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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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책 짐에서 찾아 읽는다. 

길지도 않은데, 그렇게 많은 말들을 들으면서 쉽게 읽지는 않게 되는 바로 그 책이다. 

변주된 이야기들을 이미 알고, 소개해주는 말들도 여러 번 듣는다. 

그래도 원작을 읽는 건 아마 처음인 거 같다. 

악당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한심한 오셀로를 비웃고, 내가 에밀리아, 일 수 있을까 질문한다. 

해설까지 읽고, 다시 한 번 '절대적'인 것들에 가지는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아고   천성요? 그까짓 거! 우리가 이런 저런 인간이 되는 건 다 우리한테 달렸어요. 우리 몸은 정원이고 우리 의지는 정원사와 같은 거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쐐기풀을 심거나 상추씨를 뿌리거나, 히솝풀은 꽂아놓고 사향초는 뽑아버리며, 한 가지 약초로 정원을 채우거나 여러 가지를 마구 심어놓거나, 또는 태만을 부려서 불모로 만들거나 부지런히 비료를 주거나 간에 글쎄, 그렇게 할 힘과 바로잡을 권한은 우리의 의지에 있다 이겁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저울에서 한쪽의 이성이 다른 쪽의 욕정과 균형을 맞춰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급한 본능 때문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시도를 하게 될 거란 말씀이죠. 하지만 우리에겐 이성이란 게 있어서 발광하는 충동, 색욕의 자극, 무절제한 욕망 따위를 식혀주는 거라고요. 그런데 당신이 사랑이라 부르는 것도 그 따위 것들에 붙어있는 한 줄기 또는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p54-55


에밀리아   밝혀질 거예요. 조용하라고요? 안 돼요. 난 공기처럼 자유롭게 말을 할 거예요. 하늘과 인간과 악마들 모두가, 모두가 나에게 창피를 주더라도 말을 할 거예요.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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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enasia.hankyung.com/article/2024123063294?cm=news_headline


드라마를 안 보고 기사를 쓰나. 드라마를 봐도 이입은 하지 않은 걸까. 

도둑,이라, 도둑이라. 


나는 재미나게 보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돈을 깔고, 쓸 수도 없는 돈을 깔고, 그저 아무도 믿지 못할 선심으로 치매 의심이나 받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모두 다 알아버렸는데, 그래도 비밀을 지키려고 서로 말도 못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나는 구경한다. 다림이가 아프지 않았다면 그 돈을 굳이 가져왔을까. 알고도 말 못하는 심정을 왜 이해하지 못할까. 

드라마의 무엇이 절도, 은폐 방법을 알려준다는 걸까. 

100억이 파묻힌 걸 알아도 쓸 수가 없다는 걸 알려주고 있는데 말이지. 

억,이라는 단위가 흔해졌지만, 실상 그 출처를 알지 못하는 돈은 쓰지를 못 한다고 드라마는 내내 알려준다. 그 돈을 헐어 눈을 뜬 다림이도 울고, 경찰인 우림이도 울고, 그 돈을 어떻게든 갚아보려고 애쓰는 강주도 있는데, 왜 이들이 도덕심이 없다는 걸까. 

같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걸까. 사람은 얼마나 다른 걸까. 

내가 8억이면 눈을 뜰 수 있는 아픈 손녀가 있는 할머니인데, 돈가방 파묻는 걸 봤으면 안 파올 거야? 이미 그 돈이 깨끗한 돈이 아니라, 도둑맞은 돈 주인도 경찰에게 신고하지 못한 건데, 왜 이렇게까지 잘못이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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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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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언니와 여동생과 남편과 명절에 모여서 회사에 싫은 사람 흉을 볼 때 그러지 말라,고 그러면 안 된다던 아빠, 데모하고 뉴스에 목청을 높이는 나에게 정치란 네모난 그릇에 둥근 국자로 물을 푸는 것 같은 거라던 아빠 생각이 났다. 언니랑 싸우고, '요즘 사람들은 돈만 주면 뭐든 시키려고 한다'며 화를 내던 아빠, 여동생이 배가 불러 결혼식을 한다고 동네 창피하다던 아빠 생각이 났다. 태어난 동네에서 초등학교 동창인 엄마와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아빠 생각이 났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세대차이가 나고, 가끔 어떻게 설명하지, 싶은 순간들에 아빠와 싸우던 내가 겹친다. 이제 나도 아빠처럼 이해받지 못하는 어른이 된다.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만하게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래, 나도 안다,고 건성으로 흘려들을 말이나 하고 있다. 

  

이야기 속의 화자는 열 두 살에 이미 죽은 아이인데, 아이가 묘사하는 할아버지가 아빠 같았다. 

아이의 할아버지는 외부적으로 부여하지 않았어도 권위를 가진, 작은 촌 동네의 글을 아는 사람이다. 거대한 국가의 권위가 작은 마을까지 미치지 못할 때에 사람 사이의 문제에 대해 청하여 듣는 사람, 선생들이 자리를 비운 학교에서 글자를 가르치는 사람. 그러고도 자신의 아들들 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마을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사람이다. 

이야기는 그런 할아버지가 결국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닫는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걸 과연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무섭다. 


자오더취안에게는 자오씨우친 같은 담력과 기개가 없었다. 원래 사내들은 여자들 같은 담력과 기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누리끼리했고, 위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모양새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인 같았다. -28%(p372~373)


"딩 선생님, 선생님께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무가 다 베어져버리면 마을이 마을 같지 않을 거예요. 저는 관을 만들지 않아도 좋습니다. 사실 저는 죽기 전에 집사람에게 붉은 비단 저고리를 주고 싶었어요. 이 일은 결혼하기 전에 집사람에게 약속한 일이거든요. 사람이 죽고 나면 관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마을 나무가 전부 베어져버리는데 말입니다." - 56%(p 738-739)


그녀는 눈빛으로 삼촌을 압박했다. 삼촌이 목을 들이밀기만 하면 자신도 곧장 밧줄 안으로 목을 들이밀 작정이었다. 상황은 이미 죽음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죽음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 삼촌은 얼굴에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아주 못된 웃음, 장난기 섞인 웃음이었다. 삼촌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 정 가고 싶으면 링링이 먼저 가. 나는 더 살아야겠어." -70%(p924-925)


할아버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쓸 만큼만 있으면 되지 돈이 이렇게 많아서 어디에 다 쓸꼬?"

아버지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열병이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89%(p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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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12-07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신약에 대한 기대감으로 공연을 준비한 마샹린과 아내에게 선물할 붉은 비단 저고리를 훔친 자오더취안이 아련하더군요.
이렇게 좋은 책이 왜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풍자와 은유로 읽힐 부분도 일부 존재하지만 그 정도도 허용 못하는 사회라니...

별족 2024-12-08 09:5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공산주의,의 한계,라고 생각해요.
 

정년이를 본 어머니의 감상은 '여기는 남자가 안 나오는구나'였다. 

정년이를 본 내 감상은 '주인공이 밉상이네'고, 딸래미의 감상은 '영서가 제일 착해'다. 


마지막회차,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건, 주란이의 선택에 대한 시선이다. 주란이는 바보 멍청이가 아니고, 국극단을 나가고 결혼을 하기로 한 건 주란이가 한 선택이다. 주란이가 정년이를 보면 정말 너무 떨리고 설레서 연기조차 못 할 지경이었던 묘사나, 그런 주란이한테 배신감을 느끼고 제 목을 망가뜨리는 정년이의 묘사나 역시 좀 과했지만, 그게 결국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남자-주란이의 약혼자, 주란이의 아픈 언니의 치료비를 감당하고, 앞으로 주란이를 부양할 예정인 바로 그 남자-와 결혼에 대한 적대로 드러날 때는 작금의 여대 사태가 같이 떠오르는 지경이었다. 여자로만 구성되었던 국극은 결국 사라졌다. 길게 붙인 에필로그에도 불구하고, 정년이가 나중에 무엇을 했던지 간에 국극 자체는 소멸했다.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라니 척화비에도 안 쓸 문구로 - 원래는 척화비에나 쓸 말에 혹해서는 이라고 했지만, 사실 구한말 척화비의 태도는 '살아남기 위해서 개방하지 않겠다'였다- 학교를 망가뜨리면서 자신이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기이한 여자들이 겹쳐 떠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그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나라가 이성애를 '권장'하는 이유는 이성애는 아이가 생기니까,가 아닐까. 권장하고 독려하는 이유가 그런 거라면, 권장이나 독려에도 불구하고 이성애를 택하지 않는 사람은 불이익에 대해서 수용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한다. 권장이나 독려하지 않았다고 해서 강요라고 받아들이고, 울분을 토하는가? '말안하기 게임'을 읽었을 때의 감상( https://blog.aladin.co.kr/hahayo/14297055 ) 그대로, 어쩌면 동성을 좋아하는 것은, 이성을 혐오하는 것은, 인종차별과도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데 이유를 백가지 붙이는 것처럼 지금 그러고들 있는 게 아닌가.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고 할 만큼 목숨을 내놓을 만큼 남자가 싫은 거야?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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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평등은 없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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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처음이 '(아마도) 이 책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조안에게'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도덕철학자가 쓴 글이 굉장히 사적으로 읽혔다. 서문과 도덕적 이상으로서의 경제적 평등,과 평등과 존중이라는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 짧은 책이다. 두 장 중에 첫번째 장이 사적으로 읽혔다. 경제적인 수준에 만족도가 다른 커플에서 벌어질 법한 어떤 논쟁의 끝에 쓰여진 장 같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를 경영하자는 제안에 '당신이 나에게 오는 해를 가리지 않는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고 대답하는 어떤 철학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하는 말처럼 보였다. 소득이 다른 것, 부유하고 부유하지 않은 것은 옳고 그른 것과 하등 관계가 없다. 부유한 사람이 더 훌륭한 것도 아니고, 덜 소유했다고 해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편견이 아니냐고, 경제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당신도 극빈이 해소되는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냐고, 경제적인 평등은 도덕적 이상일 수도 없다, 고 말한다. 분노하지 않는, 불평하지 않는 개인에 대한 어떤 말들에 항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제적 평등에 대한 주장이 도덕적으로 옳은 주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1장과 달리 2장은 경제적 평등을 앞세운 사람들의 주장이 때때로 다른 감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처럼 보인다. '내가 누구네 집 딸이었어도 대접이 이랬겠어?'라는 불만의 표현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게 아니냐고 말한다.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어떤 과격한 발언들이 과연 도움이 되는 말인가 싶었던 짧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갑질에 대한 분노가 존중을 고양하기 보다, 분노를 고양하는 상황을 볼 때마다 가지는 의문에 대한 말들이다. 열개를 다섯사람에게 두 개씩 나눠주는 것이 좋은가,라는 단순한 질문이 현실에서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한 이야기에 더하여, 과연 경제적 평등과 존중의 평등을 엮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인지 질문하게 한다. 


경제적 평등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적절한 화폐량을 판단하는 문제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하는 문제를 분리하게 된다. 그 결과 핵심과는 거리가 있는 다소 부차적인 문제, 즉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위치와 비교할 때 자신의 경제적 위치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를 중요한 도덕적 관심사라도 되는 양 지나치게 심각한 문제로 여기게 된다. 이렇듯 평등의 원칙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혼란과 피상성에 기여하고 있다. -24p


경제적 평등주의의 근본적 오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그리고 각자가 자신이 가진 것으로부터 얼마나 큰 효용을 얻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적게 가졌는지 아닌지의 여부만이 도덕적으로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이런 오류는 소득이 적은 사람이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부유한 사람에 비해 많다는 그릇된 가정에 일부 기인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소득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지는 도덕적 중요성에서는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이다. - p5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작은 만족을 제공하는 자원에 만족하는 것이 무책임하거나 게으르거나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현재 가진 자원에 만족하겠다는 그의 결정 - 다시 말해, 자신이 현재 이만큼의 자원을 가졌다는 사실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결정 - 은 자기 삶의 현재 상태와 질에 대한 매우 지적이고 통찰력 있는 평가에 기초한 것일 수도 있다. - p66


평등주의는 종류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도덕적 이상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단연코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불평등을 수긍하거나 거기에 무관심하거나 불평등을 제거 혹은 개선하려는 노력들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많은 노력들을 지지한다. 내가 그러한 노력들을 지지하는 것은 평등이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기 때문에 평등주의적 목표들도 본질적으로 가치 있다고 확신해서가 아니라, 실용성에 기초한 경험적 믿음으로 볼 때 대개의 경우 더 많은 평등이 서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평등 자체에는 내재적 혹은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다. - p71


공정성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평등주의적 분배를 정당화할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사람들을 다르게 대우할 특별한 이유를 제공하는 사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경우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게 만드는 것은 평등의 선험적인 혹은 선제적인 도덕적 중요성이 아니라, 존중과 공정성의 도덕적 중요성이다. 

벌린이 제시한 것과 같은 사례들에서 평등의 요구와 존중의 요구가 일치하는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 (중략) 그러나 이 경우에 요구되는 평등은 결코 평등주의 자체가 가진 도덕적 권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평등주의는 파생된 것이다. 평등주의는 존중과 공정성이라는 더 기본적인 요구들에 기초한다. 근본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자격이 주어지도록 명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진 인간성에 대응하는 것의 도덕적 중요성이지 그 자체로 강력한 목적이 되는 평등의 도덕적 중요성이 아니다. -p86~ 88


합리적 태도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합리성이 그 자체로 비도덕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믿음을 선택하거나 어떤 행동방침을 따르는 것이 합리성의 요건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도덕적 명령에 어긋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존중에서 벗어난 대우를 정당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리성에 어긋난다는 사실 외에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도덕적 중요성을 가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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