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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난 거부감을 가졌다.
내가 가진 윤리관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였기 때문이다.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애로티시즘은 아직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윤리의 문제이다.
영화가 개봉되면서 주연 여배우와 그녀의 베드신이 화제가 되는 것을 보며 또다시 불쾌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과연 인간의 일차원적인 욕망에 대한 묘사가 이 소설의 매력일까?
직접 읽어보지 않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인터파크에서 e-book으로 구매해서 완독했다.
결론은 이 소설은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로티시즘은 더더욱 아니다.
이 소설은 70대 스승과 50대 제자의 애증의 관계를 10대 소녀를 매개체로 풀어낸 소설이다.
소설의 관계에서 주가되어야 하는 부분은 이적요과 은교가 아닌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라는 것이다.
만약 영화가 은교라는 여주인공의 육감적인 매력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면 난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시성'이라 추앙받은 위대한 시인이 사후에 남긴 노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문장에서 자신이 아끼던 제자를 살해했다고 밝히면서 그 배경에 한 소녀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모든 궁금증이 발생한다. 왜 시인은 자신이 아끼던 제자를 죽여야 했는가?
두 사람의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으며 그들 사이에 있던 10대 소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은교라는 이름의 그 소녀가 대체 그 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당연한 궁금증들.
그리고 시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서지우의 비밀노트가 드러나면서 사건의 진실은 더욱 궁금해진다.
작가는 그 둘 사이의 일들을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일차원적인 욕망에 날선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또한 존경과 신뢰가 미운과 증오와 분노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관계라는 것의 허무함을 드러낸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내가 아끼는 아랫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가?
흔히들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신뢰라고 하는 것도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지 않았는가?
인간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절대'라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었을까?
다른 사람들고 그랬고 그들 스스로도 인정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신뢰가 은교를 통해 어이없이 무너진다.
나는 소설에서 은교에게 맞추고 있는 촛점을 최대한 분산시켜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에 시선을 두고 읽었다.
그렇게 읽어보니 이적요도 서지우도 참으로 불쌍한 세상을 살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은교는 더욱 불쌍해진다.
스승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에게 '사형'은 언도하고 그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사형'을 집행하며 스스로를 벌한다.
제자는 스승이 자신을 버렸음을 깨닫고 스스로 죽음의 형벌을 받으며 자신의 배반을 목숨으로 회개한다.
그들의 관계는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서로가 너무나 사랑했고 너무나 미워했던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70대 노인에게도 욕망이 있는가?는 또다른 질문이다.
인생의 황혼기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뛰게 만드는 설렘을 만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설렘을 자신의 욕망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나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 등의 문제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무릎쓰고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위대해도 탐욕덩어리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시인의 노트에서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상세하고 묘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시인이 소녀에게 품은 생각은 어리석다.
그러나 노트에서 보았듯이 그런 욕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서지우라는 제자였고 그 배경에는 그들의 애증이 있다.
노인의 욕망이란 재능이 없음에도 끈기 하나로 버티는 제자에 대한 안쓰러움이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된 결과이다.
결국 노인의 욕망이라는 관점으로 소설을 읽는다해도 결론은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에 더 방점이 찍힌다.
소설에어 은교가 말하는 '끼어들 수 없는' 관계가 이적요와 서지우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신뢰와 유대감이었을 것이다.
은교라는 목적물을 두고 다투는 수컷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지 못하는 불쌍한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시인의 노트와 서지우의 노트가 교차로 편집되고 중간 중간 은교의 이야기가 끼어드는 구성이 좋았다.
한 쪽의 시선이 아니라 이적요와 서지우 두 사람의 시선이 균등하게 분배되고 서로가 균형을 맞추면서 이야기가 탄탄해진다.
조금씩 조금씩 변해하는 인간의 심리와 감정의 변화에 대한 묘사가 치밀하고 캐릭터의 개성과 일관성이 매력적이다.
자극적인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남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로 읽혔다.
영화는 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읽지 않고 지나간다면 아쉬움이 크게 남을 소설이다.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