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리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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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난 요시모토 바나나가 좋다. 간결해서 좋고, 감정이 풍부해서 좋고, 신비로와서 좋다.

바나나의 짧은 소설들에 익숙하다가, '암리타'를 읽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읽으면서 '이러이러한' 소설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추상적인 따뜻함을 느낀다. 이상하게도 설명하려면 갑자기 소름이 돋는 전율도 또 느끼고, 무심함도 느낀다.

'반만 죽'은 건 암리타의 화자가 한참을 누리게 되는 상태다. 정확히 말하자면 계단에서 굴러 반쪽의 기억을 잃은 그녀의 상태를 '영혼을 보는'여자가 묘사하는 말이다. 힘들게 도달할 수 있는 상태라면서.

여동생이 자살하고, 남동생이 '영혼을 듣고', 엄마가 이혼했고, 사촌과 엄마친구로 꾸려지는 유사가족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 좋다'고 말하는 화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는 어른들이 보기에 한없이 가볍게만 보일 젊음이다. 내가 동화되는 감수성이란 그런 것, 욕망이나 야망이 없다고 어른들에게는 가벼워 보여도 진지했던 어른들보다는 훨씬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기운들. 좀 더 섬세한 상처를 느끼는 감수성, 나와 닮고도 다른 것들.

그러고도 삶을 살아내는 간절히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을 보면서 따뜻하고도 소름끼치고, 무심하고, 또 마음이 가고.

간절히 행복하고 싶어 하는, 타인에게 관대한 친절한 사람들이 많아서, 생명의 감로수를 삼키듯 바나나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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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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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눈부신 노란색의 새나, 선명한 자주색의 꽃이나, 투명하게 맑은 지나친 파란색의 풀물을 보면 놀란다. 자연에서 비롯하지 않는 그 무엇도 상상해낼 수 없는 인간이면서도, 인공의 색들에 익숙해져서 그 인공의 색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도리어 잊고는 '수박이 냉장고에 산다'고 말하는 꼬맹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된다. 연애소설읽는 노인과 나는 그만큼 다르다.

그래서, 노인이 사라진 밀림이 걱정된다. 자연을 건너건너 이해하는 지금의 내가 숲속의 사냥꾼처럼 이유없는 살육을 '이유있다'고 믿으며 어느날 닥치는 복수에 무방비로 놓일까봐 걱정이 된다.

노인도 처음부터 나와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밀림을 개간하겠다고 고향을 떠나던 젊은 날의 노인은 나처럼 자연을 취하면서 그 하나하나를 모두 이유있다 믿고 있었다. 먹고 입고 자는 하나하나가 직접이 아니라 간접으로 내게 도달할 때, 난 '생존'을 위해 활동하면서도 그걸 느낄 수 없다. 그 모든 간접적 경로가 차단된 공간에서 노인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생존'의 방법,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배운다. 강변의 마을사람들은 맹수에 죽임당한 시체를 보면서, 단지 맹수를 두려워할 뿐이지만, 노인은 맹수를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행동한다. 간접으로 '생존'하고 있는 문명속의 내가 할 수 없는 방식을 삶으로 터득하고 있다.

어떤 선언보다 간결하게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노인의 소설읽을 시간을 빼앗고 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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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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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렇지,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사라지고 싶을 거야. 뼈가 하얗게 드러나는 상처따위 볼 수 없는 척, 내 손으로 내 살을 도려내고 싶을 거야. 머릿속은 텅비고, 손은 내 손이 아닌 것처럼 지독한 관성으로 움직일 수도 있을 거야. 아픔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거야.

책장을 덮으면서, 그래도 여전히 아무일 없던 듯 지속될 수 있는 거라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던 마음이 비죽비죽 솟았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무 일 없던 듯'이란 걸 안다.

극심한 마음 속의 갈등들이 아예 없던 것이 되는 순간,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여전히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아프고, 몸도 아프고, 서운하고, 슬프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나는 도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존재해 온 것인가 말이다. 내가 알던 사람들, 갑자기 모르던 사람이 되고, 내가 디디고 서 있던 그 견고한 바닥이 일순 무너져 버린다면, 나는 그런데도 여전히 '나'라고 계속 '아무일 없던 듯' 살아질까. 자신이 없다.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 내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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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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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 순간 감정을 툭하고 쳐서는 당황합니다.

늘 마주치던 눈빛이 어느 순간 다른 감정이 되는 것을, 의미없는 말 한마디에 목숨만큼 소중하다고 여겨지던 어떤 것이 가벼워지는 것을 혹은 그 반대가 되는 것을 느낀 적 있다면, 이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연상에 당혹과 매혹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이유없이 고집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삶의 어느 순간 내가 가진 감정이 그 다음 순간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당황스러워도, 그 때 내가 그럴 수밖에 없음을 나는 압니다.

너무 오래 산 하숙집 여주인이 연상시킨 자신의 어머니때문에 한없이 친근하기도 하고, 갑자기 닥친 꼬마아이의 한 마디에 연애를 더이상 지속시킬 수 없기도 하고, 이제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닥친 이별의 전언이 무심히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걱정이 많은 타인에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자책하기도 하고, 공연히 저 사람은 더 잘 날 이해할 거라고 속단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타인에게 감정을 만드는 것과,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내 안에 쌓이는 이 많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소설들은 삶의 모습으로 비춰줍니다.

급류처럼 나를 휩쓸어 어느 미지의 해안에 내려놓는 대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훅하고 내가 서있는 데로 불어와서는 온 몸의 작은 털들을 흔들어 댑니다. 내가 이걸 느낄 수 있다는 게 되려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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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번째 주검 ㅣ 캐드펠 시리즈 2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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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 '아흔아홉번째 주검'이래서, 계속 죽어나가는 그런 소설인 줄 알았지 뭐야', 빌려읽은 방 언니가 말했습니다. 몸을 길게 늘이고 다른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생각합니다. '난 뭐라고 생각하며 그 책을 골랐었더라?'

고를 때, 그리고 읽기 시작할 때 어떤 기대를 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읽고 나서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간신히 기억해냅니다. 후다닥, 읽어 치운 다음 그랬습니다, '엇, 참 맥아리가 없잖아'. 언니랑 다르지 않은 기대 나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흔 아홉을 죽이는 연쇄 살인마의 등장 따위 말입니다.

그렇지만, 또 다음 순간 생각합니다. 참 익숙해졌구나, 잔인한 살인의 장면에, 난폭한 시체의 묘사에.. 그런 생각들 하고 나니까, 소설의 좋았던 느낌들 새록 새록 새로와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는' 거라서 가문의 적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과, 오해에서 비롯되었더라도 그 믿음을 지켜주려는 사랑과, 비겁하지 않은 적과 용감한 도망자 말입니다.

너무 잔인한 게 익숙해진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한 수사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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