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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ㅣ 환상문학전집 14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대화 하나하나가 미에 대한 장황한 서설을 다루면서 동시에 수사적 쾌감을 꾀하고 있는 이 더없이 유미주의적인 책을 통해 오스카 와일드가 하고자 했던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명백히 고딕 경향 아래서 퇴폐의 미학을 드러내고 있는 이 이야기는 결코 양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순리를 거스르면서 자신의 영원성을 추구하려했던 일탈적인 사고방식의 지난한 결과물이다.
일찍부터 영원이라고 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버린 인물들이 순간의 쾌락에 인생의 가치를 두게 되는 이야기는 이제와선 그리 새롭지 않다. 그 시류의 거의 증조 할아버지격인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휘황한 대화들의 잔치는 더없이 달콤한 악마의 유혹으로 들려온다. 평생을 유미쥬의자로 살았던 오스카 와일드는 여기서 명백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매혹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다다르지 못했던, 어쩌면 작가적 양심이란 족쇄에 걸려 그 주변의 영토에서만 머물러야했던 그런 이야기.
하지만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퇴폐와 영원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그에 대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영원에 대한 표상으로 만들려 하는 의지로 충만하다. 오직 꺼지지 않는 미만이 영원의 증거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작가의 태도는 작품 자체의 서술을 양식적이고도 수사적인 경지에의 몰입을 위한 고딕 경향의 노골적인 발현으로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대화들을 의지 발현의 발화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 정당한 위치에 서 있지 못하고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종국, 피멸이라고 하는 당연한 귀결로 향하고 있다. 영원하지 못할 미가 가져야 할 마땅한 운명이라면 그 영원을 지속시켜 줄 끝이 아니겠는가.
서로 닮은 꼴인 인물들은 약간씩 다른 동어반복을 통해 독자를 서서히 중독적인 퇴폐미의 세계로 안내한다. 여기엔 치열한 게임도, 갈등도 없는 당연한 귀결로의 느슨한 여행이다. 마치 운명처럼. 인물들이 마지막에 감내해야했던 예정된 파멸로의 도착처럼. 삶의 유한함에 반대하려했던 인물들이 그 자신의 가치를 결정내리려했던 방법이 이토록 간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적 측면에서의 축복이라고밖엔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런 파멸에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이들은 정말 복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