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제임스 레스턴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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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이권다툼인 동시에 야만과 폭력의 생생한 현장이었던 십자군 전쟁에 대한 가식적인 전설의 실체를 알고 있는 이들은 그 전쟁이 어떤 모양으로 전개되었으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이 전쟁을 현미경의 시점으로 바라보기로 했는데 그 대상은 3차 십자군 전쟁의 두 축, '술탄' 살라딘과 '사자왕' 리처드라는 두 인물이다.

이후 수많은 전설과 풍문의 주인공이 된 두 사람을 놓고 저자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들어간다. 그 작업은 이후 우리가 온갖가지 전설의 변형으로 듣게 될 두 사람의 이야기(특히 리처드쪽에)에서 거품과 허상을 빼고 실체를 바라보려 하는 시도다. 여기서 우리는 동방과 서방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이 전쟁에 임했는지를 목도하게 된다.

이 책은 역사에 관한 이야기지만 역사의 기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는 온갖 이야기들 속의 주인공인 두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파내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서라기보다는 인물에 대한 평론서에 더 가까워보인다. 우리는 역사 속의 위대했던 인물들이 얼마나 궁색한 음모와 비열한 상상을 하면서 살았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지만 그 이상이 아니다. 너무나 충실하게 두 사람을 살려놓으려했던 저자의 입장은 그들을 대하는 완전히 중립적인 태도에 힘입어 신빙성을 얻는다.

그 결과로 드러난 십자군 전쟁, 그리고 인물들의 전설은 얼마나 속 빈 강정 같은 꼬라지인지. 이 책은 잘 빚어진 박제품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처럼 보는 이를 건조한 진실의 순간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렇게해서 보게된 진실의 형상이 그리도 지리멸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착각해 온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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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영역의 확장
미셸 우엘벡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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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사려깊은 타일러 더든의 독백으로 이뤄지는 이 작품은 내내 우울하고 축 늘어진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그것은 흔히들 절망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주인공 나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그 절망의 요인들은 하나 같이 불가해하면서 부조리한 것들이다. 마치 이 세계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은, 마땅히 어찌할 수 없으면서 동시에 현상 그 자체로만 설명이 가능한 신의 의도적 실수. 그는 세상을 커다란 차별과 불평등의 세계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런 세계를 존재 자체로 지리멸렬하게 표상하는 티스랑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엔 동정과 비웃음이 뒤섞여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속이길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티스랑을 속이고 동료들을 멸시하고 정신과 의사의 판단을 조롱한다. 그렇다. 아무 것에도 욕구를 안 느낀다던 이 양반의 정신 세계는 삶에 대한 관념을 초탈해버린 정신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아직 우매한 자들에 대한 멸시에 희열을 느낀다. 그것이 이 잘난 화자의 유희다.

하지만 그 생명 없는 유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는 화자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 구원을 바라지만 믿질 않으며 그렇다고 완전한 나락에 빠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에게 늘어 놓는 일장 연설에서 나오는 현대인의 '고통'이라는 개념을 표상한다. 그것은 곧바로 모순이 되고 다시 고통이 되는 영원한 순환의 표현이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그 고통의 모순을 파악해버린 화자는 시종일관 무기력한 태도와 어조 속에서도 드러나지 않던 죽음에 대한 매혹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토해낸다.

이 지독하게 지리하며 자학적인 인물의 내면의 결말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일상의 평온을 재발견하기 위한 기억의 소거를 보여줌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자신을 없애면서 자신을 만나고 삶의 목적을 상실함으로써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된다. 아주 흔하고 당연한, 그래서 마땅히 그런 역할을 수행할 듯한 뻔한 풍경 아래에서. 그는 자신이 보던 '당연하다'는 것들을 억제하고 부정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그 흔한 감동 속에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었다.(여기서 역자가 언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과 비교해서 문학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납득 가능한 친절함이라는 강점을 찾을 수 있겠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지지할 수가 없다. 영화가 생활이라는 이름의 문학이 된다면 그 영화의 가치는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현대인이라고 하는 붙잡을 수 없는 모순의 형태를 띄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황량한 의식을 성공적으로 잡아낸 여정 끝에 보여주는 이 마지막은 외부, 이미지의 붕괴를 통해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던 파이트 클럽의 결론에 비하자면 훨씬 성숙한 결말이다.(어쩌면 경제적 측면에서의 계급 문제를 도입해 볼 수도 있겠다.) 참고로 이 작품은 파시즘적 무정부주의와 키치적인 미학을 극단까지 끌어냈던 그 작품보다 2년 먼저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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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횡단 특급
이영수(듀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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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수다가 계속된다. 팝컬쳐 전반에 걸친 저자의 박학다식함은 가히 그 끝을 모를 지경이라 문외한인 이(바로 나같은 인간을 말함이다)에게 이 책은 거대한 서브 컬쳐 매거진처럼 느겨질 정도다. 코드가 맞지 않는 이들에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기호의 잡다한 잡동사니. 바르트가 패션지에서 느꼈던 흥미를 '모드의 체계'로 연결시켰던 것이 기억날 정도다. 하지만 듀나는 '모드의 체계'의 분석 대상인 기호가 아니라 기호를 통해 '모드의 체계'가 되려고 했다.

단순히 SF라는 한정된 영역보다는 서구 환상 문학 전반에 걸친 애정이 드러나는 이 책의 서술 문장은 무척 고전적이라 차분하며, 적당한 블랙 유머와 시니컬함이 가미된, 정확히는 앨런 포의 세계에서 노닐던 러브크래프트도 아니고 문장 자체를 기호로 만들어버리는 윌리엄 깁슨도 아닌 필립 K. 딕이 보여준 적절한 밸런스의 단순 세련된 문장들에 가깝다. 또한 이것은 하드 SF보다는 관념론적인 영역의 탐구를 진행시키는 저자의 스타일에도 기인한 것이리라. 그런데 딕의 작품과 이 작품의 차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인용되고 끌어와지는 팝컬쳐 전반에 걸친 저자의 취향이다. 그 특화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작품집에 실린 각각의 단편들은 과밀한 정보량을 함유하는 동시에 딕의 작품들이 가지는 보편적 정서와는 많이 어긋난다.

작가가 작품 개개에 쏟아부은 노력은 언뜻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은 전통 SF의 영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자신(들)이 경배하는 작품의 구조를 빌려와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지는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나면 어느 작품 하나 진정 새롭다고 여겨지지 않는 이상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결과는 저자가 가지는 태도가 창작자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작품의 평가자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특유의 시니컬함의 근거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겠다.

타란티노에 대한 정확한 평론을 여기에 대입시켜 볼 수 있겠다. '그는 배우들을 이용해 걸작을 만들고 싶어한다기보다는 그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고 떠들고 놀길 바란다.' 다만 저자는 열광보다는 비웃음쪽에 더 비중을 싣기로 결정한 듯 싶다. 그(들)은 패스티쉬, 패러디, 키치들로 가득한 자신의 놀이터가 가지게 될지도 모를 모래성 같은 불안함을 알고 있고 그것을 자신이 섭취한 문화 전반에 대한 통찰로 이끌어낸 시니컬함의 철학으로 보완하려 한다. 확실히 삶과 인간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폐부를 찌르는 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임기응변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말빨 좋은 작가의 반응성 좋은 순간 되받아치기 이상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건 왜일까. 그것이 작가의 내밀한 사고 끝에 나온 장고의 결과물이라면 잡다한 취향 속에서 휘발된 알콜 같은 모양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확실히 불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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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기사 가일스 밀턴 시리즈 4
가일스 밀턴 지음, 이영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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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다른 저서들을 미루어 생각해 보자면 저자의 역사관에 대해 흥미롭고도 의심스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선택이라 할 수 있는, 존 맨드빌이라는 이름으로 중세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유럽 밖 다른 세상에 대한 환상과 왜곡을 형성케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영국 기사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려는 저자는 그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밟는 모험을 시도한다. 그것은 역사의 체현, 진실의 확보, 생생한 육담의 기록이란 측면에선 분명 미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에세이와 사가로서의 의무가 뒤섞인 글은 무척이나 산만하다. 마치 맨드빌이 쓴 '여행기'가 가지는 확인 가능한 진실과 확인 불가능한 거짓의 동거가 주는 혼돈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가 잡아내려고 하는 맨드빌의 그 문제 많은 책과 결과적으로는 흡사한 모양을 보이게 된다. 소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어야 할 이야기가 끝이 날 때까지 계속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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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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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두려운 경험이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실수, 오해, 그리고 총체적인 어리석음의 결과물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는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를, 그리고 그걸 움직이게 만든 문명이라고 불리는 흐름을 마땅히 '옳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책은 아예 제목부터가 <야만의 역사>다. 이쯤 되면 거의 선전 포고 수준이다. 마음 다잡아라.

스벤 린드크비스트, 우리 나라에선 유독 인기가 없는 이 대머리에 흰 수염을 단 스웨덴 할아버지는 식민 시대의 한 정점을 묘사한 콘래드의 '어둠의 한가운데'를 들고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킨다. 그러나 잠깐. 머리말에서 밝히는 것처럼 이것은 말그대로 이야기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가 전해줄 무게감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내용은 제목 그대로, 우리에게 심각한 가치 판단의 문제를 일으킨다. 물론 책이 전해주고자 하는 바는 명쾌하다. 그리고 또,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면서도 끊임없이 반복되 왔던 우리 인류의 야만에 대한 차갑고 냉정한 기억이다. 과연 야만은 무엇이고 문명은 무엇인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분쟁없이 평화롭게 살고자했던 '야만적인' 공동체와 오직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를 들고 같지도 않은 이유로 학살을 자행한 '문명국' 중 어느 쪽이 야만이고 어느 쪽이 문명인가.

어째서 카인은 인류 최초로 살인을,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도 멀쩡히 살아남아 원죄와 더불어 자신의 죄를 덧씌운 인류를 불리는데 기여 할 수 있었을까. 한 편의 거대한 성인용 모험 소설 같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부조리하지만 가장 진실에 가까운 장면은 죄를 지은 카인을 야훼가 보호하는 구절들일 것이다. 인간은 신의 보호 아래서 살인을 한다? 무의식 속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살인은 어쩔 수 없는 정당한 것으로 면죄부가 씌워진 것인가? 문득 여기서, 19세기 중엽만 해도 식민지 시대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했다던 독일이 20세기에 이르러서 발생한 두 번의 학살극의 주인공을 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저자의 논변이 생각난다. 한마디로, 그들은 땅이 없었기에 그렇게 떠벌일 수 있었음을. 그래서 그 '객관적 시선'의 대표적인 학자인 프리드리히 라첼이 19세기 말, 막 식민주의적 경향을 띄기 시작한 독일의 앞날에 어떠한 학문적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저자의 글을 기억해 본다.

이 땅에서 지금껏 가장 마지막으로 존재했던 봉건 왕조의 이름은 '대한 제국'이었다. 무척 가망 없는 제목이긴 했지만 부랴부랴 만들어진 저 국호에서조차도 먹느냐 먹히느냐의 절박함을 느끼리란 건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일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찌감치 '제국이 되어' 일본이 되지 못한 걸 개탄하는 인간들도 아직 많다. 부지기수다. 독일보다는 여러 모로 안 좋은 상황이었던 우리는 너무나 안타깝게도 제국주의의 꽃을 채 피워보지도 못한 채 꺾인 것이다. 우리를 지배해 준 일본 제국의 학자들은 그런 우리를 '열등국민이기 때문에'라는 말로 친절하게 요약시켜줬다.... 넌센스.

세계 여러 곳의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존속 살인의 이야기. 죽음을 묻고 피를 빨아올리며 발전해 온 문명.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는 똑같은 어리석음. 과연 인간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짐승'이란 말인가. 작가는 인간 본연에 대한 암울한 회의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메시지로 끝낸다. '당신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이미 알아버린 거다. 인간들이 벌인 작태가 주는 분노 속에서 피어오르는, 잊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가? 그것은 용기라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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