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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Review /『Péplum』by Amélie Nothomb
당신의 허영심을 보려던게 아니라구
아멜리 노통, 반짝반짝한 글쓰기로 프랑스 문단을 휩쓸고 있는 여성이라고 한다.『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소설로 비교적 어린 나이에 등단해 젊은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독자들의 지지 외에도 여러 문학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 받았다. 친구가 상당히 편애하기도 하는 작가라 그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이 내가 이 유명한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시간의 옷』이라, 제목은 그럴싸하군.
이 작품에서는 줄거리를 논한다는 것은『설국』에서보다 더 부질없는 일이다. 20세기의 한 작가가 26세기로 납치되어 그 세기의 기득권 층인 한 사람과 반나절 정도 대화(라기 보단 다툼이라고 해야 할지도)를 나누다가 다시 20세기로 돌아온다. 이것이 끝이다. 끝. 최고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당연히 이들이 나누는 대화이다. 노통의 다른 작품들처럼.
많은 평론에서 이 대화들을 거의 찬양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했다. 전례없는 기발한 방식이라는 둥, 잔인함과 유머 그리고 철학이 녹아있는 지적인 대화라는 둥 그래서 나도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만큼 책이 착착 손에 붙는다던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화체 소설은 그다지 기발한 방식이 아니다. 이미 마누엘 푸익이『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대화체 소설의 정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사실 내가 읽었던 대화체 소설은 이 작품이 전부이지만 감히 정점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지적인 대화라기 보단 지적 허영이 느껴지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의 지적 능력이 이 지적인 대화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해서 느꼈을 감정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에서 남녀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보여주었다. 리듬감 있는 대화는 관객에게도 주인공들의 감정을 전달하고, 대화를 엿듣는다는 형식은 은밀한 관음증을 선사했다. 하지만 시간의 옷에서의 대화는 남녀의 대화가 얼마나 지루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선 과한 리듬은 대화가 너무 통통통 튀어서 독자에게 불편한 심기를 제공한다.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해야 읽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대화에서 갑자기 엉뚱하게 튀면 그것은 신선한 재미를 줄 수 있다. 물론 이런 엉뚱함은 가끔씩만 출현해야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예 예측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대화라면 산만해질 수 있다. 이리저리 책장에서 튀는 대사들이 금방이라도 책장 밖으로 튀어나와 나에게 꾸짖을 것 같다. 우리 대화 맘에 안 드니? 이렇게 예측불허의 대화이니 당연히 리듬감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리듬감이 전달하던 장점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대화를 엿듣는다는 형식이 주는 은밀한 관음증은 이렇게 불편한 감정을 전달하는 상황에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지적 유희가 한껏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래 니들 잘났다, 라는 감정을 느끼면 그것은 관음증이라기 보단 시기에 가까운 것 아니겠는가. 흥.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잔인함과 유머, 그리고 철학이 녹아있다는 것에는 나도 공감한다. 그러나 대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잔인함과 냉소가 차갑게만 느껴지고 뭔가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유머라는 것은 유연한 상황에서 발생될 때 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법이다. 마지막 철학, 철학은 강요하면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 된다. 플라톤의『향연-사랑에 대하여』 에서처럼 대화 속에 은근히 녹아 있는 철학은 유익하고 즐겁지만 이 작품에서처럼 대놓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잘난 척이 되고 재미없단 말이다.
지적 능력을 드러내는 방식에서도 그렇다. 보르헤스도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드러냈지만 거부감이 일지는 않았다. 유연함에서 오는 유머가 더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곁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움을 준다. 몰랐던, 이해하지 못했던 장치들이 새록새록 다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통은 그렇지 못하다. 그 잘난 능력을 백화점처럼 다양하게 늘어놓지만 그것들이 없어도 대화는 진행될 수 있다. 그것들이 빠진다 한들 작품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통이 드러내는 지적 능력이 허영심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듯하다.
이렇게 느끼고도 노통의 작품을 한 권 구입했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살인자의 건강법』이다. 대단한 평가를 받음에 있어서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노통이 너무 잘나서 내가 비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지만 결과는 OTL. 한 번 내린 평가는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뭐, 내가 노통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내린다고 해도 노통은 모를 것이고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할 것이며 그의 판매 부수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노통을 신나게 씹은 것이긴 하지만. 깔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