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에서나 언제나 통용되는 몇가지 규칙은 있다. 내가 하는 개발만 보더라도 수많은 개발언어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기본적인 문법은 비슷하게 마련이고 개발하는 웹페이지들도 화면의 모양만 다를 뿐 기능은 특별히 다른 부분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작업으로 인해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많다. 아마도 이 소설을 쓸 때 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 작가가 자신의 밥벌이 수단이라 할 수 있는 추리소설을 대놓고 비웃고 있으니 말이다. 같은 직업군에 속한 다른 추리소설 작가들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작가들은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읽는 내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신랄한 비판과 냉정한 조소로 가득찬 '썩소'를 머금게 하는 소설이다. 추리소설이라는 것이 범인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수많은 트릭들을 파헤쳐나가는 명탐정 혹은 형사의 이야기가 뼈대인 장르이다보니 범인의 사용할 수 있는 트릭을 생각하는 것이 작가의 역량과 직결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트릭이란 것이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 몇가지 유형의 반복과 변주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게이고는 12개의 대표적인 트릭들을 가지고 12개의 사건들을 만들어 내고 각각의 트릭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한다. 언제나 멍청한 추리를 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오가와라 경감과 언제나 뻔한 트릭을 대단한 듯이 밝혀내야 하는 명탐정 텐카이지를 통해 추리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트릭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비판한다. 그런 트릭에 속아 넘어가는, 혹은 속아 넘어가는 척 하는 독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소설의 내용의 안팍을 넘나들며 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추리소설 작가가 흔히 빠지기 쉬운 자기만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배꼽잡는 조소를 통해 안일함에 빠지기 쉬운 동료 작가들에게 경고를 한다. 어쩌면 그래서 이 소설을 작가들에게도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입에는 쓰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도 게이고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의 판에 박힌듯한 트릭들의 반복은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이 그런 안일한 소설들에 열광하는 독자들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2시간 드라마의 법칙' 편에서 보여주는 독자들의 태도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을 시종일관 작가들을 비판하고 독자들의 편에 서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작가의 입장에서 독자들의 태도에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나 역시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내가 추리소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았다. 나 역시도 스스로 추리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결론을 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이다. 게이고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소설에 나오는 12개의 사건은 비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 치밀하거나 제대로 된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12개의 사건이 모두 말도 안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사건들은 한편의 추리소설로 발전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 구조와 멋진 트릭들을 갖추고 있다. 한편의 추리소설을 읽었지만 12편의 추리소설의 요약본을 읽은 느낌을 받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들이다. 도대체 게이고의 역량이란 어느 정도인가? 추리소설을 비판하기 위해서 만든 이야기들 마저도 하나의 멋지 추리소설을 만들 재료가 되고도 충분하니 그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의 양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그의 능력에 다시한번 감탄하게 된다. 위에서 소설에 대한 많은 느낌을 장황하게 늘어 놓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끊이지 않는 웃음에 있다. 추리소설로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경험이다. 오가와라와 탠카이치의 신세한탄(?) 같은 대사들을 읽다보면 폭소가 터질 때도 있다. 수많은 개그들이 있지만 '추리소설 개그'는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이 소설은 '조연들의 개그'일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추리소설로 이렇게 많이 웃어보기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