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민'이라는 말이 좀 웃기다. 

'시민의식을 보여달라'는 어떤 종용을 들으면 콧방귀를 흥, 뀌고는 '나는 면민인데, 메롱'한다. 

촌년,이라는 말도 들었고, 내 자신이 그걸 감추려고 한 적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시민이 아니라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를 도시 아닌 곳에서 키우는 것에 걱정을 많이들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는 도시 아닌 곳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는 분업으로 굴러가는 곳이라,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는 온전하게 스스로를 책임지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도시 밖에서 먹을 걸 가지고 들어와서 도시 안의 쓰레기를 도시 밖으로 밀어내는 존재들이 거대한 허영과 우쭐함으로 스스로를 부풀리는 도시에서 사는 마음은 어리석음이 고양된다. 


그런 면에서 서양은 도시국가 이상이 되지 못했다고도 생각한다. 자국민의 불만을 식민지로 해소하는 마음은, 작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은 신이 해 주십사 하는 마음도 어리기 짝이 없지.  



1. 춘추전국이야기 1 : 춘추의 설계자 관중


나는 관중이 '촌놈'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필자가 관중에 대한 고적을 찬찬히 검토하면서 얻은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관중이 근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관중이 처음부터 끝까지 '야인野人' 곧 촌놈이라는 사실이다. 순자는 공자의 말을 빌려 관중이 천자를 보필할 교양인이 아니라 예를 모르는(교양이 없는) '야인'이라고 평했다. 관중은 소인이 아니라 야인이다. 고대에서 야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도성 밖의 사람, 곧 귀족이 아니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도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인간이 오히려 패업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역시 큰 인물이 되려면 뛰어난 야성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순자의 의도와는 물론 다르지만, 점차 야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이 듣기에 '야인'이라는 말은 꽤 매력적인 말이 아닌가? -p166


 공자가 보는 관중은 어떤 사람인가? 공자는 예를 목적으로 보고 극히 중시하지만, 관중은 예를 다만 도구로 보았다. 예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교양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관중은 예에서 엄격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착하다'(仁). 공자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공자 스스로 관중이 인하다고 했는데, 공자가 보는 인은 예에 비해 어떤 것일까? 

 사람이 되어 인하지(착하지) 않으면 예는 알아 무엇 하며 음악은 알아 무엇하리요[人而不仁如禮何 人而不仁如樂何]? - 『논어』「팔일 八佾」-p171


도시인의 세련된 친절함이 도시라는 문명 밖에서도 유효할 수 있을까, 삐딱한 마음으로 본다. 자신의 주장에 따르는 불편이 자신에게는 올 리 없다는 음흉한 마음을 감춘 어린애같은 존재들이라고도 생각한다. 


2. 유교와 여성

https://blog.aladin.co.kr/hahayo/15272244


'시민사회'나 '공공 영역'의 개념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존재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가정하는 것은 사실상 서구의 역사적 현실을 비서구사회의 이상화된 발전 경로로 투영하고 결과적으로 대안적인 발전 모델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 53%


이런 대목을 만난다. 계속 다르다고, 심정적으로 부인하려는 어떤 태도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대목은 아닌가 생각한다. 


왜 저렇게 싸운대? 싶은 서양의 날 선 태도들을 구경하면서, 억압이라면 억압일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그걸 왜 드러내려고 하는 거야? 같이 살아가는 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같은 믿음들을 구경한다. 이슬람교도가 이슬람복식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국은 억압적인 거라는데, 억압은 뭔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3. 논어 

和以不同(화이부동)을 크게 인상깊게 본 적은 없었다. 어디에라도 들어본 듯한 논어의 말들, '子曰, 君子矜而不爭, 羣而不黨'(자왈, 군자긍이부쟁, 군이부당, 군자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나 다투지 않고, 모이지만 무리를 짓지는 않는다)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의 대치상태를 보고 있으면, 어떤 말들은 그저 파벌을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것의 그럴 듯한 포장지인가 싶다.


같이 살아가기 위해, 무슨 태도가 필요한가. 

국가를 경영하는데 무엇이 필요한가. 

함께 이야기 하기 위해 필요한 대전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같이 살아갈 것인가.  


동아시아에서, 무리를 가족수준으로 쪼갰기 때문에, 국가가 가능했다. 

춘추전국의 피뿌리는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정치철학이 유학이다. 그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이상국가가 조선이다. 

모든 인간은 군자라는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선택에는 명분이 필요하고, 명분의 대결인 정치의 장이 세 대결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파벌을 이루지 않은 군자인 개인들은, 명분의 대결 가운데 더 그럴 듯한 명분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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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철학으로 저항하다 -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
다카쿠와 가즈미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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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부모라서, 아이에게 이 책을 권하지 못 할 거 같다. 


저항,이라는 말이 멋지다고, 저항하는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나의 젊은 날들이 있는데, 지금 부모가 된 나는 나의 부모님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가 없다. 

철학으로 저항하다,라는 책이 가지는 지향이 '저항'이라서, 이 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세상을 자신의 믿음으로 보기 때문에 누구에게라도 철학은 필요하다. 세상을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믿는다면 투쟁에 적합한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하고, 세상을 힘을 합해 함께 만드는 무엇으로 믿는다면, 또 그렇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 나와 다를 바 없는 너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나의 질문이라서, 정치에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선택의 순간 갈등한다. 

투쟁의 순간, 이익에 대한 말이 정직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오직 이익 때문이라면, 나의 이 저항이 힘을 발휘할 공간은 생기지 않는 게 아닌가,라고도 생각한다. 나의 이익이지만, 나만의 이익은 아닌 이유여야, 이익이 걸리지 않은 다른 사람이 내 의견에 조금이나마 귀라도 기울여주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거다. 

명분이나, 사명감이, 어떻게 들릴 지 알면서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무언가를 같이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탈리아의 가난한 어부 이야기를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자의 숙명적 실패에 대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일본 아이누의 연어낚시와 아이누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언어로 사로잡히는 사고의 저항으로 이야기한다. 

모든 것은 변하고 밥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인 나는, 일본인 특유의 약함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불교나 유교적 태도는 아닌, 서구화된 태도 가운데, 저항이나 정체성에 대한 말들이라도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곧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면서 뚜렷한 의식으로 아내와 아들의 탈출을 본다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상궤를 벗어난 고통일 것입니다. - 34%


그러니까 이 저항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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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다가, 불화하는 부자관계와 이 때문에 촉발되는 부부관계의 갈등묘사를 만났다. 


[혼례대첩]에서 절대 악의 축은 정경부인인데, 남편보다 정치적으로 뛰어난 인물로 묘사된다.  ( https://program.kbs.co.kr/2tv/drama/thematchmakers/pc/detail.html?smenu=e126f2 ) 세자의 혼사를 막고, 자신의 조카인 대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하고, 더하여 이전에 이미 세자를 독살하려는 실패한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런데, 정치적 야심가인 정경부인은 시끌벅적한 성혼의 소동극 가운데, 정치적 동지이자 대외적인 자신의 대리인인 남편이 자신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걸 알게 된다. 부인은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남편을 살해한다. 정치적 판단,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남편에 대한 분노가 묘사될 뿐이다. 남편은 아들을 살해했고, 아내는 남편을 살해한다. 


[밤에 피는 꽃]에서도 절대 악의 축인 좌의정은 정치적으로 갈등하는 선왕을 시해했다. 선왕은 좌의정을 피해 자신의 군대에 임무를 주어 궁을 내보냈다. 좌의정은 밀명을 받아 길을 나선 왕의 군인 중 한 명의 누이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는다. 단, 아들은 이미 자신의 사랑을 찾았다며 집을 나간 뒤이니, 이 며느리는 며느리라기보다 인질이다. 자신의 아들을 아내에게 죽었다고 하고, 집을 나가는 아들에게 다시 돌아오면 죽인다고 한 뒤다. 아내에게 죽었다고 한 아들이 15년만에 돌아와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 좌의정에게 이는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찾고 있다는 말을 믿었고, 아들이 죽었다는 말도 믿었다. 이제 살아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끌어안으며,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이 어떤 날선 말을 주고받는지 아예 모른다. 


부부 사이의 비밀은 어디서 생기는가. 

왜 아버지는 아들과 불화하는가. 

왜 이야기는 이런 상황들을 묘사하는가. 

고릴라 이스마엘을 읽고, 서양의 이야기들이 더 피와 살이 튄다,(https://blog.aladin.co.kr/hahayo/603247 ) 고 생각했다. 피와 살이 튀는 동물적인 이야기 가운데, 부친 살해의 서사 가운데, 앞으로 나아간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는 이유는, 부계를 단절하기 위해서이고, 시간축이 사라진 서양의 서사 가운데, 아들인 단독자는 아버지를 죽여야만 자신의 세상을 가질 수 있다. 

문명을 말하는 동양의 이야기들은 긴 시간축에 가문을 만들고, 효와 충을 말한다. 자신의 세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들이 아비와 적대하는 것은 자연인가? 

어미가 딸과 적대하는 것은 자연인가?


자연을 거스르기 위한 문명으로 효가 필요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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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에서 진료를 기다리면서 꺼낸 그림책에서 보고 반가웠다. 어디선가 들었거나 본 적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다.


양반이 머슴을 부린다. 

세경 주는 게 너무 아까워서 실컷 부려먹고는 딱딱한 누룽지를 세경대신 준다. 

머슴은 별 말없이 누룽지를 받는다. 

전쟁이 터지고, 양반과 머슴은 귀한 것들을 챙겨 피난길에 오른다. 

집문서와 땅문서와 금붙이를 챙긴 양반과 그 동안 받은 누룽지를 챙긴 머슴은 고된 피난길을 함께 걷는다. 피난길에 양반은 집문서와 땅문서와 금붙이를 누룽지와 바꿔 먹는다. 

전쟁이 끝나고, 이제 누룽지는 그렇게 귀하지 않고, 양반은 집문서와 땅문서와 금붙이가 아쉬워서 다시 머슴에게 말한다. 


"그건 돌려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지요."


언제나 그러지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머슴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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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여성 - 오리엔탈리즘적 페미니즘을 넘어서
리-시앙 리사 로즌리 지음, 정환희 옮김 / 필로소픽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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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살 무렵에 페미니즘에 경도되었었다. 제약이 많다고 느낀 스무살 여자애가 불만을 토로하는 서양 페미니스트,들의 말들에 신이 났었다. 나도 남자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가지지 않은 몸으로 상대는 더 나을 거라고 착각하면서 불만의 말들을 했었다. 그러다가, 취업하고 일하면서,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점점점 멀어졌다. 

그래도 꽤 오랫동안 '에코 페미니즘'그러니까 인도 여성이 쓴 제3세계 페미니즘에 대한 기억에서, 페미니즘이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만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공부 좀 더 하고 오세요'라는 말들을 들으면서, 페미니즘이 발생한 서구철학의 토대가 문제고 구분하는 태도가 오히려 세상을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여성이라서, 삐딱한 마음으로 '웃기고 있네, 우리 엄마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라고 반발하던 마음이 이제는 아예 페미니즘 대신 유교나 불교가 필요하다,라는 마음이 되어 버렸다. 

책은, 중국계 미국인 학자가 유교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도시국가 이상이 되어보지 못하는 서구의 사상가들에게 미개하다고, 성차별적이라고 성억압적이라고 품평당하기 일쑤인 자신의 문화적 토양에 대해, 설명하는 말들이다. 뭐 나라면 애초에 페미니즘,이라는 분별적인 서구철학의 토양에서 자란 이론을 굳이 다층적이고 품이 넓고, 함께 살기 위한 태도로서의 포용적인 동양철학과 융합한다는 게 의미가 있나 싶지만, 책 속의 많은 말들은 속이 좀 시원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어떠한 시도에서도 우리는 먼저 타자의 '타자성 Otherness'를 최대한 이해하여야 하며,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해] 우리 자신의 문화적 가정을 부과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2%


성평등 문제에 관한 이론적인 영역에서는 서구 윤리 이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제국주의적 입장이 지속되고 있다.-3%


'유'가 갖는 의미의 유동성은 광범위한 해석을 허용하며, 더 중요한 점은 '유'의 정체성이 민족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라는 것이다. -4%


그러나 음양 은유를 서구의 이원적 여성성/남성성과 개념적으로 동일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중국의 상관적correlative 음양 우주론에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부과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중국사회의 성억압의 원인을 오인하게 된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이원적으로 보는 서구의 패러다임과 달리, 대립적이지 않으며 상보적인 이원론인 음양은 중국의 성억압에 대한 적절한 이론적 정당화 기능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 5% 


그녀가 보기에 여자는 문학적 형태로 보존된 고대의 지혜에 대해 교육을 받을 때, 비로소 도덕적일 수 있으며 예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 6%


예를 들어 당唐나라 이후 황실 법령에 의해 보호된,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과부 관행은 배우자에 대한 정절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손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권위를 강조하며 여성들이 자신들의 통합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도덕적 의도였고, [재혼을 권유하는] 부모의 친권보다도 우선시되는 여성 고유의 재량권을 상징한다.- 7%


여성들은 '내'적 영역에서 문자와 붓 대신에 천싸개와 바늘로, 자신과 '우리들의 문화'를 전승할 딸들의 발을 속박시켰다. 이 장의 목적은 이러한 사회적 관행의 '성차별적' 요소들을 어떻게든 얼버무리려는데 있지 않다. 여기에서 언급된 관행의 대부분은 [오늘 날] 더 이상 사회적 이상 social ideal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 7% 


초기 프랑스 페미니스트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1974년 『중국 여성에 관하여』에서 대담하게도 한 장을 '공자-여자를 잡아먹는 자'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까지 여전히 학자들에게 있어 유교는 현대적이며 우수한 것으로 상정되는 서구적 삶의 방식보다 뒤떨어져 폐기되어야 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특징지어졌다. - 9%


유교에 대한 울프의 인식에서 폄하적인 어조는 분명하다. 그녀에게 있어, 유교 - 구 중국의 쓸모없는 이데올로기- 는 가부장제 및 여성 혐오의 동의어이다. 페미니스트의 저작에서 반유가적인 정서는 매우 고조되어 있다. - 10%


예수회의 Confucianism이란 용어 발명은, 서양에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유 개념을 단순화하고 세속화하였다. - 10%


서양의 분석적 전통에 익숙한 현대의 독자들이 보기에, 이렇게 유의 정의를 동음이의어의 연관성에서 파악하려는 것은 합리적인 문자적 해석이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기이해보일 것이다. - 11%


한자를 식별하는 데 있어 주어진 단어의 의미는 개별적인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정의에서 오기보다는 항상 단어 또는 구 句의 군집에서 연관하여 유래한다. - 12%


앵거스 그레이엄 A. C. Graham이 말하듯 '유'의 강점은 고대의 문화를 보존하는 자로서 그들이 중국 문명의 수호자로 여겨졌다는 것이고, 따라서 '유'는 개인이 중국적 문화 정체성을 통합하는데 중요한 핵심 요소가 되었다. - 15%


정치 영역에서 과거시험은 두 가지 효과를 갖는다. 첫 번째, 공정한 방식의 시험에 참여함으로 문화 엘리트의 특권적 지위는 객관적으로 승인된다. 두 번째, 문화 엘리트의 지위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국가는 통치상의 도덕적 권위와 정치적 합법성을 획득한다. - 17%


'유'는 무엇보다도 성인의 문명 질서라는 문화적 이념을 의미했다. '유'가 일종의 문화에 근거한 범주라는 점은, 여진족의 금 왕조가 유학을 문명질서로 채택했음에도 동시에 [한족들은 유학을 통해]고유의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한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18%


다시 말해서 '유'는 문화 또는 문명적 이상의 수호자라 할 수 있다. - 19%


중국세계에서 학문과 문장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 20%


요컨대, 예수회가 '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중국 문인들에게 '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은 라이어널 젠슨이 말했듯이 '유'는 실제로 '다층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유'는 그 시대에 멈춰버린 단일하고 고정된 교리를 의미하지도, 또 한족의 문인에게 국한된 민족적 관습 역시 아니다. 대신에 최소한의 수준에서 '유'는 경전 학습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상징한다. 첫째, '성현'의 학문이다(따라서 '유'는 중국의 고급문화를 표현한다). 둘째, 학식 있는 '유'의 지위와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을 전제하는, 공자에 대한 국가적 숭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유'는 유가 문인과 국가의 복잡한 관계를 함의한다.) 셋째, 부자, 부부, 형제의 계측적 친족 관계에 근거하여 통치자와 백성들 사이의 상호 돌봄 및 의무를 강조하는 도덕정치의 문명적 이념이다(따라서 '유'는 가족-국가 예법의 은유를 표명한다). 넷째, 신과 인간, 자연계의 상관관계에 대한 공유된 가정으로, 조상이 신과 같이 추앙받으며, 천지인의 조화로운 일체를 구현하는 사람을 이상적 인간으로 여긴다(따라서 '유'는 유기적인 우주론과 내재적인 종교적 감성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자기 수양이라는 평생 과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유덕한 자아는 의례적 공동체의 인간관계망 내부에 위치하며, 그 인간관계는 부모-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기에 효는 인간다움에 대한 도덕적 표현이 된다(그러므로 '유'는 덕 윤리를 나타낸다). - 21%


우선, 가장 기본적인 언어학적 수준으로 볼 때 한자의 '人(인)'은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며 이는 성중립적이다. 즉 '남성'과 일반적인 '인간'은 문자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동일시되지 않는다. - 23%


서구에서 모든 인간관계보다도 신[하느님]과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하고, 모든 인간관계들은 일차적으로 신과 합일되기 위한 초월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덕 수양의 최고의 경지로서 인은 오직 인간관계에서만 성취되고 발전될 수 있다. - 24%


인간은 관계 안에서만 그리고 관계를 통해서만 이뤄진다. 타자 없이는 나란 존재도 없다. - 25%


가족은 공적인 것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등의 천하를 질서 정연하게 하는 근간으로 이해된다. - 25%


그리고 유교윤리학에선 사적 자아와 반대되는 절대적 타자가 전제되지 않기 때문에, 상호 호혜성과 의사소통력은 인간관계 구조의 그 기초가 된다. - 26%


남녀라는 용어가 구별적인 성역할 관계를 함의하여 인간세계에만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모빈과 자웅이란 용어는 생식기로 암컷과 수컷을 구별하는 날짐승과 들짐승의 세계에만 사용된다. 순자가 보기에 남녀를 사회적인 역할과 의무에 따라 구별한다는 것은 인류의 지표이다. - 28%


친족적 역할을 넘어 '여성'에 대한 규범적인 설명을 얻으려는 외부 관찰자의 시도는 현지 정보원이 계속 그 주제를 구체적인 가족, 친족의 역할을 묻는 것으로 바꾸어 이해하면서 좌절되었다. 하지만 중국 사회에서 여성은 오직 딸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여성'일 수 있다. - 29%


동중서는 정확하게 "양 그 자체만으로 낳을 수가 없고, 음 그 자체만으로 낳을 수 없다. 음과 양이 하늘과 땅에 함께 참여하여야 삶이 있게 된다."라고 말했다. - 40%


양은 전적으로 남성이 아니며 음은 전적으로 여성이 아니다. - 40%


퍼스는 "『황제내경』에서 의학적으로 표준적인 몸은 음과 양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양성적이다."라고 말한다. 중국 의학 이론은 퍼스가 고전 유럽 의학의 '단성'모델이라고 부른 것을 거부한다. - 41%


건강한 몸은 음과 양이 균형 잡힌 몸이지,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몸이 아니다. - 41%


열정, 육체, 내재와 같이 여성적인 것들에 비해 이성, 마음, 초월과 같이 남성과 관련된 것들이 갖는 특권적 지위는 페미니스트의 해석에 따르면 서구에서의 성억압에 대한 이론적 설명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음-양 이항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사회적 자원과 권력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에 대한 이론적 설명의 기초로서 기능할 수 없다. 음-양과 위계적 젠더 관계의 상관관계만으로는 왜 중국 여성이 평가 절하되었는지를 대표할 수 없으며, 또 그러한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다. - 41%


초기의 용례에서 내-외는 특정한 성별에 국한되지 아니하며 주로 질서정연한 황실과 혼란스러운 외부 세계 사이의 공간적 경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경계는 결국 문명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의 경계가 된다. - 45%


『논어』의 공자가 말하길, "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질서를 세우면, 백성들이 형벌만 면하려 하고 부끄러워함이 없을 것이다.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백성들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선에 이를 것이다." - 45%


최소한의 수준에서 예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적절한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 46%


내-외 이항은 두 개의 상충되고 호환되지 않는 영역을 표시하는 절대적인 공간적 경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내림차순의 동심원에서 '중심과 주변부' 혹은 로저 에임스가 말한 '중심과 장' 사이의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경계에 가깝다. - 49%


순자는 계속해서 구별짓기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무리지어 살지 않을 수 없으니, 무리지어 살면서 구분이 없으면 다투게 되고 다투면 어지러워지며 어지러우면 곤궁해진다." 남자와 여자를 외와 내라는 두 개의 다른 젠더적 영역으로 구별하는 그 행위는 질서 있고 번영하며 문명화된 사회의 시작점이다. - 51%


내와 외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며 상호적이므로, 여성이 '내'에서 하는 것은 '외'에 영향을 미친다. 국가와 그 구심이 되는 아내의 미덕이 병치된 것은 『맹자』의 다음 구절에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맹자는 나라의 변화가 두 여성의 공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화주와 기량의 처가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애절하게 곡하였기에 나라의 풍속을 변하게 하였다. 안에 있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난다." 간단히 말해서 가족과 국가, 또는 내와 외는 모순적인 영역이 아니라 관계적인 영역이다. - 53%


'시민사회'나 '공공 영역'의 개념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존재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가정하는 것은 사실상 서구의 역사적 현실을 비서구사회의 이상화된 발전 경로로 투영하고 결과적으로 대안적인 발전 모델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 53%


중국에서는 서구와 상응하는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국가와 상업, 국가와 문인의 분리가 명확하게 정의되고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53%


당파에 대항하는 유교적 정치 이념은 역시 『서경』「홍범」에 근거하고 있는데, 여기에선 정치적 결속에 있어 당파의 부재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 54%


게다가 중국 세계에서 가족, 친족적 영역 밖의 '여성'범주는 실재하지 않는다. - 54%


중국 젠더학에서 친족 위계와 젠더 격차 사이의 연관성 문제가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측면에 걸쳐 여성이 남성에 획일적으로 예속되어 있다고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다. 대신에 젠더 격차는 친족 관계라는 복잡한 망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친족 관계에서 젠더 격차는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불평등의 부분일 뿐이다. 성별은 그 자체로 인생에서 자신의 위치를 결정할 수 없다. - 54%


삼종지도는 종종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선천적 열등성이나 예속의 표식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중국사회의 삼종지도는 여성의 친족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 예속적 지위를 강조하기 위해 종종 '삼중의 종속 혹은 예속'으로 번역되곤 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삶의 세 단계 모두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으로 가정하여 삼종지도를 '삼중의 종속'으로 해석하는 데 지지하는 사람들은 중국 사회의 어머니가 갖는 권위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 역사적 현실에서 어머니는 어떠한 형태나 형식으로든 아들에게 종속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다. 어머니는, 특히 과부가 되면 아들이 황제라 할지라도, 아들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 55%


황실에서 태후의 섭정이 제도화됨으로써 모친의 권위가 더욱더 분명해졌다. - 55%


왕조에 따라 부모가 불효자에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정도는 상이하였지만, 부모가 가정이나 황실에서 불효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와 당사자의 합의 없이도 아들의 배우자를 내쫓을 수 있는 권리는 어느 왕조에서나 항상 인정되었다. - 56%


아내는 남편과 같이 [동등하게} 존중받는데, 그녀는 남편이 가진 것과 동일한 특권과 지위를 누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 57%


여성의 과거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기록이 부족하여 여성의 역사를 끊임없이 재창조해야 하는 서구와는 달리, 중국의 열녀 전통은 전한의 궁중역사가인 유향으로부터 최후의 왕조인 청대까지 지속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역사적 기억들'을 만들었다. - 58%


여성의 덕행과 악행은 집안과 나라의 흥망성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간주되었다. - 58%


그러자 서오는 모임에서 사용할 충분한 초를 가져올 수 없던 것은 자신의 가난함 때문이고, 그러므로 항상 일찍 오거나 늦게까지 남아 그 자리를 청소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하여 먼 구석에 앉았다고 변론하였다. 게다가 서오가 변론하였듯이, 방에 한 사람이 더 있다 하더라도 빛이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 - 59%


"집안이 가난해야 현명한 아내를 구하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야 좋은 신하를 구한다." - 61%


리사 라팔스가 언급한 것처럼 명말청초의 유덕한 여성을 표상하는데 인지나 변통과 같은 지적인 덕목이 생략되고 효행이나 정절로 모티브가 바뀐 것은, 의도적인 보수주의라기보다는 순전히 비극적 내용이 담긴 삽화가 주는 감정적 호소력에 의해 촉진되었을 수 있다. - 62%


문文(문화의 방식)은 무武(힘의 방식)와 반대로 남성만의 특권이다. 캠 루이와 루이스 에드워드는 문과 무의 중국적 남성성에 대한 그들의 이론적 작업에서 분명하게 말하길, 서구와 달리 [중국에서] 무(무예)는 '남성성'의 표식이 아니다. 문(문명적이고 세련된 존재방식)과 비교해볼 때, 무는 말하자면 남성성의 열등한 형태이다. - 76%


명말청초에 '내'영역에서 과부 추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외'영역에서 정치적 충성이 강조된 것과 얽혀 있다. - 77%


다시 말하자면, 재혼 그 자체가 반드시 여성에게 있어 어떠한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78%


따라서 정이의 과부정절에 대한 진술은 절대적인 교리로 이해되기보다는 엘리트의 덕 윤리 담론, 즉 규제적인 이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과부가 재혼하게 되면 곧 정절을 잃는다는 정이의 비유는 유덕한 아내와 충성스러운 신하 사이의 전통적인 은유를 반영한다. - 79%


그러나 오직 정절을 지킨 과부의 집안만이 노역에서 면제를 받았다. - 80%


과부의 자결과 명나라 충신의 반청 운동이 연관되었기에, 실제로 청나라 초기에 과부의 자결은 청 조정에 의해 반복적으로 저지되었다. - 80%


과부 관행은 실실적으로 서민의 부인과 그 가족들이 지역 사회에서 사회적 영예를 획득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황실 조정이 공인한 대안적인 경로였다. - 81%


가난 때문에 아내와 딸을 파는 것이 줄곧 용인되었던 사회에서 과부의 강제적인 재혼을 금지하는 청나라의 법률은 사실상 연장자의 뜻에 반하는 연소자의 불복종을 승인하였다. - 81%


과부 재혼은 과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선 가족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었다. 새로 결혼한 과부는 연장자 서열의 원리가 적용되는 친족 위계 구조에서 새댁이라는 밑바닥 지위를 맡아야 한다. - 82%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저작에 체현된 신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제3세계 여성은 종종 서구의 백인 자매에게서 이론화되고 구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되며 차례로 서구의 백인 여성은 어떤 지역적 전통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로 간주된다. - 82%


따라서 손상되고, 쓸모없는, 꽁꽁 감싸진 한 쌍의 발은 가문의 부유함을 상징하였는데, 전족을 한다는 것은 가계 경제에서 여성 구성원의 나태함 정도는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형편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83%


그것은 또한 지위의 표식이었으며, 사회적 인정의 표식이었다. 왜냐하면 가난한 집안의 남자들은 문학을 배울 수 없었고, 여성들은 전족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84%


요컨대, 유교 세계에서 문학과 예절의 학습은 교양 있고 도덕적인 존재를 향한, 평생 이루어져야 할 자기 수양 과정의 기점이다. - 84%


그러나 서구가 윤리적 이론의 유일한 공급자이며 나머지 세계는 해결되길 기다리는 도덕적 문제라는 관점 아래에서 유교와 페미니즘이 양립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페미니즘을 가장하여 인종적인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것이다. - 87%


그러나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또한 그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바로 그 주제와 그 주제의 주체들을 지워버린다. 백인 남성과 백인 여성 사이에서 발견되는 주변화 패턴이 초국가적 페미니스트 담론에서도 동일하게 영속되는데, '서구 여성'의 주체성과 근대성은 전통에 묶인 '제3세계 여성'의 희생과 대조되고 있다. - 89%


사회적 관계 속에 자기 자신을 정위시키지 않으면 사람은 실존적 존재가 되지 못하며,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완전한 인격체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실존적] 출발점은 철저히 유교적인데, 그것은 유교의 성취되는 인격성과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유교적 관점에 따르면 사람은 오직 특정한 사회적 관계와 역할-가족 관계 역할로부터 시작하는-로 실현될 수 있는 특정한 사회적 덕목을 체화했을 때에만 '사람'일 수 있다. - 90%


그러나 사람이 사람이게 하는데 있어 어떠한 자격조건이 없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거부한다면,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은 반드시 자아의 '일부'가 아니라 자아의 바로 그 '본질'로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오직 관계-내-존재일 때만 사람이다.  - 90%


효는 최소한의 수준에서 인간다움을 향하는 관문이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돌봄은 인간이 되는 출발점이며, 그러한 점이 생략되고선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없다. 한 마디로 유교에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받을 자격이란 없다. - 90%


부모와 자식 사이의 타고난 관계에서 발견되는 효심을 이방인에게까지 확장함으로써 추상적인 사람에 대한 단순한 존중으로서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진정한 돌봄이 성취되고 '보편화'될 수 있다. - 91%


자기가 관심을 기울이고 관계를 맺는 권역이 확대될수록 자아도 확대된다. - 91%


유교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는 본질적으로 위계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 호혜적이고 상호보완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자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사회적으로 불평등하지만, 아들에 대한 아버지 권위의 정당성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에 대해 실천하는 호혜적인 돌봄에 달려 있다. - 92%


나는 페미니스트이자 중국인으로서 그러한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시에 나는 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여성이 몰역사적이고 몰문화적으로 있는 이론적 공간에서 나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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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2-01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합리화와 변명하는 부류들을 정말 싫어하는데, 알라딘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집단들을 보면 그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려 하는건 좋은데 너무 그러면 같잖아 보일수 있다는 점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별족 2024-02-02 06:55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세상 모든 글이 ‘자기합리화‘와 ‘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_-;;;;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뭐 이런 식.
서구식 사고방식은 명쾌하고, 또 대결에서 이겼기 때문에, 젊은이가 혹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도 가르치려고 하는 거고 ^^
아인슈타인이 불확정성 이론은 말도 안 된다고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젊은이들이랑 싸우는 건, 뉴턴역학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랑 같은 거라서, 안타까우니까요.
내가 뭔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런가, 뭘까, 갸우뚱하고 물러서면 될 일인데.
스스로의 옳음을 명백하게 믿는 사람들은, 이걸 관철시키려고 전쟁이라도 불사할 것처럼 점점 더 강경하게 말하는 거 같습니다. 그럼 스스로도 자신의 말에 갇혀 버리는데요.

추풍오장원 2024-02-02 07:55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사람을 어떤 논리와 근거로 여성혐오주의자로 낙인찍는걸까요.
자기가 보기 불편하거나 거슬린다고 발화 자체를 차단하고 싶은가 봅니다.

별족 2024-02-04 07:33   좋아요 1 | URL
사실, 입 닫게 하고 싶은 마음은 저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저 다시 한 번 더 말하거나 그러는 거죠. 그런데, 동조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힘으로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더 과격해지는 거죠.
그런 면에서 파시즘이나 나치즘이라고 조롱당하게도 되고요. 여성들이 고양시키는 문화,가 논리나 합리가 아니기 때문에 더 휩쓸리게 되는 것도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