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조이스 캐롤 오츠 / 버팀목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조이스 캐롤 오츠의 이 책은 지금도 내가 읽었던 책들 중 가장 무자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31세. 백인. 미국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이큐는 100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다. 그는 공손하게 말하고 친절하며 동물을 배려한다. 하지만 그는 괴물이다. 그의 의식은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고 맹목과 불안을 동시에 경험하며 문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해결 수단으로 폭력을, 그것도 살인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서슴없이 선택하는 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런 인물의 내면으로 단숨에 들어간다. 이 종잡을 수 없는데다 음침하고 괴기스러운 의식의 여정을 쫓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경험이 아니다. 그런데다 그 과정에선 일체의 여과가 없다. 작가는 말그대로 괴물의 머릿 속을 어떠한 가공도 하지 않은채 그대로 보여준다.

이 겉껍데기만은 한없이 정상적인 괴물을 보면서 난 또다른 대량 살인마들을 떠올리게 된다. 히틀러, 스탈린. 식민 시대의 통치자들. 그리고 수많은 독재자들. 미국 대통령. 그들과 제프리 다머가 비교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정상적인 살인과 비정상적인 살인? 대체 그 기준이란 무엇인가? 고도의 술수와 정치적인 견해를 통해 완벽하게 의도된 살인을 저지른 그들과 단지 자신만의 섹스 노예를 만들겠다는 '순진한' 욕구로 살인을 저지른 제프리 다머를 비교해 볼 때 과연 어느 쪽의 악이 더 큰 것인가. 그것은 소위 인간적인 '고상함'의 문제란 말인가. 얼음 송곳보다는 서류에 한 줄 사인을 긋는 편이 더 품위가 있기 때문인가. 그 사인이 얼음 송곳보다 몇 천 배나 더 되는 사람들을 죽여버리는데도 말이다.

한니발 렉터가 시대의 수퍼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현재를 꿰뚫어보는 눈을 갖고 있었고 동시에 현대를 지탱하는 악마성의 한 축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고의 문명과 최고의 야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악마였고 그런 악마에게 도움을 구걸하고 의지 없이 휘둘리는 인물들을 통해 시대에 대한 비웃음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그의 살인이 미학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얼음 송곳과 사인이 별 차이가 없음을 은유적이고도 매혹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매끄러운 포장이었지만 하나의 진실을 우회해서 드러내 보이고 있는 포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과 도덕,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하는 인간의 차등이란 것을 동의할 수가 없다. 나는 모든 평균과 모든 발전, 그리고 포장된 선과 자의식을 인정할 수 없다. 시간이 갈수록 야만과 문명은 같은 의미가 되어가고 있다. 보다 세련된 야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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