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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낯설음... 기이함... 그리고 거기에 대한 거부감.
이 소설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선뜻 손에 쥐어지지 않았습니다.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그 속에 빼곡히 담긴 이야기의 무게에 눌린 탓이겠지요.
막상 책을 구입하고서도 한참을 망설이고 나서야 이 책을 읽어 볼 용기나 났습니다.
그렇게 나에게 커다란 장막을 드리웠던 분량의 압박이 이제는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만큼 재미있는 소설이고 내가 읽은 한국소설 중에서 최고의 재미를 준 소설이지만
소설의 서두에서 만나는 첫 느낌은 낯설음과 기이함에 대한 저항감이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몸집을 천형으로 안고 사는 벙어리 여자라는 기이한 주인공이
감옥에서 출소하여 발톱이 빠지도록 걸어서 벽돌공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기이한 인물들의 익숙한 듯 낯설은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처음에 그런 낯설음과 기이함에 대한 저항감을 상상보다 강해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게 강한 저항감 마저 무력화 시키는 작가의 능수능란한 화술에 계속 읽어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 언제 그런 저항감이 있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설화...혹은 전설 같은 이야기.
노파-금복-춘희로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소설은
일제시대와 전쟁, 근대화에 이르기 까지 한국의 근대사를 따라 흘러가지만
그런 시대적 배경이 소설속 이야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지니고 있으나 이미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는 마치 신화나 전설, 혹은 설화같은 느낌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인간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지극힌 현실적이지만
트럭을 막아내는 엄청난 힘, 모든 남성들을 유혹하는 강렬한 매력,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신 같은 모습으로
하나씩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하나의 특별한 이야기를 이루며 현실의 모습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복수를 주제로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인물들과 이야기를 본다면 결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구라'이기 때문이죠.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팍에 누워서 전해들었던 옛이야기들의 집합체라고 할까요?
외국의 어떤 작가도 흉내낼 수 없는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느낌입니다.
글이 아닌 말로 쓴 소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글이 아닌 말로 쓴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소설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아름다운 문체나 화려한 언어들의 향연이 아닌
'구라'로 시작해서 '구라'로 끝나는 강력한 이야기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소설입니다.
과거 무성영화 시절에 변사같은 느낌의 화자가 전하는 전설같은 이야기의 힘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글이 아닌 이야기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줍니다.
분명 소설을 읽었으나 오랜 시간동안 무척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느낌입니다.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는 구성의 힘은 또다른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작가의 놀라운 언변과 치밀한 소설적 구성이 멋진 이야기의 용광로를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이 소설에 대한 느낌을 과연 글로 전할 수 있을까요? 직접 읽고 느껴야 합니다.
복수...극복....그리고 고독에 관한 이야기
소설은 노파 - 금복 - 춘희로 이어지는 3명의 여자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추녀로 태어난 노파는 평생을 모은 재산을 써보지도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노파의 한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복수의 형태로 나타나 금복과 춘희의 인생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분량에서는 아주 작은 노파의 이야기가 소설 전체의 구성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두메 산골에서 태어난 금복은 건어물 장수로, 다방, 운수업, 벽돌공장, 극장에 이르기 까지 무수한 성공을 이룹니다.
생선장수를 산골이라는 한계를 벗어났고, 걱정을 통해 생선장수를 벗어났고, 칼잡이를 통해 걱정을 벗어났고....
큰것으로 작은 것을 극복하고, 더 큰것으로 큰것을 극복하고, 마침내 여자라는 운명마저 극복했던 그녀의 이야기.
금복의 딸로 태어난 춘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금복에게 버림받고 선택할 수 없는 거대한 몸집으로 세상에 버림받고
말을 하지 못하는 차이로 인해 또다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모두가 사라진 벽돌공장에서 지독한 고독에 빠지고 다시 만난 트럭기사를 기다리며 또다시 고독에 빠지고....
노파의 복수와 금복의 극복과 춘희 고독이 어우러진 여자들의 이야기. 한번 들어 보세요.
정말 오래간만에 정신없이 빠져서 읽게되는 멋진 소설을 만났습니다.
작가의 최신작에 눈길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