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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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분야에서나 언제나 통용되는 몇가지 규칙은 있다. 내가 하는 개발만 보더라도 수많은 개발언어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기본적인 문법은 비슷하게 마련이고 개발하는 웹페이지들도 화면의 모양만 다를 뿐 기능은 특별히 다른 부분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작업으로 인해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많다. 아마도 이 소설을 쓸 때 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 작가가 자신의 밥벌이 수단이라 할 수 있는 추리소설을 대놓고 비웃고 있으니 말이다. 같은 직업군에 속한 다른 추리소설 작가들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작가들은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읽는 내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신랄한 비판과 냉정한 조소로 가득찬 '썩소'를 머금게 하는 소설이다.

  추리소설이라는 것이 범인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수많은 트릭들을 파헤쳐나가는 명탐정 혹은 형사의 이야기가 뼈대인 장르이다보니 범인의 사용할 수 있는 트릭을 생각하는 것이 작가의 역량과 직결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트릭이란 것이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 몇가지 유형의 반복과 변주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게이고는 12개의 대표적인 트릭들을 가지고 12개의 사건들을 만들어 내고 각각의 트릭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한다. 언제나 멍청한 추리를 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오가와라 경감과 언제나 뻔한 트릭을 대단한 듯이 밝혀내야 하는 명탐정 텐카이지를 통해 추리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트릭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비판한다. 그런 트릭에 속아 넘어가는, 혹은 속아 넘어가는 척 하는 독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소설의 내용의 안팍을 넘나들며 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추리소설 작가가 흔히 빠지기 쉬운 자기만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배꼽잡는 조소를 통해 안일함에 빠지기 쉬운 동료 작가들에게 경고를 한다. 어쩌면 그래서 이 소설을 작가들에게도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입에는 쓰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도 게이고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의 판에 박힌듯한 트릭들의 반복은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이 그런 안일한 소설들에 열광하는 독자들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2시간 드라마의 법칙' 편에서 보여주는 독자들의 태도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을 시종일관 작가들을 비판하고 독자들의 편에 서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작가의 입장에서 독자들의 태도에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나 역시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내가 추리소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았다. 나 역시도 스스로 추리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결론을 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이다. 게이고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소설에 나오는 12개의 사건은 비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 치밀하거나 제대로 된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12개의 사건이 모두 말도 안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사건들은 한편의 추리소설로 발전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 구조와 멋진 트릭들을 갖추고 있다. 한편의 추리소설을 읽었지만 12편의 추리소설의 요약본을 읽은 느낌을 받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들이다. 도대체 게이고의 역량이란 어느 정도인가? 추리소설을 비판하기 위해서 만든 이야기들 마저도 하나의 멋지 추리소설을 만들 재료가 되고도 충분하니 그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의 양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그의 능력에 다시한번 감탄하게 된다.

  위에서 소설에 대한 많은 느낌을 장황하게 늘어 놓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끊이지 않는 웃음에 있다. 추리소설로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경험이다. 오가와라와 탠카이치의 신세한탄(?) 같은 대사들을 읽다보면 폭소가 터질 때도 있다. 수많은 개그들이 있지만 '추리소설 개그'는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이 소설은 '조연들의 개그'일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추리소설로 이렇게 많이 웃어보기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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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을 쏴라 - 1925년 경성 그들의 슬픈 저격 사건 꿈꾸는 역사 팩션클럽 1
김상현 지음 / 우원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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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사실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이완용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 역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영구가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다'는 보도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 하나로 만들어 낸 이 소설은 이완용의 암살을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 치욕의 시대, 치욕의 역사를 견디고 살아야 했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봉건적 왕조사회에서 근대적 시민사회로의 변화를 겪는 시대 상황을 통해 격변하는 세상에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완용을 쏴라]라는 제목에 끌려 선책한 책이지만 제목 이상의 무언가를 전하는 소설이다.

  우리는 안중근 장군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가 이토히로부미 암살의 첫번째 시도가 실패한 경우를 대비한 두번째 대안이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 역사는 결과론적인 기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위대한 독립운동가들 말고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이름없는 영웅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김근옥이나 조수윤, 김달래와 허건 등의 인물들처럼 역사에 한줄의 기록도 남기지 못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던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모습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해마다 3.1절에 잠깐씩 생각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소설이다. 그들에 대해 우리가 빚진 것이 얼마나 많은 가를 깨닫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시대는 봉건적 왕조사회가 근대적 시민사회로 변하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일본의 우익들이 한국의 발전에 일제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억지주장을 해대는 이유도 이런 시대적 배경에 기인한다. 즉, 그 시대에서는 일제의 간섭이 없었더라도 한국의 사회는 수많은 발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모습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강원도 산골에서 남편의 폭력에 무방비로 당했던 봉건적 여성의 상징인 김달래가 전기가 들어오고 전차가 다니는 경성의 밤거리를 첼로를 든 신여성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 사회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비슷한 변화를 겪은 그 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김근옥, 조수윤, 김달래 등의 가상인물들과 함께 '방정환', '안익태', '이광수' 등의 실존인물들을 함께 등장시켜 현실감을 높히고 있다. 물론 방정환을 제외한 인물들은 까메오로 등장하는 수준이고 방정환이 지독한 술고래였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나머지 인물들의 성격이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등장이 소설의 현실감을 높혀주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그 시대 지식인들의 아픔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실존인물들의 등장은 소설의 재미를 높혀주었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인물에 대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완용'이라는 인물에 대해 일본인 순사, 조선인 순사, 조선인 일본 고위 간부, 이완용의 손자, 독립운동가 등이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모두 다를수 밖에 없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렇기에 역사상의 한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의 기록은 기록자의 일방적인 시선으로 평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것은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100명이 부정적으로 말한다 해도 1명의 긍정적인 평가가 그 사람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완용'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에는 이런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그는 누가 뭐라해도 역사의 죄인이다.

  작가는 '역사적 진실'이 아닌 '소설적 진실'을 찾고자 한다고 했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소설적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내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나는 이 소설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강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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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냐
박상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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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야구팬이라면 한번쯤 가능성이 없는 꿈을 꾼다. 나 어릴적 친구들의 장래희망이 거의 다 '박사', '대통령' 등이었고 중고등학교 때 농구에 심취하며 내 키가 10cm만 더 컸어도 한국농구가 바뀌었을거라고 허풍을 쳤듯이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야구선수를 꿈꾼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한 복판에 꽂아넣으며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파이어볼러'는 야구팬들에게는 꿈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 불가능한 꿈이고 그런 꿈을 달래기 위해 사회인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이 소설은 말도 안되게 황당한 꿈을 기적처럼 이루어내는 찌질한 청춘의 이야기를 통해 이룰 수 없는 그 꿈들에 대한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또 하나의 탈출구다. 오죽이나 황당했으면 책 제목이 벌써 '말이 되냐?' 겠는가? 제목 그대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들을 야구와 무협의 절묘한 만남으로 그려낸 청춘로망 야구 판타지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어릴 때 내 가슴에 파고들었던 이현세의 '설까치'가 그랬고, 이상무의 '독고탁'이 그랬듯이 소설 속 주인공 이원식도 처음에는 아무런 재주도 없는  3류 사회인 야구팀의 후보였지만 기적같은 일들의 연속으로 프로야구 1군무대에 까지 오르는 성장을 보여준다. 소설로 읽는 만화같은 스토리. 일면 유치하고 황당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 속에 내가 빠져들게 되는 건 만화와는 다른 설정들 때문이다. 그 설정의 가장 큰 중심은 주인공의 나이가 10대가 아닌 30대라는 것. 30대의 사회인 야구 후보선수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 온 행운으로 강철어깨를 갖게되고 때마침(?) 실직까지 하게되자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한다. 현실에서 이런 사람을 본다면 한 마디로 '철부지'라고 매도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난 그 설정이 주는 의미에 이 소설의 가치를 둔다. 그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적을 통해 프로야구 1군에 올라갔을 때 리포터가 30대의 나이에 왜 프로야구를 했냐고 묻자 주인공은 '꿈을 이루는 데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무모하고 철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꿈을 버리지 말라고. 불황과 실직으로 인해 의기소침해지고 위축된 채 방 한구석에 쳐박혀 세상을 원망하는 찌질한 청춘들에게 이원식이 던지는 불같은 강속구는 잃어버린 자심감을 되찾으라는 명령이고 자신의 꿈을 향해 열정을 불 태우라는 자극제이다. 본인들의 의사와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희생자가 된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가슴속 뜨거운 열정을 되살려보라는 부추김이다.

  시종일관 말도 안되는 상황들의 연속이고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가 웃음을 유발하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이지만 중간중간 사회에 대한 날이 선 비판을 보여준다. 지금은 대통령이 된 '어묵 먹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판, 개그프로의 유행어처럼 '1등만 기억하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판이 중간 중간 섞여있다. 그런 비판들은 시대의 억울한 피해자들인 지금의 청춘들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비판들도 잠깐 스쳐갈 뿐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이 소설의 최고 매력이다. 

  야구라는 종목을 불확실성의 종목이다. 어느 종목보다 복잡하고 엄격한 규칙을 가지지만 둥근 공과 둥근 배트의 만남이 일으키는 수많은 불확실성으로 인해 단 한 경기도 동일한 형태의 경기가 일어나지 않는 경기. 수많은 법규와 도덕으로 짜여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한 사람도 똑같은 삶을 살지 않는 우리들의 인생과 닮아있는 경기이다. 그래서 난 야구에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 스트라이크존을 통해 사회를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스트라이크는 한 복판에 들어오면 아무리 좋은 공도 얻어 맞는다. 훌륭한 투수는 스트라이크존의 구석 구석을 찌르는 칼날같은 제구력을 발휘한다. 우리 사회에도 한복판의 노른자위를 차지하는 기득권들에 대한 정책보다는 사회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는 서민들에 대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야구는 그렇게 우리네 삶을 위로하는 수단이다.

  나도 야구라면 자다가도 깨는 열혈 야구광이지만 이 작가에는 Give-Up이다. 야구에 반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소설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나오는 만화를 보면 작가의 정신세계가 심히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미친 작가가 나의 마음에 쏙 들어온다. 야구라는 종교에 빠진 광신도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재미는 정말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소설집 '이원식씨의 타격폼'은 이미 내 북카트에 들어있다. 기대되는 신인작가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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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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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과 5범의 미성년 성폭행범 형, 단 한편의 영화로 충무로의 유령감독으로 전락한 나, 한번의 이혼 후에 다시 시작한 결혼은 불륜으로 마무리한 여동생, 자기 엄마를 닮아서 싸가지라고는 눈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조카, 그리고 이런 막장 인생들을 아무말 없이 끌어 안고 밥을 챙겨 먹이는 칠순의 노모. 평균나이 49세의 '노령화 가족'이 좁고 답답한 28평짜리 연립주택에 모여살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저히 정상적인 집안이라고는 할 수 없는 집에서 형은 조카의 팬티를 손에 쥐고 자위를 하고, 나는 담배피는 조카를 협박해서 삥을 뜯고, 여동생은 또 다른 남자를 불러들이고, 조카는 결국 집을 나간다. 거기에 40년을 넘게 숨겨온 엄마의 비밀과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나이에 들어나는 형제간의 출생의 비밀까지.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의 모든 요건을 한꺼번에 갖춘 가족들이 세상에 비참히 패배한 후 엄마의 집으로 모여들어 다시 추스리고 세상에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작가의 전작인 [고래]를 보면서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했다. 도저히 말도 안될 것 같은 상황들을 설정해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스럽게 400페이지가 넘는 '뻥'을 쳐대는 작가를 보면서 기가막히면서도 그 이야기가 가지는 재미가 너무나 커서 결국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던 매력적인 작가. [고래]를 읽고 나서 내 머리속에는 '천명관'이라는 뛰어난 이야기꾼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 책 [고령화 가족]을 통해 다시 한번 이 작가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정말 막장 중에 막장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매일같이 세상에 깨지고 무참히 짓밟히는 우리들의 삶에 따뜻한 위로는 전한다. 세상에 저런 가족들도 나름의 희망을 가지고 사는데 너는 무엇때문에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느냐?라고 호통을 쳐서 정신을 반짝들게 만든다. 게다가 그 모든 과정의 이야기는 잠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만큼 재미있다. 이 작가 볼수록 딱 내 스타일이다.

  세상에 무참히 깨지고 인생의 막장에 이르른 자식들에게 엄마는 묵묵히 밥을 챙겨준다. 따지고 보면 한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는 3명의 자식들이 하나 둘씩 품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더니 잔인하고 냉정한 세상에 무참히 깨지고 돌아왔을 때 엄마는 묵묵히 밥을 챙겨주고 기죽지 말라고 날마다 고기로 배를 채워준다. 다시는 세상에 나설 용기마저 잃어버린 채 희망이라고는 모두 잃어버린 자식들이지만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먹으며 서서히 세상에 맞설 힘을 키우고 결국은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콩가루집안 같이 서로 어울리지 못했던 형제들간의 끈끈한 가족애가 커다란 역할을 한다. 비록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경멸하지만 조카의 실종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덤비는 삼촌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혹한 린치에도 형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동생의 모습 등은 이렇게 망가지고 헤체된 가족들 사이에도 사랑이란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가족을 말한다. 가족간의 사랑을 말한다. 가족은 세상보다 더 강한 무기임을 말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가족소설이다.

  이 소설은 엄마를 말한다. 젋었을 때 불같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식들을 버릴 정도로 뜨거웠던 '여자'였던 엄마를 말한다. 아픈 사랑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가정을 지킨 엄마를 말한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정리는 지켰던 엄마를 말한다. 서로 다른 부모를 가진 삼남매를 알뜰살뜰 걷어 먹여 세상에 내보냈던 엄마를 말한다. 작년에 신드롬을 일으켰던 신경숙 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가 희생만 하다 간 불쌍한 엄마를 그렸다면 이 소설의 엄마는 조금은 더 자신을 아낄 줄 알았던 엄마를 그리고 있다. 난 오히려 이 소설의 엄마가 더 인간적이다. 물론 내 어머니도 그렇게 살다가시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더욱 엄마가 생각나게 만든다. 언제나 집에 전화하면 맨 먼저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냐?'고 물으셨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집에 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미리 따뜻한 밥상을 준비해 두셨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세상과 싸우며 버티는 힘은 바로 그 어머니의 밥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얻어먹은 수많은 밥상이 새록새록 그리워진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는 문구가 가슴에 남는다. 우리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거기서 끝이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은 계속된다. 그들의 삶에 더한 비극이, 더한 행복이, 더한 사랑이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도 그럴 것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난 지금 무척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힘겨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적어도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적은 하지 않는다. 이 가족보다 더한 인생이 나를 기다린다고 해도 그것 또한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은 계속할 생각이다. 이제는 어머니의 밥을 먹을 수는 없지만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의 따뜻한 미소가 함께 하는 한 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얻은 값진 소득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 생각나게 하는 따뜻한 위로와 희망과 자신감을 주는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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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류 시불류 - 이외수의 비상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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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트위터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에 빠져들고 있다. 직업상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입장에서도 이제 트위터는 미룰 수 없는 대세이다. 그런 직업상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도 새로운 것이 쉽게 빠져드는 성향에서 트위터를 시작하고 제일 먼저 Following 한 유명인이 바로 이외수 선생이다. @oisoo가 이외수 선생의 트위터 아이디. 선생의 트위터를 따라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던져 주시는 선생의 말 한마디에 잠시나마 생각을 할 시간을 갖게 된다. 이 책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한 것도 이외수 선생의 트위터를 통해서다. 트위터에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제목은 언뜻 욕같이 들리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절대로 우습거나 가볍지 않다.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난 이 말의 의미를 트위터 열풍과 연결시킨다. 세상 모두가 트위터 열풍에 휩쓸리고 세상이 무섭게 변한다고 해도 나 스스로 그 흐름에 올라 타지 않는다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선생 스스로 세상 누구보다 빨리 트위터 열풍에 동조하고 계신 상황에서 그 말의 의미가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책 속의 이야기는 [하악 하악]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 정태련 선생의 그림도 여전히 포근하다. 책 속에 풍기는 은은한 향기도 좋다. 길지 않은 문장 속에서 세상에 대한, 예술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이외수 선생의 깊은 통찰이 엿보인다. 두꺼운 책이 아니고 문장도 많지 않아서 단 하루만에 다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한번 읽고 책장속에 넣어 둘 책은 아니다. [하악 하악]도 두고 두고 읽었는데 이 책도 그럴 것 같다. 분명히 산문집을 읽었으나 시집을 읽은 느낌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선생의 깊은 생각을 담기 위해 단어 하나 하나에 고심을 하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읽기에 부담스럽거나 어렵지 않다. 옆 집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인생의 가르침을 듣는 듯한 편안한 문장들. 요즘의 젊은이들에 못지 않은 유머감각과 위트가 있어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 진다. 나 자신도 이외수 선생만큼 세상에 따라가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 따라가기 싫어하거나 게을러서 따라가기 힘든 사람들의 핑계거리가 될 뿐이다. 

  나부터 변해야 한다. IT 업계에 종사하다 보면 요즘의 세상은 정말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빨리 변하고 있다. 그런 변화의 흐름을 보면서 나 스스로 나이를 핑계로 흐름을 거부하고 있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외수 선생이 트위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세대와 소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된다. 책 속의 글 중에서 '현자가 건달의 눈높이를 맞춰주면 건달은 현자도 자기와 같은 수준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는 내용의 글이 있다. 선생이 지금 트위터를 통해 젊은이들과 소통한다고 해서 선생의 연륜이 젊은이들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세상의 흐름을 끌고가고 있는 것일 뿐. '아불류 시불류'의 반대말은 '아선류 시후류'라고 하면 어떨까? '내가 먼저 흐르면 시간(세상)은 따라서 흐른다'는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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