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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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과 5범의 미성년 성폭행범 형, 단 한편의 영화로 충무로의 유령감독으로 전락한 나, 한번의 이혼 후에 다시 시작한 결혼은 불륜으로 마무리한 여동생, 자기 엄마를 닮아서 싸가지라고는 눈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조카, 그리고 이런 막장 인생들을 아무말 없이 끌어 안고 밥을 챙겨 먹이는 칠순의 노모. 평균나이 49세의 '노령화 가족'이 좁고 답답한 28평짜리 연립주택에 모여살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저히 정상적인 집안이라고는 할 수 없는 집에서 형은 조카의 팬티를 손에 쥐고 자위를 하고, 나는 담배피는 조카를 협박해서 삥을 뜯고, 여동생은 또 다른 남자를 불러들이고, 조카는 결국 집을 나간다. 거기에 40년을 넘게 숨겨온 엄마의 비밀과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나이에 들어나는 형제간의 출생의 비밀까지.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의 모든 요건을 한꺼번에 갖춘 가족들이 세상에 비참히 패배한 후 엄마의 집으로 모여들어 다시 추스리고 세상에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작가의 전작인 [고래]를 보면서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했다. 도저히 말도 안될 것 같은 상황들을 설정해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스럽게 400페이지가 넘는 '뻥'을 쳐대는 작가를 보면서 기가막히면서도 그 이야기가 가지는 재미가 너무나 커서 결국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던 매력적인 작가. [고래]를 읽고 나서 내 머리속에는 '천명관'이라는 뛰어난 이야기꾼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 책 [고령화 가족]을 통해 다시 한번 이 작가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정말 막장 중에 막장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매일같이 세상에 깨지고 무참히 짓밟히는 우리들의 삶에 따뜻한 위로는 전한다. 세상에 저런 가족들도 나름의 희망을 가지고 사는데 너는 무엇때문에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느냐?라고 호통을 쳐서 정신을 반짝들게 만든다. 게다가 그 모든 과정의 이야기는 잠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만큼 재미있다. 이 작가 볼수록 딱 내 스타일이다.

  세상에 무참히 깨지고 인생의 막장에 이르른 자식들에게 엄마는 묵묵히 밥을 챙겨준다. 따지고 보면 한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는 3명의 자식들이 하나 둘씩 품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더니 잔인하고 냉정한 세상에 무참히 깨지고 돌아왔을 때 엄마는 묵묵히 밥을 챙겨주고 기죽지 말라고 날마다 고기로 배를 채워준다. 다시는 세상에 나설 용기마저 잃어버린 채 희망이라고는 모두 잃어버린 자식들이지만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먹으며 서서히 세상에 맞설 힘을 키우고 결국은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콩가루집안 같이 서로 어울리지 못했던 형제들간의 끈끈한 가족애가 커다란 역할을 한다. 비록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경멸하지만 조카의 실종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덤비는 삼촌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혹한 린치에도 형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동생의 모습 등은 이렇게 망가지고 헤체된 가족들 사이에도 사랑이란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가족을 말한다. 가족간의 사랑을 말한다. 가족은 세상보다 더 강한 무기임을 말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가족소설이다.

  이 소설은 엄마를 말한다. 젋었을 때 불같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식들을 버릴 정도로 뜨거웠던 '여자'였던 엄마를 말한다. 아픈 사랑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가정을 지킨 엄마를 말한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정리는 지켰던 엄마를 말한다. 서로 다른 부모를 가진 삼남매를 알뜰살뜰 걷어 먹여 세상에 내보냈던 엄마를 말한다. 작년에 신드롬을 일으켰던 신경숙 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가 희생만 하다 간 불쌍한 엄마를 그렸다면 이 소설의 엄마는 조금은 더 자신을 아낄 줄 알았던 엄마를 그리고 있다. 난 오히려 이 소설의 엄마가 더 인간적이다. 물론 내 어머니도 그렇게 살다가시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더욱 엄마가 생각나게 만든다. 언제나 집에 전화하면 맨 먼저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냐?'고 물으셨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집에 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미리 따뜻한 밥상을 준비해 두셨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세상과 싸우며 버티는 힘은 바로 그 어머니의 밥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얻어먹은 수많은 밥상이 새록새록 그리워진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는 문구가 가슴에 남는다. 우리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거기서 끝이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은 계속된다. 그들의 삶에 더한 비극이, 더한 행복이, 더한 사랑이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도 그럴 것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난 지금 무척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힘겨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적어도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적은 하지 않는다. 이 가족보다 더한 인생이 나를 기다린다고 해도 그것 또한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은 계속할 생각이다. 이제는 어머니의 밥을 먹을 수는 없지만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의 따뜻한 미소가 함께 하는 한 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얻은 값진 소득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 생각나게 하는 따뜻한 위로와 희망과 자신감을 주는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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