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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시인 윤동주가 일제의 생체실험의 희생양이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731 부대의 마루타를 알고 있었지만 윤동주 마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에 분노했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치고는 그나마 적었던 2년의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한 삶.
그가 속박되어 있었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과연 시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으로 한국 역사 팩션의 획을 그은 이정명 작가가
우리가 잃어버려야 했던 위대했던 시인의 마지막 1년을 재구성한 소설이 이 소설이다.
단순히 시인 윤동주의 삶을 재구성한 소설이라면 이처럼 큰 감동을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글의 힘, 시의 힘을 빌어 우리가 잃어버린 위대함을 되새긴다.
인간의 가장 잔혹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죄로 영혼이 황페해진 간수 스기야마.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악마라 불리우며 모든 죄수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스기야마가
어느 날 교도소 한 가운데 비참하게 살해된 모습으로 발견되고 범인을 찾기 위한 추적이 시작된다.
시대의 암울함에 이끌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간수병이 된 18살의 청년 와타나베 유이치는
마지막 교대근무자라는 이유만으로 이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역할을 부여 받는다.
스기야마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그의 삶을 추적하던 유이치는 악마와 시인의 조우를 알게된다.
모든 이들에게 악마로 불렸던 간수와 순결한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제된 시어를 가졌던 시인.
두 사람의 조우가 일으킨 기적같은 변화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교도소의 수많은 사건들.
전쟁이라는 시대의 죄악에 이끌려 공범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어야 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의 전반부는 윤동주와 스기야마의 만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글쟁이를 혐오하던 스기야마가 우연히 접한 윤동주의 시 한편에 정신적 충격을 받고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
다른 재소자들의 엽서를 매개로 시인이 이끄는 책의 세계에 빠져 서서히 동화되는 스기야마의 변화들.
최악의 전쟁에서 최악의 순간에서 살아남아 황폐해진 스기야마의 영혼이 서서히 치유되는 모습들.
그리고 결국 간수와 시인이 아닌 책을 매개로 하나의 동지의식을 가지게 되는 두사람의 인연이 그려진다.
소설의 후반부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격량에 휩쓸리게 되는 두 사람의 운명이 슬프게 그려진다.
식민지의 지식인이라는 한계에 부딪쳐 어쩔 수 없이 좌절을 하게 되는 시인과 그 시인을 되살려내는 간수.
전쟁을 일으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자들이 벌이즌 악행의 희생양이 되어가는 조선 청년들의 아픔.
죽음이 너무 흔해 삶이라는 희망이 없어져 버린 지옥의 형무소에서 시인을 지켜내려는 간수의 노력들.
그리고 시대를 핑계로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음모와 욕망과 배신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악마간수 스기야마와 순정한 시인 윤동주, 그들 사이의 이야기를 밝혀내고 시인의 조력자가 되는 유이치.
시대의 어둠에서 어둠이 끝난 후의 세상을 위해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윤동주 시인의 시들을 통해서 스기야마가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데 있다.
나 역시 시라는 장르에 대핸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 소설을 통해 시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내가 교과서 시험문제로 외웠던 윤동주의 수많은 시들이 이렇게 커다란 감정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지 몰랐다.
우리는 왜 이렇게 위대한 시를 입시문제의 하나로만 기억하며 살아가야 했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암울의 시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입시문제의 하나로 전락해 버린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입시문제의 하나였던 윤동주의 시들은 나에게 따뜻한 위안과 커다란 감동으로 되돌아 왔다.
시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만들어준 이정명 작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나의 살인사건으로 끝날 것 같던 이야기가 여러가지 반전들로 인해 거대한 음모로 뒤바뀐다.
일제가 행했던 수많은 악행들에 대한 고발은 기본이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잔혹함의 끝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끝날것 같던 사건을 단 한 방으로 뒤집는 반전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고 내가 열광했던 이정명 작가의 모습이다.
[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으로 단숨에 나를 끌어당겼던 작가였지만 [악의 추억]은 다소 실망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통해 내가 열광하고 환호했던 이정명 작가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또 다시 열광을 준비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은 얼마나 비열하고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뒤통수 치는 반전은 덤이다.
이야기 자체의 힘만으로도 이 소설의 매력은 충분하다. 소설의 최고의 가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우리는 이미 위대한 시인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그를 끝까지 지켜낼 수 없었지만 그가 남긴 시들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난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세상에서 황폐해진 우리의 영혼도 그의 시를 통해 위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강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