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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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Mythago Wood』 by Robert Holdstock

-당신과 나의 관계 속에 형성된 미로,


로버트 홀드스톡의 이 소설『미사고의 숲』은 독특한 작품이다. 경계문학, 환상문학 등으로 분류되며 그 쪽에선 확실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는데 ‘경계문학’ 이라는 말이 낯설다. 경계문학? 뭐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면 ‘경계문학’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생긴다. 아니, 확실한 인식이 생기는데 뭐라 정의할 수는 없다고? 장난하냐? 에휴, 정말 그렇다니까. 읽고 나면 내 말이 무엇인지 알 거라고.

미사고mythago는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가 임의로 만든 말인데 신화myth와 심상imago를 결합한 말이라고 한다. 신화와 심상을 결합해서 만든 말이라, 제목에서부터 벌써 판타지의 기운이 풍긴다. 원래 판타지라는 것이(물론 톨킨 류에 한해서지만)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장르가 아니던가. 난 책을 읽기 전 먼저, 작품해설을 대충 훑는 편이다. 이렇게 제목에 대한 유래도 알 수 있고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고 읽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좀 도움이 된다. 읽으면서 해설을 다 까먹더라도 말이다;; 신화에 대해 아는 것은 없으나 관심은 좀 있는 편이라 책의 첫 장을 넘기기 전부터 기대 만빵이다-

작품은 헉슬리 가(家)의 세 남자가 사랑하고 소유하길 원했던 한 여성과 그 여성이 생성(?)된 숲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실세계에선 걸어서 한 시간이면 가장자리를 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라이호프 숲, 그러나 이 숲은 이상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숲의 중심부엔 다다를 수 없다. 게다가 일단 숲 속으로 진입하면 시간과 공간이 얽혀서 미로가 생성된다. 그리고 미로를 헤매다 보면 종종 초(超)현실적인 생물 혹은 현상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고 도우미가 되기도 한다. 이것들 중의 하나가 귀네스라는 여성이다. 고대 언어로 이야기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성. 헉슬리 가의 세 남자는 이 여성과 라이호프 숲이 뿜어내는 신비한 마력에 점차 이성을 잃게 되고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이런 일들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형, 화자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게 의외로 간단한 편이다. 그런데 이 짧은 줄거리로 어떻게 장편소설이 나왔을까- 그것은 바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방대한 신화의 모티브들이다. 차고 음습한 기운을 풍기는 북유럽 켈트신화를 기본으로 지중해의 그리스•로마신화, 이집트 신화 등 다양한 신화들이 한데 어우러져 신비롭고 몽환적이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조화롭게 만들어 낸다. 그리고 신화에 대한 해설이 작품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나같이 신화에 무지하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작품의 근간(根幹)이 되는 이것이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너무 많은 신화가 등장해 머릿속이 쉴새 없이 바쁘고 자칫 지루하게 읽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쫀득쫀득한 문장과 구성으로 연결하여 신화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책 즐기는 사람이라면 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방대한 신화를 연결하고 관통하는 느슨한 내러티브로 이 작품처럼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소설을 구성하는 다른 중요한 요소는 바로, 관계와 경계에 대한 집요한 탐구이다. 가문의 세 남성에 대한 관계, 숲과 외부의 관계 그리고 그들 관계에 형성된 경계가 이야기 속에 녹아있다. 그들의 1차적인 관계는 부자(父子)와 형제, 자연과 문명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 동지 그리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으로 변화한다. 이렇게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된 미묘한 경계는 바로 너와 나, 즉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실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들의 관계를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이 더 매력적이지 않나 싶다.

지금까지 신화네 경계네 뭐네 하면서 썼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역시 난 재미없는 책은 읽지 않는다, 랑랑. 머릿속에 꾹꾹 자국을 내어 적어 놨다가 눈에 띄면 까먹지 말고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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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9-0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경계문학이라는 영역에 들어가군요. 현실과 상상 혹은 신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라는 의미일까요. 나와 너의 경계를 아우른다는 의미일까요.. 그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일지도.. 아주 인상적이었던, 마음에 들었던 책이었어요..

푸훗 2006-09-1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해설에 보니까 경계문학이 어쩌고 이러드라구요. 저 또한 인상적이고 맘에 드는 책이랍니다. ^_^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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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The  fifth  child』 by  Doris  Lessing

-씨앗은 자라나 열매를 맺지,


현대 영국 문학계의 가장 중심에 서 있다는 작가, 도리스 레싱. 모든 소설 형식을 아우르며 20세기 주요한 지적 문제들을 포함하는 작품을 쓴다고 한다. 책 표지의 설명을 읽어 보면 굉장한 작가 같은데 이름도 몰랐고 작품은 더더욱 몰랐다. 무식은 죄가 아니라구. 그런데도 이 작가의 작품을 구입한 이유는 제목에서 풍기는 묘한 기운 때문이었다.『다섯째 아이』, 불길한 예감을 조성하는 이 짧은 제목은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풀어낼 것만 같았다.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모범 청춘들이다. 마약이나 문란한 혼전 성관계 따위는 그들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절차를 밟어 가정을 이룬다. 아이는 많을수록 좋아, 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커다란 저택을 구입하면서부터 이 가정의 역사는 시작된다. 데이비드의 능력만으로는 유지하기도 힘들법한 저택, 그러나 그들은 마냥 즐겁다. 저택이 헤리엇과 데이비드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꿈꾸던 생활, 행복했다. 그리고 이 젊은 부부가 가족을 생산하면서 균열, 아니 불행은 시작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젊은 부부의 삶이 ‘보여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수에 넘치는 저택을 구입한 이유가 ‘단지’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집을 원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부활절 휴가, 여름 휴가, 크리스마스 휴가 등 명절에 온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왁자지껄하게 모여 과장된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허리가 휠 정도로 많은 비용이 들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개의치 않는다. 과장된 일상에서 이들은 100점짜리 가정을 타인-가족일지라도-에게 보여주며 행복해한다. 이렇게 100점짜리 가정이 유지되고 보여지면서 그들은 타인에게 롤모델이 되기도 한다. 행복하다. 내가 원한 삶은 이런 것이야, 이런 것.

그러나 표준의 잣대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파괴되기 시작한다. 도리스 레싱은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로 이 가정의 균열(다섯째 아이의 탄생)로 야기되는 불행을 보여주고 있다.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가 일차적으로 보여주는 균열의 씨앗은 비현실적이다. 자궁 속에서 어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다섯째 아이, 비정상적인 크기로 조산을 감행할 수 밖에 없던 다섯째 아이, 태어나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어미와 의사를 노려보던 다섯째 아이. 다섯째 아이는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가정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비와 어미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아니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왜? 그들은 표준이거든, 표준.

불행의 씨앗인 다섯째 아이가 가져오는 균열은 처음엔 미미했다. 헤리엇이 웃지 않을 뿐이었다. 씨앗은 양분을 섭취하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만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법이다. 다섯째 아이는 헤리엇의 웃음을 빼앗으면서부터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어든 자라고 자라면 양분이 더 필요한 법. 헤리엇의 웃음을 시작으로 데이비드의 유머와 아이들의 조잘댐, 그리고 가정의 행복과 더 나아가선 가족의 행복까지 섭취함으로써 마침낸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가족의 허상과 붕괴였다. 헤리엇이 웃지 않음으로써 생기던 미세한 균열이 보여주기에 급급했던 롤모델의 실체를 드러내고 파괴한 것이다.

사실적인 문체가 과장된 일상을 천천히 조롱하면서 가족을 파괴하는 과정은 다섯째 아이의 그 비이성적인 행동들보다 더 잔인하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혼란스러운 롤모델은 도리스 레싱의 펜 끝에서 느리고 처참하게 해체된다. 뭔가가 도리스 레싱의 유년기에 참혹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공산당에 참여했을 때 공산당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허상을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작은 가정을 시작으로 가족이 붕괴되는 일상을 그리며 자신이 느꼈던 허상에게 복수의 펀치를 날렸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뭐 다르게 말하자면 삽질이지, 깔깔.

서서히 조여오는 불행의 그림자를 ‘관전’하는 것은 이 작품의 장점이다. 몰입을 방해하며 ‘관찰’만을 유도하는 작가의 지시에 따라 소설을 읽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경험이다. 생각해보면 작가가 관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극도로 몰입해서 자신이 믿었던 이데올로기가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니까. 어쨌든 난 도리스 레싱이 궁금해졌다. 보관함에 들어가는 작가들이 자꾸 늘어난다.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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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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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Péplum』by Amélie Nothomb

당신의 허영심을 보려던게 아니라구


아멜리 노통, 반짝반짝한 글쓰기로 프랑스 문단을 휩쓸고 있는 여성이라고 한다.『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소설로 비교적 어린 나이에 등단해 젊은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독자들의 지지 외에도 여러 문학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 받았다. 친구가 상당히 편애하기도 하는 작가라 그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이 내가 이 유명한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시간의 옷』이라, 제목은 그럴싸하군.

이 작품에서는 줄거리를 논한다는 것은『설국』에서보다 더 부질없는 일이다. 20세기의 한 작가가 26세기로 납치되어 그 세기의 기득권 층인 한 사람과 반나절 정도 대화(라기 보단 다툼이라고 해야 할지도)를 나누다가 다시 20세기로 돌아온다. 이것이 끝이다. 끝. 최고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당연히 이들이 나누는 대화이다. 노통의 다른 작품들처럼.

많은 평론에서 이 대화들을 거의 찬양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했다. 전례없는 기발한 방식이라는 둥, 잔인함과 유머 그리고 철학이 녹아있는 지적인 대화라는 둥 그래서 나도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만큼 책이 착착 손에 붙는다던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화체 소설은 그다지 기발한 방식이 아니다. 이미 마누엘 푸익이『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대화체 소설의 정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사실 내가 읽었던 대화체 소설은 이 작품이 전부이지만 감히 정점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지적인 대화라기 보단 지적 허영이 느껴지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의 지적 능력이 이 지적인 대화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해서 느꼈을 감정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에서 남녀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보여주었다. 리듬감 있는 대화는 관객에게도 주인공들의 감정을 전달하고, 대화를 엿듣는다는 형식은 은밀한 관음증을 선사했다. 하지만 시간의 옷에서의 대화는 남녀의 대화가 얼마나 지루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선 과한 리듬은 대화가 너무 통통통 튀어서 독자에게 불편한 심기를 제공한다.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해야 읽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대화에서 갑자기 엉뚱하게 튀면 그것은 신선한 재미를 줄 수 있다. 물론 이런 엉뚱함은 가끔씩만 출현해야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예 예측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대화라면 산만해질 수 있다. 이리저리 책장에서 튀는 대사들이 금방이라도 책장 밖으로 튀어나와 나에게 꾸짖을 것 같다. 우리 대화 맘에 안 드니? 이렇게 예측불허의 대화이니 당연히 리듬감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리듬감이 전달하던 장점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대화를 엿듣는다는 형식이 주는 은밀한 관음증은 이렇게 불편한 감정을 전달하는 상황에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지적 유희가 한껏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래 니들 잘났다, 라는 감정을 느끼면 그것은 관음증이라기 보단 시기에 가까운 것 아니겠는가. 흥.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잔인함과 유머, 그리고 철학이 녹아있다는 것에는 나도 공감한다. 그러나 대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잔인함과 냉소가 차갑게만 느껴지고 뭔가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유머라는 것은 유연한 상황에서 발생될 때 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법이다. 마지막 철학, 철학은 강요하면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 된다. 플라톤의『향연-사랑에 대하여』 에서처럼 대화 속에 은근히 녹아 있는 철학은 유익하고 즐겁지만 이 작품에서처럼 대놓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잘난 척이 되고 재미없단 말이다.

지적 능력을 드러내는 방식에서도 그렇다. 보르헤스도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드러냈지만 거부감이 일지는 않았다. 유연함에서 오는 유머가 더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곁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움을 준다. 몰랐던, 이해하지 못했던 장치들이 새록새록 다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통은 그렇지 못하다. 그 잘난 능력을 백화점처럼 다양하게 늘어놓지만 그것들이 없어도 대화는 진행될 수 있다. 그것들이 빠진다 한들 작품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통이 드러내는 지적 능력이 허영심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듯하다.

이렇게 느끼고도 노통의 작품을 한 권 구입했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살인자의 건강법』이다. 대단한 평가를 받음에 있어서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노통이 너무 잘나서 내가 비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지만 결과는 OTL. 한 번 내린 평가는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뭐, 내가 노통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내린다고 해도 노통은 모를 것이고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할 것이며 그의 판매 부수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노통을 신나게 씹은 것이긴 하지만. 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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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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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박민규,『카스테라』

-안녕, 나하고 놀자.



유쾌하고 예리한 칼날의 그, 박민규가 돌아왔다. 데뷔한지 만 3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장편소설 두 권을 선보이더니-유수의 문학상들까지 거머쥐었다- 소설집까지 한 권 들고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왕성한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그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서 그를 조종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집『카스테라』에선 화자인 ‘나’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이야기들이 있다. 배추흰나비가 되려고 겨우내 번데기 안에서 흰 날개를 구겨 접고 기다리는 벌레는 아니더라도 박민규 소설 속의 ‘나’들은 충분히 다른 세상을 꿈꾼다.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공무원이라는 틀에 자신을 구겨 넣기 위해 공부를 한다거나(「아, 하세요 펠리컨」)-그러나 결국 다른 꿈과 세상을 향해 나간 사장의 유원지를 떠맡고-, 9호 구름을 타고 도착한 개복치여관에서 링고 스타를 만나기도 하고(「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대왕오징어와 외계생물체들의 기습을 염려하여 친구들과 대비책을 갈구하기도 한다(「대왕오징어의 습격」).

얼핏 이야기만 들으면 공상과학만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구름을 타고 미국까지 여행을 한다거나 오리배가 한 가족의 기지가 되어 여기저기 날아다니기도 하며, 미확인비행물체가 등장해 농가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은 우리가 보았던 만화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전작들인 두 편의 장편소설에서도 박민규만의 만화적 상상력을 보여주었지만 이 소설집에서의 상상력은 더 과장되었고 우스꽝스러우며 슬프다.

소설집의 화자이자 주인공들은 나름 평범한 삶을 꿈꾸며 살고 있지만 그 평범함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선 도시락을 들고 찾아간 사무실에서 아버지의 ‘갸날픈’ 표정을 본 후로 원래 ‘좀 노는 축’에 속하던 화자는 말이 없어지고 방학 동안이면 미친 듯이 알바를 해대며 살아가는 청소년이 된다. 후에 집을 나가 기린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마주하고서도 놀라거나 원망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설득한다, 그저. 모든 어려움이 다 해결되었으니 이제 방황 그만하고 돌아오세요, 라는 식으로. 현실에서 도태되어 기린이 된 아버지를 다시 현실로 끌어들이려 노력하는 화자와 기린의 대화에선 이상하게도 상황에서 느껴질법한 판타지가 거세되어 있다. 기린과 대화라는 판타지한 설정의 배경이 지독하게 현실적인 지하철 승강장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으면서 고골리의 단편소설인「코」가 묘하게 겹쳐졌다. 공무원인 주인공의 코가 실종(?)되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공황과 혼란, 그리고 일상성에 대한 블랙코미디인「코」또한 판타지한 이야기이지만 세세한 상황묘사와 배경들이 현실적이다. 그래서 읽으면서 이 단편의 또 다른 주인공인 ‘코’의 행보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더 이상 ‘코’는 판타지의 산물이 아닌, 주인공이 현실에서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자아가 되어버린 셈이다.

어쩌면「코」와 유사하게「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의 기린은 주인공이 먼 미래에 보게 될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니었을까? 괴롭고 힘든 현실에서 탈출한 채 아버지처럼 기린으로 살아갈 자신, 슬픈 이야기다.

SF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확인비행물체와 비만이 되어버린 아내, 학원을 세 곳이나 돌고 집에 돌아와야 하는 아홉살난 자식 그리고 아내가 비만이 되기 전 사귀던 선배의 이야기인「코리언 스탠더즈」도 슬픈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빼빼 마른 여자와 결혼해서 그녀를 비만으로 만들어 함께 살고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수도권 신도시에 아파트를 마련해 자신을 ‘코리언 스탠더즈’라고 지칭하며 헤이즐넛을 즐기는 남자이다. 살이 찐 부인과 재롱 떨 시간도 없이 학원과외에 지쳐 집에 돌아오곤 하는 딸자식과 함께 여름 휴가를 계획하지만 아내의 전 애인이자 자신의 사수였던 선배의 전화 한 통에 ‘코리언 스탠더즈’를 잠시 이탈한다. 이유는 선배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자책감을 벗어나기 위해서지만 말이다.

원망하는 아내와 자식을 떼어놓고 도착한 선배의 ‘농촌’은 그야말로 농촌이었다. T V에서나 보았던 자연속에서 주인공은 나름의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감상도 잠시, 선배의 말들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외계인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말은 목격하기 전까진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UFO가 나타나 자행하는 일들을 목격하자 그 곳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선배와의 토론은 예전을 생각나게 할만큼 신선한 것이지만 주인공에게는 ‘코리언 스탠더즈’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선배의 요구를 들어줄 만큼의 힘과 연줄이 없는 평범한 사회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주인공과 선배는 외계인들이 남긴 크롭 서클을 발견하는데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이다. 대한민국의 표준을 뜻하는 KS마크의 거대함 앞에서 선배는 ‘이놈들… 우릴 너무 잘 알고 있구나’라는 말을 남긴다. ‘해는 떠오를 만큼 높이 떠버린 느낌’이었지만 거대한 표준마크 앞에서 주인공은, 선배가 태우는 담배연기에 실려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을 것이다. 외계인도 인정한 ‘코리언 스탠더즈’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길인지 선배의 여자였던 아내와의 행복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내가 이 소설을 읽고 크롭 서클이 남겨진 선배의 옥수수밭을 걱정한 것이다. 이거 다 뻥이지롱- 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소설을 읽고 나서 이렇게 현실적인 사안을 걱정했다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런것이 박민규 소설의 힘인 것 같다. 전생에 훌리건이었을 법한 냉장고에 부시와 중국까지 집어넣고 나서 마지막에 속살이 포실한 카스테라를 선사받는 이야기(「카스테라」)를 읽고 나면 중국에게 부시가 뼈와 살이 녹도록 냉장고안에서 구타당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박민규의 소설. 한없이 유쾌하고 가볍게 보이지만 헤집고 들어가면 번득이는 예리한 칼날이 요리하고 있는, 현실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박민규의 능력이다.

동네 후미진 곳에 위치한 ‘갑을고시원’이라는 곳에서 ‘헤드락’을 일삼으며 ‘너구리’를 친구로 삼아 글을 쓰고 있을 법한 박민규, 우연히라도 그를 마주치면 그가 ‘야쿠르트’를 하나 건내며 이렇게 이야기 할 것 같다. “안녕, 나하고 놀자.”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저씨 상상력을 좀 나누어 주세요, 그럼 같이 놀께요.” 박민규가 응할까? 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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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유키 -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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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도모유키』, 조두진

-일본인이 기록한 자국의 전쟁


임 진왜란 하면 솔직히 이•순•신 이라는 세 글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두 나라가 바다에서 육지에서 잔혹하고 치열하게 싸웠을 터인데 이상하게 내 머릿속의 임진왜란은 전쟁의 참극보다는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만 남아있다. 전쟁 속에서 일어나는 붉은 참극과 백성들의 고통, 임금의 노력 같은 것들이 거세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대단한 업적들 때문에. 이런 나에게 아주 흥미로운 책이 한 권 눈에 띄었다. <제8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인『도모유키』다. 일본인의 시각으로 쓰여진 임진왜란이란다. 오오, 신선한걸. 게다가 박민규의『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바로 <한겨레 문학상의 수상작>이 아닌가. 문학상 수장작들을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보적인 매체가 선정하는 작품들이니 관심이 간다.

일본군들을 징집하면서 시작되는 소설이 낯설게 다가왔다. 징집되는 아들을 바라보는 늙은 부모들의 시선이 참 새로웠다. 전혀 새로울 게 없는데도 말이다. 일본의 청년들도 징집되는 것을 두려워했을 터이고 전쟁으로 인한 기아와 혼란이 일본에도 당연히 존재했을 텐데,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괜히 혼자 낯뜨거웠다. 조선이 침략당하고 조선의 병사와 백성들만이 희생된 전쟁이라고 배워온 주입식 교육 때문이야, 라고 혼자 위로했다(너무 비겁한가).

소설은 철저히 일본인의 시선이다. 전장에서 동생을 닮은 조선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된 도모유키 장군, 가늘게 가늘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는 무사들, 어쩌다가 징집당한 왜소한 도네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 소설엔 영웅이 없다. 전쟁을 다룬 소설에 영웅이 없고 패배자만 남았다는 것도 새로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도모유키가 조선여인을 아끼고 사랑하다 종국엔 그로 인해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 죽고 마는 부분은 멜로드라마를 닮았다고나 할까. 새로운 이야기에 갑자기 너무 상투적인 설정이 튀어나와 무언가 어색해지는 부분이었다.

소설은 시종일관 건조하고 명료한 문체로 전쟁을 그려낸다. 수식어 없이 간결한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두진의 문체는 뭔가 다른 기운이 풍긴다. 건조하고 간결한 틀을 뒤집어 썼지만 그 속에 숨어 ‘전쟁에 승리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아, 모두 패배자일 뿐이라고’ 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져서일까. 여리고 약한 여자애가 괜히 센척하면서 시치미 떼는 것이 생각난 것은 너무 오버인가. -_-

전쟁은 침략한 쪽이나 침략당한 쪽이나 모두 희생자이고 패배자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제서라도 알게 된 것은 이 소설,『도모유키』를 읽고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하지만 안타까웠던 점은 숨은 시선이 종종 노골적으로 들어나 더 이상 숨은 시선으로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도모유키와 조선여인의 스토리 부분이 마치 TV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상투적이었던 것.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종국엔 지지부진하게 끝을 맺었던 점 등이 아쉬웠다. 눈에 띄는 특징이 없다는 것도 단점이었다.

뭐, 언젠가는 내 맘에 쏙 드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왜 그래야 하는데, 너 정말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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