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차에서 아들이 친구 생일에 초대받았다고 말했다. 

"그래, 선물은 준비했어?"

"응, 주려고 오만원 찾았어."

우선, 한숨부터 쉬고, 

"야~ 안 돼, 너무 많아, 꼭 친구랑 같이 문구점 가서 뭐 사줘. 절대 그렇게 주면 안 돼."

결과적으로 부적절한 대응이었다. 

생각의 방향을 틀어줬어야 했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은 초6인 아이가 책정한 5만원이라는 금액이 너무 크고, 선물이 아니라 돈으로 주는 방식이었다. 그저 당부만, 너무 많아, 돈 말고 다른 걸 사 줘,라고 한 거다. 차라리, '야, 엄마 생일에는 얼마나 돈 쓸려고?'라고 물었으면 아이가 앗 뜨거,라면서 금액이나마 줄였을 텐데. 

아이는 결국 수긍하지 못했는지, 저녁에 친구 엄마한테 문자를 받았다. 

'아이가 용돈으로 준 거겠지만 너무 많아서 여쭤본다'는 문자였다. 

친구가 너무 큰 돈이라 거슬러줬단다. 참, 나. 그게 뭐냐. 

옛날 사람이라서? 없이 자란 사람이라서? 몸을 움직여야 돈을 벌 수 있는 노동자라서? 내가 가진 돈의 감각에 비추어 아이들의 돈에 대한 감각이 너무 달라서 많이 놀란다. 

부모가 주는 선물의 형태를 보고 아이가 배운 거라는데, 나도 참 그런 면에서 보여준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선물,은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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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 죽음의 미학, 개정판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이문열 엮음, 김석희 외 옮김 / 무블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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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러빛깔을 읽고 이 책도 다운받아 읽었다. 

젊은 날에 읽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나이도 나이고, 소설도 꽤나 긴 소설들이 들어 있어서 빠르거나 재미나게 읽지는 못했다. 이반일리치의 죽음,이 첫 소설인데, 왜 이게 죽음의 미학,에 묶였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킬리만자로의 눈,은 내가 이걸 어디서 읽었더라, 그러면서 읽었다. 두 소설이 댓구라고 이 소설을 묶은 소설가는 말한다. 그건 어쩌면 삶에 대한 것인가, 싶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가,를 죽어가는 사람이 화자가 되어 말한다.

동양인 작가의 소설이 없고-초판본에 두 개가 들어 있었는데 빠졌다. 초판본을 읽은 바 없지만 아쉽다-, 여성작가의 소설은 하나가 들어 있다.(마차) 보통은 한 사람이 죽고, 남자가 죽는다.(이반일리치의 죽음,  구명정, 불 지피기,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 크눌프, 킬리만자로의 눈) 죽음은 두렵거나 슬프거나 아쉽거나 안타깝다. 한 명의 여자가 죽는 이야기는 숲 속의 죽음,과 앨리스,가 있고, 여성작가가 쓴 마차는 죽은 사람들이 떼로 나온다. 

죽음의 풍경을 통해 삶을 대하는 태도들을 본다. 잭 런던의 불 지피기는 그 절박함이 눈에 보이는 듯 묘사된다. 작가의 어떤 배경이나 사상이 그 짧은 소설로 드러난다. 동정없이 건조하게 상황을 직시하는 서술이다. 

숲 속의 죽음,은 어린 날 자신이 본 죽음에 대한 무언가 동경이랄 수도 있는 것에 대해 어른이 되어 재구성한 이야기로 보인다. 삶의 고단함도, 먹이기 위해 고단했을 한 여인의 삶이 스러지는 것은, 남성작가의 삶과 겹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도 읽혔다. 

앨리스,에서 죽는 것은 동생이 생긴 여자아이고, 질투로 스스로를 죽인다. 여자, 아이,라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드러난다. 

동양작가도 여성작가도 없는 소설들의 면면 가운데, 단 하나 여성작가의 소설이 지나치게 염세적이라서 놀랐다.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는 것도 죽음을 악착같이 거부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살해당한 남자가 살해한 남자를 사후에 만나 고맙다고 인사하는 소설이라니, 충격을 받았다. 죽음 앞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들 가운데, 이렇게 순전하게 죽음을 어쩌면 찬미하는 이야기는 나는 싫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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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연하고도 사소한 기적
아프리카 윤 지음, 이정경 옮김 / 파람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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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te.com/view/20221114n12846 

'넌 너무 뚱뚱해'란 말을 하고, 자신이 산 빵을 봉지째 빼앗아 반납하는 할머니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럼 나는 무얼 먹어야 하나요?'라고 묻는 여자의 이야기다. 그래서 살도 빠지고, 결혼도 했고, 이제는 한국음식전도사가 되었다는 그런 기사. 

이 기사를 보고 궁금해서 마침 SAM(교보 이북 구독서비스)도 되길래 받아서 읽어보려고 했다. 끝까지 못 읽겠더라. 내가 왜 서양 사람들 책을 못 읽는지 떠올렸다. 

말이 너무 많다. 호들갑스럽다. 자기 확신이 넘친다. 

예전에 이승기가 어떤 예능에서 몇 년 후에 사막같은 데 가고 싶다고 하는데, 옆에서 혼자 가지는 않고 카메라랑 같이 갈 거 같다고 했더니, 그냥 혼자 가면 '아깝지 않냐'고 했던 거 같은 거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게 강한 거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 책의 사람이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계속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직업적인 캠페이너,라는데, 하, 나는 참. 

장거리를 뛰고, 블로그나 SNS에 전시하고, 그걸로 기부금을 모아서 에이즈퇴치기금 같은 데 전달한다는 저자가 의심스러운 거다. 유명인을 만나고, 아는 걸 전시하고, 자신에게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걸, 정치가 없는 공간에서, 종교적 선의를 고양시키는 방식의 활동들을 의심한다.

기사에서 내가 좋았던 부분은 저런 말을 듣고 화내기보다 개선점을 묻는 태도다. 지금 고양시키는 세태는 우선 저런 말을 해서는 안 되고, 저런 말을 듣고 참아서도 안 된다. 타인에 대한 관심을 배척하는-한국 아줌마의 오지랖은 욕지기밖에 되돌아올 게 없다- 세태다. 어쩌면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서양에서 한국을 보고 그리워하는 것과 다르게, 가족적이고 지나치게 얽혀있는 한국에서 조금씩 밀어내는 감정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한국문화에 경도되었다는 카메룬이 고향인 미국여성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은, 서양인이 쓴 한국요리책을 보는 것처럼 재미가 없다. 한국의 문화 안에 사는 사람이 서양인이 본 한국문화에 대한 책을 보는 것이 재미가 없는 거다. 기사가 아닌 책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는 자신의 직업, 배경, 같은 것들이고, 서양에서 고양된 태도들이다. 좋은 사람이고, 스스로의 삶을 건강하게 꾸리고 있을 테지만, 책은 읽기에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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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얼업,을 본방으로 보고 있다. 뭘 그렇게 좋아하는지, 생각하고 있다. 엊그제는 본방을 보고, 알고리즘이 안내한 연고전 응원전까지 보고, 으잉, 16부작 대학광고인가 싶다가도, 그런데도 역시 좋은 건 뭔지 생각하는 거다. 삼각관계. 엇갈린 짝사랑. 이런 것도 좋은데, 뭘까. 

저 떼샷들이 아련한 과거처럼 그립다. 

이제 나는, 딸을 보듯이 여주인공을 보고, 저 청량한 색감에 '좋을 때다'라고 말하는 엄마가 되어, 으이구, 술 좀 작작 마셔라. 좀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라구! 그런다. 

그러면서도 부럽다. 같이 뛰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그렇게 시간을 함께 보내는 한 무리의 또래집단.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불안한 미래를 같이 지고, 함께하는 청춘. 성균관스캔들에서 재신(유아인)이 선준(박유천)에게 하던 말 그대로, '그러라고 있는 거다, 어울리라고'. 그런 거 같다. 

한국의 입시문화가 N수,라는 이상한 문화를 만든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직한 동료에게 아니예요, 좋아요, 어차피 대학 졸업하고도 취직하려고 애쓰는데, 공부야 나중에 하면 되지요, 했지만, 치얼업을 보고 있으니, 부모가 공부하라고 대학에 보내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겪은 부모는 세상을 좀 늦게 알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같다. 할 수 있는 한 보호하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미뤄주고 싶다,라는 부질없고 안타까운 어리석은 마음이다. 

지나치게 사랑하는 부모들의 나라에서, 사랑받는 아이들이라 넘치는 부는 언제나 교육으로 흐르게 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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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첫 공개수업 구경을 갔다. 

큰 아이 수업을 하나 들었는데 너무 졸려서, 다음 수업은 내가 재밌어보이는 수업을 찾아 들었다. 그래도 된다더라. 수업은 사회와 문화,뭐 이런 거였는데, 세계 여러 곳의 장례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2학년 수업이었다. 그 수업을 듣고는 물었다. 

"야, 무슨 발표를 아이돌 노래하듯이 하더라. 돌아가면서."

"책임지지 않으려고 그러지, 자기가 조사한 거 자기가 발표하는 식으로."

"아." 

협동을 가르치려고 조별과제를 주는데, 서로를 미워하면서, 책임을 미루는 방식을 배우는 건가.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조사할 분야를 나눠맡는다. 나눠맡은 분야를 조사하고, 나눠맡은 분야를 발표한다. 듣는 입장에서는 뭐지, 싶은 발표들이다. 나눠맡은 분야를 정할 때 협의를 열심히 해야 발표할 때 연결성이 드러날 텐데, 그런 게 잘 안 보였다. 큰 주제, 말고는 이야기를 안 했나. 인터넷에 자료가 부족한 나라일 수도 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같은 조인데 이야기를 안 했구나, 싶은 그런 발표들이 많았다. 같은 조에 같은 점수를 준다면, 민원이 들어올까. 

연결점 없는 각각의 발표를 듣다가, 딱 한 조가 무언가 자연스러운 발표를 하는 걸 들었는데, 너무 좋아보이더라.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는 일이 사람들과 얼굴대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는 하지. 그래도 말하는 게 더 재밌지 않나.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이 변하는 중인 건가. 그래도, 오래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고, 보통 오래된 사람들이 듣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되는데, 그리고 사람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서 또래들도 들으면 좋은 게 뭔지 보일텐데, 싶었다. 들어보면 알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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