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몸값 1 오늘의 일본문학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전 세계를 상대로 무모한 전쟁을 벌이다 처참하게 패망했던 일본.
그 참혹한 폐허에서 불과 19년만에 기적같은 경제발전으로 올림픽을 치르게 된 일본.
그렇기에 1964년의 도쿄올림픽은 전후 일본사회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그런 도쿄올림픽을 볼모로 잡고 벌이는 대담한 인질극(?)을 그린 오쿠다히데오의 신작.
그동안의 그의 작품들이 심각하다기 보다는 유쾌하고 즐거움을 많이 선사한 것과 비교할 때
전혀 오쿠다히데오 답지 않는 소설이라 할 수 있지만 '최악'을 생각하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물론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리 무겁거나 따분하지 않은 소설입니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어려운 말들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사건을 중심으로 풀어나갑니다.
하나의 시간대로 앞뒤로 오가면서 범인과 형사, 그리고 상류층 아들과 평범한 가정의 딸의 시각으로
보여주는 구성이 새롭지는 않지만 꽤나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합니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명목으로 그 밑에 있는 하층민들의 희생은 당연히 여기는 국가권력.
비참한 생활과 비인격적 대우를 당하면서도 큰소리로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하층민들.
점진적인 변화로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 상황을 바꾸기 위해 꺼내드는 테러리즘이라는 카드.
범인이 하층민 출신의 도쿄대학생이라는 것은 그래서 더욱 더 적절한 설정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대로 졸업을 한다면 상류층으로의 이동이 보장되어 있는 범인이 하층민을 대신해서 나서는 테러리즘.
이보다 적절한 설정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절대로 무겁다고 할 수 없는 이야기로 실실 웃으며 풀어나가는 오쿠다히데오의 소설이지만
작가의 공력이 최고점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벼움 속에 풀어내는 심오한 이야기라고 할까요.

오쿠다히데오를 처음 접한 책이 [남쪽으로 튀어!]라는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남쪽...]의 다소 황당하기까지 하던 아빠의 젊은 시절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소설에서 시마자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는 결말을 그리고 있지만
왠지 시마자키가 살아나서 [남쪽...]의 아버지가 되면 딱 맞아 떨어질 것 같습니다.
무라타가 시마자키의 범죄를 무마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하고 시마자키가 살아서 [남쪽...]의 아빠가 된다면...

[남쪽...]에서도 작가는 사회주의에 대해 동경과 냉소가 교차하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한 때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자체가 반체제적일 수 밖에 없지만
사회주의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사상은 아니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도 마르크스의 이론을 공부한 적이 없는 나에게도 그들의 주장이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이미 45년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과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사회에는 국가권력의 이름아래 유린되고 있는 없는 사람들의 인권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성장' 우선의 정책이 '분배' 우선의 정책으로 변화되기 전 까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 자본을 가진 자들이 '성장'의 경제논리를 버릴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도 시마자키처럼 우리를 대신해 싸워 줄 테러리스트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책의 중간에 무라타가 한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을 탑을 높게 쌓아야 할 때가 아닌가? 넖게 펴는 것은 조금 늦어도 되지 않아?'
이것이 국가권력과 자본가들의 합리화 논리를 대변하는 말이라고 하더라고 기억에 남는 말 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과연 '높이 쌓을 때'일까요? '넓게 펼쳐야 할 때'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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