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 - 책으로 노래하다
이도운.이은주.남지은 지음 / 블루게일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작년 한 해 최대의 이슈를 만들었던 프로그램을 꼽으라면 단연 '나는 가수다'이다.

신인가소도 아닌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가진 가수 7명이 서바이벌을 벌인다.

처음 기획 내용을 접했을 때 느낌은 과연 '쌀집 아저씨'이니까 가능한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실력으로 인정도 받았고 인기도 얻었던 가수들이 과연 출연할까? 도 궁금했다.

그렇게 아주 황당한 생각으로 다가왔던 '나가수'는 예상했던, 예상치 못했던 논란을 일으켰다.

단지 프로그램 내부에서만의 논란이 아니라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논란거리를 만들었던 나가수.

그 '나가수'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그 속살을 들여다 보게 해주는 책이 나왔다는 말이 반가웠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프로그램 관계자가 아닌 정치부 기자가 썼다는 점이다.

즉, 자신이 참여했던 프로그램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의 시선을 차단했고 그래서 보다 객관적이다.

작가가 '나가수'의 가치가 대단한 것이었다는 전제를 가지고 쓴 책이지만 최소한의 객관성은 확보했다.

프로그램의 관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수들이나 편곡자, 세션, 스탭들의 인터뷰가 더 편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무턱대고 '나가수'를 옹호하는 말들로 포장되지 않은 진솔한 인터뷰들이 실릴 수 있었다.

물론 '나가수'에 출연했고 어느 정도 혜택을 받은 입장에서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나가수'에서 차마 풀어내지 못한 속마음을 인터뷰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성공한 프로그램의 자화자찬으로 도배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속살을 보여주는 책이다.

 

또 다른 매력은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나가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먼저 '나가수'가 남긴 사회적, 문화적, 경제학적 가치과 성과 그 속에서의 논란에 대한 분석을 한다.

이미 수많은 매체에서 난도질 된 내용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가장 객관적인 시각이다.

다음으로 '나가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마케팅 전략적 시각에서 바라본 내용이 나온다.

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관심이 갈 내용이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이 갈 만한 내용들이다.

마켕팅 측면에서 바라본 '나가수'의 모습은 '나가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 신선했다.

좀 더 들어가면 실제로 '나가수'의 주인공이었던 20명의 가수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작가가 음악적으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관계로 주로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시각으로 가수들을 바라본다.

프로그램의 주인공들이었던 가수들의 음악사를 바탕으로 '나가수'를 바라보는 시각도 좋은 느낌이다.

가수들의 인터뷰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나가수'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을 알려준다.

또한 가수들이 다른 가수들의 무대를 평가하는 것을 보면서 일반인이 느꼈던 것과 다른 느낌을 갖게된다.

대중 가요의 소비자가 청중이라고는 하지만 그 분야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선은 또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나가수'의 10대 명장면을 통해서는 무대라는 것을 중심으로 '나가수'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다.

그 밖에 '나가수'를 통해 새롭게 인정받은 편곡자들, '나가수'의 중심 세션맨들, 거기에 담당 PD까지

'나가수'를 만들어 낸 숨은 사람들이 각자의 시각에서 바라 본 '나가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가수'의 포맷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나가수'가 성공한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조차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가수' 무대에 올랐던 가수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다.

또한 그들이 하나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에 대한 인정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가수'의 열혈팬이다. '나가수'에 나오는 가수들이 정확히 나의 세대에 맞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매주 보여주는 무대는 저절로 감탄이 나오고 나도 모르게 감동이 넘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10대 아이돌에 의해 잠식되어 버린 가요계에서 실력있는 대형 가수들이 숨쉴 공간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가수'에 쏟아 낸 가수들의 열정에 또다시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열정과 그들의 땀과 그들의 떨림과 그들의 눈물 하나 하나에 또 한번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강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하무적 불량야구단
주원규 지음 / 새움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로에 어울리지 않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팀을 이끄는 김인식 감독.

최약체 삼호 맥시멈즈를 경이로운 승률로 우승시키고 한국시리즈를 준비한다.

아내와 합의이혼에 합의한 날 단장으로부터 져주기게임을 제안받고 거절한다.

그리고 시작된 한국시리즈. 이미 져주기로 마음먹은 코치와 선수들의 행동.

설마했던 가장 불량한 야구가 시작되고 있었다. 과연 김인식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소설은 가장 불량한 의도를 가진 한국시리즈 7경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들의 모기업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막강한 자금력으로 승리를 탈취하려는 미성 스틸러스.

절박한 구단 사정에 미성그룹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구단 수뇌부의 결정.

프로선수라고는 하지만 미래에 대한 보장을 받을 수 없는 현실에 굴복한 선수들.

처음부터 승리할 수 있는 카드를 모두 빼앗겨 버린 감독의 고군분투 한국시리즈 이야기.

유혹의 손길마저 뻗치지 않을 정도로 한물 간 선수들과 막무가내 사고뭉치 특급투수,

그리고 지원다운 지원도 없이 방치된 2군에서 데려온 5명의 선수들이 무기의 전부인 상황.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진정한 야구를 하고 싶은 열정을 가진 감독의 투쟁기이다.

 

거대한 힘 앞에 아무런 저항도 없을 것 같은 소수가 뭉쳐 이기는 이야기는 진부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진부함들이 모두 현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김인식 감독은 언제나 논란의 중심이던 김성근 감독이나 김재박 감독을 닮아있다.

미성 스틸러스는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본다 해도 삼성 라이온즈를 모델로 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삼호 맥시멈즈는 홈구장이 목동이라는 설정이 아니어도 결국은 넥센 히어로즈를 닮아있다.

그런데 맥시멈즈의 열성팬은 또 어쩔 수 없이 롯데 자이언츠의 광팬들이 연상된다.(나 역시 롯데광팬)

맥시멈즈라는 이름은 선수의 기량을 최대한 뽑아낸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스틸러스라는 이름에는 상대의 승리를 부정한 방법으로 '스틸'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듯 소설속의 인물들과 모습들이 지금의 프로야구의 모습과 닮아 있으니 정말로 아리송하지 않은가?

소설을 읽는 내내 주인공들과 오버랩되는 선수, 감독, 구단의 모습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에 푹 빠져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무 재미있는 야구이야기 아닌가 !!!

 

소설의 백미는 맨 뒤의 몇장에 남아있는 에필로그에 있다.

영화나 다른 소설처럼 승리한 김인식 감독이 영웅이 되거나 부정한 스틸러스가 비난을 받는 결론이 아니다.

결정적 한 방을 날린 한물간 홈런타자가 드라마틱하게 재기하거나 그가 가진 개인적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얼떨결에 2군에서 호출되어 일약 우승의 조력자가 된 선수들이 1군의 스타로 재탄생하지도 않는다.

재정위기에 빠졌던 맥시멈즈가 기적같은 우승으로 구사일생이 되기는 커녕 매각이라는 결론을 맞는다.

이것들이 말해주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현실을 현실이다'라는 진실. 작은 기적이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는 진실.

김인식 감독이나 선수들이 그런 현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현실에 힘없이 굴복하기 싫었을 뿐.

스포츠 영화와 소설들이 주는 교훈은 동일하다. 편법이 통하지 않는 땀과 노력이 가져오는 순수함의 감동.

이 소설을 그 교훈을 전하면서도 현실을 이상으로 바꾸는 오류를 범하지 않음으로써 매력을 가진 소설이 아닐까?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김인식 감독이 순간 순간 펼치는 작전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치 현장에 있는 것 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 경기 장면에 손에 땀을 쥐는 긴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야구를 몰라도 상관없다. 작가는 아주 친절하게 야구 용어들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구 팬인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야구는 정말로 많이 인생을 닮아 있다고.

누군가 나의 인생에 내가 어쩌지 못한 힘으로 불의를 강요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현실을 인정하고 불의에 동참해야 할까? 현실을 인정하지만 자신만의 정의를 찾아가야 할까?

선택은 개개인의 몫이지만 이 소설에서 김인식 감독과 한번 만나본다면 그 선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강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신 좀 하겠다는데
위리 지음 / SUPERCM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불치병에 대한 치료약 개발에 성공한 세계적인 과학자 앨런킴.

한국 굴지의 그룹 성화그룹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성과를 이룬 그에게

국가는 자신을 낳아 준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발휘해 달라고 채근하고

장학금을 댄 성화그룹에서는 자신들을 위해 일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은혜를 갚으라는 말인데 앨런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스스로 배신자가 되겠다고.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앨런킴을 놓칠 수 없는 대통령과

자신의 돈으로 키운 인재를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성화그룹 회장의 욕망은

앨런킴을 그대로 놓아줄 수 없고 그래서 이 황당하고도 통쾌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떤 이유로든 조국을 배신해서는 안된다는 세뇌를 우리 보다 강하게 하는 나라가 있을까?

조국의 부름에는 어떤 이유로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강한 정서적 유대감이다.

아무리 많은 공헌을 해도 대표팀 은퇴시에 있었던 박지성에 대한 비난만 봐도 그렇다.

하물며 그 가치가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것이라면 비난의 강도는 짐작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배신을 하겠다고 덤비는 앨런킴의 모습은 무모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를 배신자로 몰아넣는 치밀한 언론 조작의 모습을 보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저 소설에 나올 수 있는 과장된 비약이라고 치부하면 될까? 현실은 그렇치 않다고?

NO!!! 이 소설에 나오는 언론 조작의 모습은 너무도 현실과 닮아있어 씁쓸하고 기가찬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정보에 대한 비판은 사라진 사회에 살고있다.

누군가 그 정보의 흐름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다면 조작은 너무도 쉽다.

실제로 우리는 '마녀사냥'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여론의 오판을 흔하게 접하지 않는가?

그래서 이 소설의 첫번째 타겟은 윤동일 기자로 대변되는 죽어버린 언론이 되어 버렸다.

앨런킴은 끝까지 윤동일 기자를 밀어부쳐 스스로 되살아난 언론으로 돌아가게 하였지만

우리는 지금의 죽어버린 언론을 과연 어떻게 살려내야 할 것인가? 답답했고 씁쓸했다.

 

겉으로는 국가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 속내는 개인의 권력에 있는 정치권의 모습도 씁쓸하다.

언제나 있어왔다는 말로 위로를 삼고 살아가기에는 정치권과 재벌의 유착은 화병이 날 지경이다.

대한민국이 삼성공화국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삼성의 돈으로 공부하고 삼성에서 지원받아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에 앉아있지 않은가?

그들이 과연 결정적인 순간에 국민을 위한 결정을 할까? 삼성을 위한 결정을 하게 될까?

우리는 이미 그 더러운 돈의 힘을 수없이 많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소설에 나오는 성화그룹의 모습은 삼성으로 대변되는 삐뚤어진 대한민국 재벌가의 모습과 똑같다.

소설이어서 과장된 부분이 있지 않냐고? NO!!! 내가 겪어본 40년 세월에서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편리한 명칭으로 자신들을 방어하고 애국심을 명분으로 국민들을 협박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검은 속내는 국민들이 모르지 않음을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국민들의 정치 혐오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파리처럼 꼬이는 정치꾼들.

소설의 두번째 타겟은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닌 자신들을 위한 정치에 정신을 놓아버린 정치꾼들이다.

 

우리 사회의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이렇게 작아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자본주의이다.

세계사에 유래없는 광속성장의 그늘에서 우리는 정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나 돈에 있어서는 더욱.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기엔 재벌가들에 대한 특혜과 비리는 우리 사회를 완전히 병들게 만들었다.

그 모습 그대로 돈에 권력이 꼬이고 돈에 언론이 조작되면서 이제 우리 사회는 냄새로 넘쳐나지 않은가?

병들대로 병들고 썩을대로 썩어버린 우리사회의 오늘의 모습에서 가장 큰 원인제공자는 바로 재벌이다.

언제나 선진국을 꿈꾸지만 선진국에는 없는 재벌가라는 특권세력을 점점 키워주고 먹여주는 정권.

그런 정권의 보호속에 나눔이나 분배에는 전혀 관심없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이전투구하는 재벌들.

국민들은 재벌의 해체와 경제의 민주화를 열망하는데 그저 딴나라 이야기하듯 정치꾼들만 돌보는 재벌들.

소설의 세번째 타겟을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병폐의 근원이 되어버린 썩어버린 재벌세력들이다.

 

소설이 문제점만 부각하고 말았다면 아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언론, 정치꾼, 재벌로 이어지는 강력한 네트워크의 힘 앞에서 당당히 맞서는 개인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개인이 가진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싸움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싸움을 보는 것만도 즐겁다.

나 같은 개인은 절대로 할 수 없는 통쾌한 말과 행동들을 대신해 주는 앨런킴의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결국 나 같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처럼 그들을 욕하며 뒷담화를 하는 것이 전부일 수 밖에 없지만

이렇게 소설로라도 그들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길 수 있다면 앨런킴의 싸움을 응원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개인의 투쟁과 거기서 얻어내는 작은 승리라는 소설의 공식은 다소 진부하지만

그렇게라도 대리만족을 느껴야 이 더럽고 힘든 세상을 조금 더 견디고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참 좋다.

뭔가 답답하고 미쳐버릴 것 같은 세상에 나 대신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앨런킴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강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난 거부감을 가졌다.

내가 가진 윤리관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였기 때문이다.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애로티시즘은 아직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윤리의 문제이다.

영화가 개봉되면서 주연 여배우와 그녀의 베드신이 화제가 되는 것을 보며 또다시 불쾌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과연 인간의 일차원적인 욕망에 대한 묘사가 이 소설의 매력일까?

직접 읽어보지 않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인터파크에서 e-book으로 구매해서 완독했다.

결론은 이 소설은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로티시즘은 더더욱 아니다.

이 소설은 70대 스승과 50대 제자의 애증의 관계를 10대 소녀를 매개체로 풀어낸 소설이다.

소설의 관계에서 주가되어야 하는 부분은 이적요과 은교가 아닌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라는 것이다.

만약 영화가 은교라는 여주인공의 육감적인 매력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면 난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시성'이라 추앙받은 위대한 시인이 사후에 남긴 노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문장에서 자신이 아끼던 제자를 살해했다고 밝히면서 그 배경에 한 소녀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모든 궁금증이 발생한다. 왜 시인은 자신이 아끼던 제자를 죽여야 했는가?

두 사람의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으며 그들 사이에 있던 10대 소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은교라는 이름의 그 소녀가 대체 그 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당연한 궁금증들.

그리고 시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서지우의 비밀노트가 드러나면서 사건의 진실은 더욱 궁금해진다.

작가는 그 둘 사이의 일들을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일차원적인 욕망에 날선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또한 존경과 신뢰가 미운과 증오와 분노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관계라는 것의 허무함을 드러낸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내가 아끼는 아랫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가?

흔히들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신뢰라고 하는 것도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지 않았는가?

인간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절대'라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었을까?

다른 사람들고 그랬고 그들 스스로도 인정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신뢰가 은교를 통해 어이없이 무너진다.

나는 소설에서 은교에게 맞추고 있는 촛점을 최대한 분산시켜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에 시선을 두고 읽었다.

그렇게 읽어보니 이적요도 서지우도 참으로 불쌍한 세상을 살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은교는 더욱 불쌍해진다.

스승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에게 '사형'은 언도하고 그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사형'을 집행하며 스스로를 벌한다.

제자는 스승이 자신을 버렸음을 깨닫고 스스로 죽음의 형벌을 받으며 자신의 배반을 목숨으로 회개한다.

그들의 관계는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서로가 너무나 사랑했고 너무나 미워했던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70대 노인에게도 욕망이 있는가?는 또다른 질문이다.

인생의 황혼기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뛰게 만드는 설렘을 만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설렘을 자신의 욕망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나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 등의 문제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무릎쓰고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위대해도 탐욕덩어리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시인의 노트에서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상세하고 묘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시인이 소녀에게 품은 생각은 어리석다.

그러나 노트에서 보았듯이 그런 욕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서지우라는 제자였고 그 배경에는 그들의 애증이 있다.

노인의 욕망이란 재능이 없음에도 끈기 하나로 버티는 제자에 대한 안쓰러움이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된 결과이다.

결국 노인의 욕망이라는 관점으로 소설을 읽는다해도 결론은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에 더 방점이 찍힌다.

소설에어 은교가 말하는 '끼어들 수 없는' 관계가 이적요와 서지우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신뢰와 유대감이었을 것이다.

은교라는 목적물을 두고 다투는 수컷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지 못하는 불쌍한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시인의 노트와 서지우의 노트가 교차로 편집되고 중간 중간 은교의 이야기가 끼어드는 구성이 좋았다.

한 쪽의 시선이 아니라 이적요와 서지우 두 사람의 시선이 균등하게 분배되고 서로가 균형을 맞추면서 이야기가 탄탄해진다.

조금씩 조금씩 변해하는 인간의 심리와 감정의 변화에 대한 묘사가 치밀하고 캐릭터의 개성과 일관성이 매력적이다.

자극적인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남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로 읽혔다.

영화는 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읽지 않고 지나간다면 아쉬움이 크게 남을 소설이다. 추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느 강마을에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상처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강마을.

강 건너에는 조선시대 사원이 현대적인 거짓으로 복원되어 버티고 있고

그들이 사는 강마을의 정체도 드라마 촬영 후 버려진 세트장이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서로 보듬으며 치유하겨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어느날 그 마을에 '전국구 꽃미남 조직폭력배'들이 쳐들어 온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으나 이제 강마을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성석제의 소설은 [인간적이다] 하나만 읽었기에 작가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인간적이다]에서 받은 인상은 명성이 다소 과장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귀에 익었고 작가에 대한 찬사도 여러번 접했으나 내 느낌은 달랐다.

[인간적이다]는 소설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전혀 소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실망감이 성석제라는 작가에 대한 실망감으로 번져서 그의 소설을 선택하는데 고민했다.

이 소설은 신문에서도 평이 좋았고 인터넷 서점의 서평들도 호평일색이어서 선택했다.

결론은 여전히 난 그에 대한 평가에 다소간의 거품이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 자체만 두고 보았을 때 성석제라는 작가의 능력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서로 다른 상처로 아픈 가슴을 서로가 보듬으며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태어난 강마을 사람들.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느껴지기 보다는 스스로 세상을 버린 그들에게 강마을은 유토피아이다.

그들이 원하는 삶을 그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들만의 유토피아에 폭력이 침범한다.

예전의 그들이었다면 폭력이 무서워 도망가고 말았겠지만 이제 그들은 위풍당당하게 맞서 싸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버림받은 그들을 품어 준 새로운 가족을 위해.

강마을과 조폭의 싸움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른 반전을 보여주고 한바탕 야단법석을 치른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밀리는 집단이 강한 상대를 제압하는 전복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예견된 내용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난 그 안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본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서로가 보듬어주는 곳이 아니라 하나라도 배척해야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피부색이 다른다고 배척하고 아파트 평수가 다르다고 배척하고 자신과 다른다고 배척한다.

강마을 사람들의 상처는 그 크기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 모두가 지금의 사회에서 받는 상처들이다.

한편 꽃미남 조폭들이 상징하는 것은 표리부동의 폭력성을 가진 권력의 속성이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나는 니들과 다르다'는 특권의식과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들이 행사하는 무자비한 폭력앞에 상처받은 이들의 저항의 모습이 한바탕 소동으로 그려진다.

자칫 심각할 수도 있는 이야기는 전혀 심각하지 않게 만들어 옛이야기 하듯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

세상의 찬사가 가리키는 것은 성석제라는 작가의 그런 능력의 탁월함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불만인 것은 소설을 읽는 내낸 단 한번도 폭소를 터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문이나 인터넷 서평에서는 시종일관 폭소를 참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웃기기 힘든 인간도 아니다. 난 여러 소설을 배꼽빠지게 읽은 기억이 넘쳐나는 사람이다.

박상 작가의 [말이 되냐?] 같은 경우는 눈물을 빼고 웃었고 난 절대로 웃음에 인색하지 않다.

그런데 이 소설은 결코 폭소를 유발하지 않는다. 지속적인 웃음을 유발하기는 하지만 소소할 뿐이다.

작가의 유머감각과 위트가 뛰어나고 문장 하나 하나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유머감각이 탁월하지만

상황이 주는 폭소나 문장이 주는 폭소는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마케팅을 위한 과장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유머감각과 맞지 않는 괴리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광고만큼 대단하지는 않다.

 

조근조근 전하는 옛이야기 같은 소설속에 결코 쉽지 않은 주제의식을 담은 소설이다.

이야기의 강렬함 보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여운이 오랫동안 남는 따스한 웃음이 있는 소설이다. 추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