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 작가정신 소설향 15 작가정신 소설향 23
이응준 지음 / 작가정신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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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꾸준하고 성실한 자기 파괴를 거쳐 완전한 파멸에 이르는 주인공들을 우리는 질리게 봐왔다. 하나 같이 파괴로 이끌려 들어가는 일련의 마조히스트들에 대한 작가의 매혹이 곁들여졌던 그 이야기들은 인간성의 극단을 걷는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특화된 욕망으로 인해 대부분 무척 끈적거리고 탐미적인 모양으로 흘러가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조금 틀리다. 그것은 작가가 유구한 소설의 역사 속에서 이미 닳을대로 써먹은 저 인물상에 대해 통렬한 선언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어가 여타 비슷한 류의 이야기들을 접한 이와 흡사한 반응을 보이자 작가는 그런 반응에 대해 당신이 그를 소설 속에서 봤기 때문이라고 일침한다. 내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다른 이가 써주는 것이듯, 군대 다녀오지 않은 이가 군대에 대해 더 잘 안다. 찰스 맨슨의 칼에 썰리던 샤론 테이트는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은가. 그러나 찰스 맨슨의 자서전은 베스트 셀러가 됐다. 언제나 진실보다는 거짓이 더 진실답게 보이는 법, 작자의 매혹은 그에 한 겹 덧칠해지는 달콤한 양념인 법이다. 그렇기에 서문이나 인터뷰에서 보여진 작가의 태도에서 새로운 방향에서의 글쓰기를 기대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부터 보자면, 아니었다. 그 자신에게 있어서나 타인에게 있어서나 실패에 이르는 삶을 산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준엄한 도덕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는 무척 감각적이고, 그리고 길다. 상징과 은유가 흘러다니는 이야기 속엔 다시금, 그 '매혹'이라는 놈의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길을 잃은 것일까? 마지막, 인터뷰까지 읽고 나서 드는 생각. 작가가 진정 자신의 성찰을 관철시키고자 했다면 차라리 신문 사회면이 그 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류는 신문 사회면에서라면 '한없이 방탕한 기지촌 약물 중독 부랑아'일 뿐이다. 그렇게 작성됐을지도 모를 건조한 텍스트의 인물을 끌어내 살아있는 인간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작가라는 직업. 타인의 이야기로 자신을 구원해야 하는 글로 씌어진 순간부터 이 이야기가 가진 난점은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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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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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하게 돌아가는 시디 플레이어 안에서 세심하게 세공된 피아노 음이 가만히, 세상으로 울려 퍼져 나간다. 울거나, 웃거나, 그 순간만큼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 그것이 글렌 굴드의 피아노다.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완전히 은폐된 사생활, 모순에 찬 행동들, 돌발성, 사견의 배제.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이해할 어떤 단서도 남겨두지 않고 오직 음악만을 '만들어 놓고' 세상을 떠났다. 모호함의 경계에서 멤돌았던 그가 남긴 가장 분명한 단서는 기록으로 남은 그의 (독해하기 힘든) 태도와 앨범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왜, 라는 질문을 안고 그의 연주, 기록 필름, 앨범, 행동들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그가 어째서 그렇게 피아노를 연주했는지에 대한 문제로 직진해 들어간다. 그의 어린 시절, 일생의 에피소드나 여자(혹은 남자?) 문제, 정치적 견해 등등은 되려 사소하고 불필요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오직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살았고, 아니, 오직 그것만을 남겨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굴드가 죽을 때까지 털어놓지 않았던, 또한 그 자신만이 추구할 수 있었던(말마따나 그의 연주는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비원으로의 탐색이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을, 글렌 굴드라는 인간을 지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글렌 굴드였다. 그렇지만 그 결과로 그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되었다. 그 모순처럼 저자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맞춰 구성한 단락들 속에서 드러나는 굴드들은 그 하나하나가 굴드이면서 굴드가 아니려고 한 굴드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들은 서로 엉키고 더해지고 다음 단락들에 영향을 주면서 좀처럼 잡기 힘든 글렌 굴드라는 모양을 조금씩 드러낸다.

악마이자 천사, 음악의 순수주의자, 수도승. 그러니까 그는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음악 그 자체만으로 들려오길 갈망했다. 음악이 있을 그 자리에는 오직 음악만이, 살아서 존재하고 있기를 바랬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이기엔 너무 파격적이었지만 파격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순수하고 무성적이었던 그는 이 시대의 타락의 지표이면서 진리의 한 표상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만큼이나 믿지 않고 있는 것, 바로 '진실'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그의 연주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 아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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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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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석제는 인간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애정을 가진 드문 작가이다. 인간이라는 고등 포유류가 펼치는 일련의 작태들에 현란한 말빨을 덧씌워 압도적인 웃음을 선사하던 그는 누구나 죽쑨 얼굴을 하고 지내던 지난 세기말을 웃음으로 통과해 낸 거의 유일한 작가다. 그런 그가 이번엔 아주 노골적으로 인간의 힘을 믿는덴다.

그래서 우린 그가 말하는 인간의 힘을 몸으로 체현하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예전에 있었던 나라, 조선에 살았다던 그 선비, 채동구가 보여주는 인간의 힘이란 별 게 아니다. 그것은 믿음, 자신이 믿어 지키고자 하는 바를 고집스레 지탱해나가는 인간의 마음이다.

우와! 되게 시시하네! 그렇다. 시시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석제를 아직도 웃기기만 할 줄 아는 작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얘기가 시시하든 말든 그리 상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저 장대한 시골 폭력배의 삶은 따지면 뭐 그리 대단한 주제였나?

그런데, 아! 안타깝게도 작가, 별로 안 웃긴다. 정말 안 웃긴다. 아주 간간히 웃긴다. 이거, 모반이야! 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다....

물론 작가 성석제, 웃기는 쪽에 서야 정말 끝내준다. 엄청 웃기니까. 그런데 이 양반, 중간에 간간히 심각한 표정의 외도도 좀 했고 평하는 게 업인 양반들에게서 그럭저럭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그 외도들, 내가 보기엔 영 아녔다. '그려.... 그만 됐으니 이젠 좀 웃겨주슈. 딴집 가니까 뻘쭘하잖어....' 이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기, 인간의 힘은 아니다. 제대로 웃긴다. 아, 그래 제대로 웃긴다니까 파안대소를 따발총처럼 내뿜을 수 있는 개그를 선보인다는 거냐, 그건 아니다. 여기서 제대로 웃긴다 함은, 작가가 자신의 호흡을 관장하는 법에 있어서 멋진 경지에 올라 있다는 말이다. 즉, 그는 여기서 우리를 여유 있게 웃겨준다.

작가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막말로 말해서 평생 웃기기만 할 건가? 성석제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분명 양날의 검이었다. 뻔한 말로 틀에 박히는 게 싫어서 외도도 해보고(여기서 쓰는 외도라는 말이 진짜 웃기는 말이다.) 그런 거 아닌가. 그리고 이 양반, 본래 시인 아니었던가. 그의 입담은 언어 작용의 결정체라는 고결한 수사 따윈 집어치더라도 어쨌든 필살의 한방으로 구현될 언어를 위해 다듬어진 것이지 웃길려고 다듬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웃긴다 라는 틀에 작가 성석제를 가두는 일이야말로 진짜 모반 아닌가.

아무튼 작가, 딱 적당하게, 안정된 호흡을 쉬어가며 채동구라는 양반의 삶을 다룬다. 어, 근데 이거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글쎄 채동구, 명나라 만세 외친다. 네 번씩이나 벌였던 그 초라한 가출들의 목적도 유학도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에 다름 아니다. 어, 이거 수구 아냐? 보수 아냐? 한심하기론 조선 사대부 500년 역사를 고스란히 이어 받았고 주변에 다양한 민폐나 끼치는 이 한량이 인간의 힘이라니? 100년 전 쯤이면 시대의 한심함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졌을 이 양반을 온갖가지 이데올로기 및 그외 다양한 태클에 걸릴 위험을 감수하면서 세상에 활자로 된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작가의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 설마 몰랐던 걸까?

이거, 민감하다. 작가는 분명 인간의 힘을 말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것이 과연 마땅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강직함, 곧음. 하나의 신의를 위해 묵묵히 나아가는 청렴함. 그런 이름 없는 이들이 모여 이루는 커다란 가치가 인간의 힘이라는 것까진 알겠다. 그것이 이 혼란스럽고 가치 없는 세상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납득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필 끊임없이 그 가치의 정당성을 물어야했던 이데올로기의 한복판에서 벌인 유학생의 내가 옳다 식의 분투기라면, 소재의 태생적 불운인 동시에 재고의 여지를 두게 될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문득 움베르토 에코의 돈 키호테인 바우돌리노가 보여준 신화적인 세계에서의 열정과 자유스러움이 부럽게 느껴진 것은 이것이 인간 의식에서의 모험이어야 마땅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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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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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고 나면 딱히 할 말이 안 떠오르게 만든다. 모든 약점, 모든 강점을 숨기는 것 없이 그대로 드러낸 이 소설은 주먹으로 치면 스트레이트다. 그러니 이 책은 그냥 읽어버리면 된다. 머리 써서 숨기는 것이 없기에 당신은 그 솔직함에 유쾌해질 수도 있겠고 노골적인 치기어림에 반발을 할 수도 있겠다.

저자가 뒤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작품에서 쓰이는 키치들은 오로지 전략적인 차원에서 선택된 것들이며 그 소재들을 다루는 태도엔 그 자신이 잘 알지 못하기에 최소한의 애증도 없다. 그런 태도는 '전략적'으론 분명 타당한 바였다. 각 캐릭터들과 명사가 지니는 최소한의 기의만으로 이야기와 주제에 승부를 거는 것. 이것만이라면 최소한 그 문제에서는 작가 자신이 지닐지도 모를 몰입 및 정보 부족으로 인한 의식의 적을 만들지 않아도 될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작품이 지니는 독자성의 반감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하는 얘기가 뻔하다는 거다. 동네에서 만난 친구들하고 술자리에서 떠들면서 읊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미국 만화에 대한 약간의 관심과 현실 인식이란 차원에서 생활 만담가 정도에 이른 사람이라면 결합시킬 수 있는 그런 이야기. 그런 부분에서 이 스트레이트가 보기보단 위력이 별로라는 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것이 신념이고 이야기꾼으로의 작가가 가진 의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 태도에 작품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미덕이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적어도 그런 면에선 작가가 글쓰기를 격투에 비유한 바를 이 소설은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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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베르너 풀트 지음, 김지선 옮김 / 시공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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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투오소의 연주는 매혹적이고 압도적이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연주를 인간의 것으로 여기질 않았다. 그가 가진 재능과 지긋하다 싶은 연습의 결합은 세상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오해됐다.

사람들은 그를 악마와 함께 걷는 이로 알고 있었다. 그의 개인사적 편력이 그런 오해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음은 분명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오해였다. 아니, 그것은 대중의 열망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너무 탁월하고 뛰어난,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에게 지워지는 열광과 오독. 그것이 센세이션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최초의 대중적인 슈퍼 스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자신에게는 그 열기를 이해할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책은 동시대인들의 기록들을 토대로 파가니니에 얽힌 소문과 진상을 가려내려 한다. 그는 낭만주의가 만들어낸 영웅이자 악마였고 궁극적으론 희생자였다. 그저 한 사람의 탁월한 연주자였으면 그것으로 됐을 것을. 그의 능력에 관한 대중의 호기심, 질시, 경외감은 그를 가만 놔두질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매체를 통해 만들어지는 왜곡과 그에 끝없이 덧붙여지는 (마치 유령 같은) 소문의 악순환을 보게 된다. 그것이 제도의 이기심과 결탁되었을 때, 그는 죽은 채로 36년을 떠돌아야 했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 매체의 가능성이 한도 끝도 없이 넓어진 오늘날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가. 네트의 구석 게시판에서 쓰여진 자극적인 텍스트가 세상을 한 바퀴 돌아 한 사람, 한 영혼, 한 공동체, 집단을 오독하게 만드는 일은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파가니니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고자 한 저자의 시선은 차분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대중이 가하는 폭력의 잔인함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확장되고 있는 인간의 못 된 버릇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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