면 작가적 틀에 의한 거세의 결과로 표출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굳이 후자쪽으로 맞춰본다면 끝에서 보여주는 더없는 가족친화적 결말은 앞서서도 미리 감지되었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열쇠인 '탕아'의 회개가 시계 부품처럼 끼워져 있는 이 결말은 결국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작가의 결단인 듯 하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끊이지 않고 확장되어가는 가장 가까운 이들간의 죽음의 이야기 속에서 방법론적으론 두 가지, 자살과 턱없는 희망이라는 해결이 있었음을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던 '아이들의' 문화 아이콘들(신세기 에반게리온, 배틀 로얄)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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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환상문학전집 14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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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화 하나하나가 미에 대한 장황한 서설을 다루면서 동시에 수사적 쾌감을 꾀하고 있는 이 더없이 유미주의적인 책을 통해 오스카 와일드가 하고자 했던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명백히 고딕 경향 아래서 퇴폐의 미학을 드러내고 있는 이 이야기는 결코 양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순리를 거스르면서 자신의 영원성을 추구하려했던 일탈적인 사고방식의 지난한 결과물이다.

일찍부터 영원이라고 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버린 인물들이 순간의 쾌락에 인생의 가치를 두게 되는 이야기는 이제와선 그리 새롭지 않다. 그 시류의 거의 증조 할아버지격인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휘황한 대화들의 잔치는 더없이 달콤한 악마의 유혹으로 들려온다. 평생을 유미쥬의자로 살았던 오스카 와일드는 여기서 명백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매혹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다다르지 못했던, 어쩌면 작가적 양심이란 족쇄에 걸려 그 주변의 영토에서만 머물러야했던 그런 이야기.

하지만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퇴폐와 영원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그에 대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영원에 대한 표상으로 만들려 하는 의지로 충만하다. 오직 꺼지지 않는 미만이 영원의 증거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작가의 태도는 작품 자체의 서술을 양식적이고도 수사적인 경지에의 몰입을 위한 고딕 경향의 노골적인 발현으로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대화들을 의지 발현의 발화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 정당한 위치에 서 있지 못하고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종국, 피멸이라고 하는 당연한 귀결로 향하고 있다. 영원하지 못할 미가 가져야 할 마땅한 운명이라면 그 영원을 지속시켜 줄 끝이 아니겠는가.

서로 닮은 꼴인 인물들은 약간씩 다른 동어반복을 통해 독자를 서서히 중독적인 퇴폐미의 세계로 안내한다. 여기엔 치열한 게임도, 갈등도 없는 당연한 귀결로의 느슨한 여행이다. 마치 운명처럼. 인물들이 마지막에 감내해야했던 예정된 파멸로의 도착처럼. 삶의 유한함에 반대하려했던 인물들이 그 자신의 가치를 결정내리려했던 방법이 이토록 간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적 측면에서의 축복이라고밖엔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런 파멸에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이들은 정말 복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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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 손가락의 기적
루이스 새커 지음, 이진우 옮김 / 사람과마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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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리 대왕보다는 톰 소여의 모험에 더 가까운 이 작품의 주인공은 톰 소여가 당대의 건강한 미국 소년의 이미지를 잡아낸 것처럼 현재의 미국 소년들의 음울한 이미지를 포착해내고 있다. 그는 뚱뚱하고 사려 깊지만 소심하다. 그는 대인 관계에 그리 익숙치 않고 자신의 운명에 무력하다 싶을 정도로 끌려다닌다. 그가 초록 호수라는 감옥으로 떨어진 것은 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운명과 속죄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주인공이 된다.

이것은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인과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초록 호수로 들어가는 저자의 속도는 거침이 없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여러 이야기들을 다루는 솜씨는 능수능란하다.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에 모든 소재와 이야기들을 압축적으로 다뤄내어 마지막까지 매끄럽게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이 작품을 한 편의 멋드러진 오락물, 이벤트가 풍성한 롤러코스터로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주제를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서 고통과 그것을 겪어내는 이가 얻을 값진 성과에 대해 얘기하려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놓치고 있는 삶이라는 선물이다. 진정 고통에 빠졌을 때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가치라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에서 머물러 있는 법이다. 운명이라고 하는 자신도 어쩌지 못할 힘에 끌려 고통 속으로 들어갔던 주인공은 그 안에서 삶을 발견하고 그 삶이 이루어내는 기적을 목도하게 된다.

운명의 끈에 끌려 모험을 치르고 온 주인공에게 펼쳐진 것은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삶, 어쩌면 지리할 수도 있는 운명의 반복이다. 하지만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할 운명의 소용돌이를 거치고 나온 주인공의 눈은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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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조이스 캐롤 오츠 / 버팀목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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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이스 캐롤 오츠의 이 책은 지금도 내가 읽었던 책들 중 가장 무자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31세. 백인. 미국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이큐는 100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다. 그는 공손하게 말하고 친절하며 동물을 배려한다. 하지만 그는 괴물이다. 그의 의식은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고 맹목과 불안을 동시에 경험하며 문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해결 수단으로 폭력을, 그것도 살인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서슴없이 선택하는 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런 인물의 내면으로 단숨에 들어간다. 이 종잡을 수 없는데다 음침하고 괴기스러운 의식의 여정을 쫓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경험이 아니다. 그런데다 그 과정에선 일체의 여과가 없다. 작가는 말그대로 괴물의 머릿 속을 어떠한 가공도 하지 않은채 그대로 보여준다.

이 겉껍데기만은 한없이 정상적인 괴물을 보면서 난 또다른 대량 살인마들을 떠올리게 된다. 히틀러, 스탈린. 식민 시대의 통치자들. 그리고 수많은 독재자들. 미국 대통령. 그들과 제프리 다머가 비교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정상적인 살인과 비정상적인 살인? 대체 그 기준이란 무엇인가? 고도의 술수와 정치적인 견해를 통해 완벽하게 의도된 살인을 저지른 그들과 단지 자신만의 섹스 노예를 만들겠다는 '순진한' 욕구로 살인을 저지른 제프리 다머를 비교해 볼 때 과연 어느 쪽의 악이 더 큰 것인가. 그것은 소위 인간적인 '고상함'의 문제란 말인가. 얼음 송곳보다는 서류에 한 줄 사인을 긋는 편이 더 품위가 있기 때문인가. 그 사인이 얼음 송곳보다 몇 천 배나 더 되는 사람들을 죽여버리는데도 말이다.

한니발 렉터가 시대의 수퍼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현재를 꿰뚫어보는 눈을 갖고 있었고 동시에 현대를 지탱하는 악마성의 한 축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고의 문명과 최고의 야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악마였고 그런 악마에게 도움을 구걸하고 의지 없이 휘둘리는 인물들을 통해 시대에 대한 비웃음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그의 살인이 미학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얼음 송곳과 사인이 별 차이가 없음을 은유적이고도 매혹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매끄러운 포장이었지만 하나의 진실을 우회해서 드러내 보이고 있는 포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과 도덕,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하는 인간의 차등이란 것을 동의할 수가 없다. 나는 모든 평균과 모든 발전, 그리고 포장된 선과 자의식을 인정할 수 없다. 시간이 갈수록 야만과 문명은 같은 의미가 되어가고 있다. 보다 세련된 야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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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헤븐 3 - 완결
다카하시 츠토무 지음 / 아선미디어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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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유람선, 인간이 사는 이 세계를 상징하는 동시에 페쇄 공포증을 유발시키는 공간, 악마적 살인마, 살인마로 개조되어 이미 그 우수한 성능을 유감없이 입증해 보인 괴물. 악마의 가족,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했지만 도덕적으론 바닥을 모르게 망가진 또다른 괴물들. 무고한 피해자들, 세계의 사람들. 무의식적 폭력, 인종주의. 그리고 그 아비규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자들.

써놓기만 하면 정말, 이만한 이야기가 없다. 모든 상황은 서스펜스의 황금비가 있다고 하면 바로 이것이라 할 정도로 딱딱 이가 맞게끔 만들어놨다. 오오, 이거 장난 아니다. 단지 상상만으로도 몬스터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의 대단한 아우라가 풍겨나지 않는가? 이런 기본적인 단서들만으로도 사람을 제압해 버리다니 과연 다카하시 츠토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를 보여줄 것인가.

그런데, 딱 그 정도다. 딱, 상상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 패를 손에 쥐고도 이 정도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건, 실패다.

우선 저 패들을 잘 살펴보라. 어딘가, 어딘가에서 본 무척 낯익은 요소들이지 않은가? 실로 그렇다. 거대 유람선이라는 폐쇄 공간이야 헐리웃 고전시대서부터 즐겨 쓰여오던 것이고 악마적 살인마야 네오 느와르의 단골 주인공. 작가의 의도가 뻔뻔스러운 것은 돈 많고 싸가지 없는 쥬노 패밀리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는데 여기 당주인 영감은 한니발의 멋없는 악역인 메이슨과 붕어빵이다. 그런데다 그외 등등... 이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나머지 가족들의 정신 상태가 닳고 닳은 종류. 아.... 워낙 개성이 출중한 인간들이 이렇게 포진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나머지 캐릭터들, 뭐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별로 상관도 안 하게 되버렸다. 존재감 상실. 이 정도쯤 되면 보는 사람이 피곤할 정도니 그리는 사람이 짜증이 나겠다.

물론 아주 새로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한대로 이 재료들은 재료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요릿감이 나올 수 있는, 지나간 이야기들의 역사가 증거해주고 보장해주는 일종의 모범 답안에 가까운 것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재료들을 다루는데 실패했다.

생각해보면 작가의 대표작인 지뢰진 또한 그리 새로운 작품은 아니었다. 주인공 이이다 쿄야는 더티 하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성질 더러운 형사의 충실한 일본식 변형이었고 그 안에서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은 현대라는 이름의 지뢰밭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작가는 카리스마적인 인간 말종을 보다 극단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러한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지뢰진은 그런 인간 말종들 간에 벌어지는 긴장감과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포착해내는 스토리, 그리고 스타일리쉬한 작화에서 그 탁월함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블루 헤븐은 과잉이 가져오는 함정에 빠진 작품이다. 저 모든 매력적인 조건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확인해 보라. 너무 단단하면 부러지기 마련이고 끝까지 다다르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여기서 쓰일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이토록 개성 강한 캐릭터들과 긴장감이 폭발해야 할 상황들은 푹 불어버린 우동을 먹을 때처럼 물렁물렁하고 뚝뚝 끊어지는 느낌만을 안겨주게 되버렸다. 그렇기에 작가가 의도했을 인종주의와 미국에 대한 은유가 그리 힘없게 들려오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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