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품절


아침에 눈을 뜨면 대나무 사이사이로 햇빛이 부챗살처럼 틈입해 들어와 침대를 그물처럼 덮습니다. 그 그물에 갇혀 꿈틀거리며 한달을 열대에서 보낸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절망이란 빛조차도 그물이 된다는 걸 말입니다.
빛의 그물에 갇혀 누군가 정원을 지나는 소리를 듣습니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열대의 밝은 햇빛. 문을 열면 바로 내다보이는 논바닥의 오리떼. 허리 굽은 노인네가 일 년 내내 소를 끌고 오리떼를 쫓으며 논바닥을 갈고 있습니다. 삶은 한편 그러한 것.--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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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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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끈질긴 운명에 쫓기던 비지따시옹은 이 비참한 질병이 자기를 어디까지라도 쫓아다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대로 눌러 있기로 했다. 세상의 끝까지 도망을 온 지금이니, 다른 곳으로 더 달아날 수도 없었다. 비지따시옹이 왜 그렇게 놀라고 겁에 질렸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잠이 적어지면 더 좋지 뭘 그래.」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가 유쾌하게 말했다.「깨어있는 시간이 많으면 인생이 그만큼 더 길어질 테니까.」그러나 비지따시옹은 불면의 고통이 잠을 못 이루거나 육체적으로 피로가 오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력을 자꾸 상실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을 못 자고 깨어서 여러 가지 공상에 잠기다 보면 어릴적 추억을 뒤적일 시간이 줄어서, 과거가 자꾸만 사라진다는 얘기였다. 그러면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잊게 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잊게 되어서 결국은 과거를 망각한 백치상태가 된다고 했다. 숨이 넘어갈 듯이 마구 웃어젖히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그것을 원주민들이 상상해낸 여러 가지 미신적인 병의 하나라고 넘겨버렸다.-56쪽

몇 주일이 지나서, 비지따시옹의 공포가 많이 가신 어느날 밤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는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아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우르슬라도 잠이 깨어서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푸르덴치오 아귈라 생각을 또 하고 있었어.」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잠시 동안 잠을 자기 못했지만, 이튿날 아침에는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그 일을 곧 잊고 말았다. 이튿날 점심때 그 얘기를 듣고 아우렐리아노는 좀 놀란 표정으로, 자기도 우르슬라에게 생일선물로 줄 브로치를 만드느라고 실험실에서 꼬박 밤을 새웠지만,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셋째날 그들은 더욱 놀라고 말았으니, 밤이 되어도 아무도 졸리운 사람이 없었으며, 벌써 50시간째 아무도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아이들도 모두 깨어 있어요.」원주민 여자는 숙명적인 사태가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면서 말했다.「이 질병은 한번 집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아무도 내쫓을 수가 없어요.」
-56~57쪽

그들은 정말로 불면증이라는 병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약초의 영원한 효과에 대해 어려서부터 배워 알고 있던 우르슬리는 투구꽃으로 술을 담가서 돌아가며 먹었지만, 그래도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일어나서 돌아다니며 꿈을 꾸었다. 그렇게 흔미한 환각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그들은 선 채로 꿈을 꾸었을 뿐 아니라, 남들이 꾸는 꿈도 잘 볼 수가 있었다. 자기의 꿈에 보이는 사람들도 실물처럼 나타나고 남의 꿈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기 때문에 집안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했다. 구석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레베카는 흰 셔츠에 황금단추를 달고 자기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꽃다발을 가져다주는 꿈을 꾸었다. 그 남자와 함께 손이 가냘픈 여자가 따라와서는 장미를 한 송이 뽑아 레베카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우르슬라는 레베카의 꿈에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레베카의 부모라고 믿었는데, 그들을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전에 어디서 본 기억이 전혀 없어 생소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집에서 만든 동물과자는 시내에서 잘 팔려나갔다. 아이들이나 어른 가릴 것 없이 모두들 달콤하고 푸른 불면증 수탉과, 앙증맞은 핑크빛 불면증 붕어와 보드랍고 노란 불면증 망아지를 마구 먹어댔고, 그러다 보니 월요일 새벽에는 온 동네사람들이 모두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57쪽

처음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할 일은 엄청나게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고민하던 마콘도 사람들은 오히려 잠이 안 와서 잘된 일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들은 잠을 안 자고 어찌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새벽 세시가 되면 할 일이 없어서 팔짱을 끼고 시계의 왈츠소리만 듣고 앉아 있게 되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꿈을 꾸고 싶어 잠을 자려는 사람들이 피곤해지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 그들은 함께 모여앉아서 끝이 없는 지루한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똑 같은 농담을 몇 시간씩 되풀이하고,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자꾸만 계속했다. 얘기가 끝나면 얘기하던 사람이 그 얘기를 또 듣겠느냐고 묻고, 그러면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 얘기를 또 해달라고 하고, 그러면 같은 얘기를 또 하고…… 혹시 누가 그 얘기를 듣기 싫다 하더라 그는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얘기를 또 해주랴고 물었을 때 아무 대꾸가 없어도 또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그 얘기가 자꾸만 계속되는 동안에는 아무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 새도록 똑 같은 얘기는 끝없이 되풀이 되었다.-57~58쪽

불면증이라는 병이 마을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마을의 가장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불면증이 어떤 병인지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 병이 늪지대의 다른 마을로 전염이 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려고 오랫동안 의논을 했다. 그들은 아랍사람들에게 야자열매를 주고 얻은 염소의 목에 매달았던 종들을 모두 떼어내어서 마을 어귀에 갖다두고, 불면증에 걸리지 않은 타향 사람이 억지로 마을로 들어오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종을 울리면서 다니게 했다. 그래서 마콘도 거리에서 종을 울리며 타향 사람이 지나가면 병든 마을 사람들은 병에 아직 안 걸린 사람을 가려낼 수 있었다. 종을 울리며 다니는 사람들은 마을에서 아무것도 먹거나 마실 수가 없었으니, 그것은 불면증이라는 병이 음식을 통해서 입으로 전염이 되기 때문이었다. 마콘도의 모든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불면증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병이 마콘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병에 대한 그들의 모든 대책은 효과적으로 시행이 되어서 얼마 안 있다가 사람들은 다시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으며, 잠을 자야 한다는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잊게 되었다.-58쪽

몇 달 동안 잠을 못 자서 상실하게 된 기억력을 되찾고, 기억력을 유지하는 비결을 알아낸 사람은 아우렐리아노였다. 그는 그 비결을 아주 우연히 알아냈다. 맨 처음에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던 그는 곧 불면증 전문가가 되었으며, 그의 은세공 기술도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발전했다. 어느 날 그는 쇠붙이를 두드려 광택을 내는 작은 모탕을 찾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자기가 찾던 물건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그건 모탕이야.」아버지가 일러주었다. 아우렐리아노는 그 말을 종이쪽지에 써서 모탕 위에다 달아놓았다. 그렇게 적어놓으면 앞으로 그 말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모탕이라는 말이 워낙 어려운 단어였기 때문에 잘 잊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이 사건이 그의 기억상실증의 시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그는 실험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그가 계속해서 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도움이 되라고 그 모든 것들의 이름을 종이쪽지에 써서 사방에 붙여놓았다. -58~59쪽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어릴 적에 가장 감명깊었던 어떤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걱정스런 어조로 얘기했을 때, 아우렐리아노는 기억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어떻게 했는지를 얘기해 주었고, 그 얘기를 들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곧 그 방법을 실천에 옮겨 집안 여기저기에 쪽지를 붙이며 돌아다녔고, 심지어는 밖으로 나가 마을에 온통 종이쪽지를 달아 두었다. 그는 먹을 듬뿍 찍은 붓으로 온갖 이름을 다 표시해 두었다.「책상•의자•시계•문•침대•냄비……」그는 동물 우리로 가서 식물과 짐승의 이름도 표시했다.「소•염소•돼지•암탉•바나나•카사아•바칼라듐……」이렇게 조금씩조금씩 기억을 상실해가면 어느날엔가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이름을 위에 써붙인 글자를 읽고서 알기는 하겠지만, 결국 그 물건들의 쓰임새는 몽땅 잊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마콘도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기억상실증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방법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소의 목에 걸어놓은 다음과 같은 간판이었다.「이것은 암소입니다. 암소는 아침마다 짜주면 젖을 냅니다. 그리고 소의 젖을 끓인 다음에 커피와 섞어서 먹습니다.」그렇게 사람들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서 도망치려는 현실을 바둥거리면서 붙잡으려 했고, 그들의 기억을 지탱시켜야 할 단어들이 하나씩 둘씩 그들의 머리에서 사라져, 결국 그들은 글의 가치를 잊게 되었다.-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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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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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Review /『Le  souligneur』by  Caroline  Bongrand

25살 아가씨와 함께하는 지적이고 유쾌한 책 여행


몇 해 전에 개봉되었다가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리뷰를 읽다가 그 영화가 카롤린 봉그랑의『밑줄 긋는 남자』라는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소재는 신선하고 재미있어 보여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소설『밑줄 긋는 남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소설『밑줄 긋는 남자』는《르 몽드》지에서 평한 것처럼 ‘익살스럽고 산뜻하며 매력이 넘치고 빠르게 전개되는 하나의 게임’이다. 여주인공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다가 두근두근한 연애소설의 양상을 보이더니 급기야 추리소설의 흉내까지 내는 이 소설은 짓궂지만 사랑스럽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여주인공 콩스탕스가 벌이는 이 유쾌한 지적 여행을 함께 하는 동안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즐겁다.

작가 로맹 가리를 숭배하는 주인공 콩스탕스는 시립도서관에서『오렌지빛』이라는 제목에 책의 세 단면을 노란빛으로 물들인 이상한 책을 대여한다.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책이라 호기심이 생겨 읽기 시작했지만 금세 흥미를 잃고 책을 대충대충 넘기던 참에 도서관 규정을 어기고 연필로 적어 놓은 문구를 발견한다.「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그리고 그 책의 마지막 장에는「도스또예프스끼의『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아, 러시아는 로맹 가리와 관계가 있는 나라가 아닌가. 콩스탕스는 도스또예프스끼의『노름꾼』을 찾아 도서관을 종횡무진 한다. 마침내 손에 넣은 후 책을 열심히 탐독하다가 난데없이 그어진 밑줄들에 멈칫한다. 자신에게 누군가 게임을 걸어오고 있다! 게다가「이런,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군요.」이런 밑줄까지 등장한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겠다느니, 당신은 약속을 했다는 둥 이어지는 밑줄들에 콩스탕스는 동요하기 시작한다. 결국 콩스탕스는 이 게임을 시작하기로 하고 책 속에 숨어서 자신에게 게임을 걸어 온 이 남자(물론 콩스탕스만의 생각이지만)가 안내하는 책 여행을 시작한다.

아, 문학소년소녀들의 로망이다. 순전히 책만으로 소통을 하는 로맨스라니~ 고등학교 때 대여점에서 빌린 소설의 밑줄과 메모를 경험했던 나로서는 이 아가씨의 지적 여행이 너무나 유쾌하고 부러웠다. 물론 내가 빌렸던 책은 나에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말이다. 푸훗.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많은 작품을 다 읽고 머리에 새겨놓았으니 이런 작품이 나왔겠지, 라는 생각이 든 순간 책 표지에서 보았던 젊고 아름다운 작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싱그러운 미소를 담고 있던 그 해맑은 얼굴 뒤에 감추어진 지적 열망과 무한했을 노력, 그리고 작품에 대한 집념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밝고 경쾌하며 기분 좋아지는 작품이다.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고 재밌지만 천박하지 않다. 읽지 않은 명작들의 명구들도 훔쳐볼 수 있어 즐거운 작품이다. 카롤린 봉그랑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지지만 우리나라의 척박한 출판풍토 때문에 다른 번역본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한 권 있는데 절판이다). 출판인들, 좋은 책은 꾸준히 찾는 사람 있거든요. 당장 보이는 이익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들. 근데 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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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 칼비노 선집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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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Il cavaliere inesistente』by Italo Calvino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긍정, 혹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판타지에 근접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을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38페이지에서 카를로 대제가 내뱉는「오, 재미있는 일이야! 여기 있는 이 백성은 존재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저기 있는 나의 용장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존재하지 않는군. 좋은 짝이 되겠어, 내가 자네들에게 장담하지!」라는 이 말은 소설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판타지가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명확하지 않은 중세에 이교도들과 전쟁을 벌이는 전장터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아질울포는 금속 갑옷과 오직 존재하겠다는 정신만으로 존재하는 기사이다. 아질울포는 전쟁에 참가해 쉬지않고 자신의 일들을 완벽하게 처리하며 전쟁터에서 존재(살고 있다,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이기 때문에, 한낱 갑옷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하고 있다. 늙고 무력한 대제와 동료 기사들의 조롱, 브라다만테의 끝없는 구애, 람발도의 존경과 시기, 구르둘르의 어지러운 충성 등이 그를 존재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아차, 하나가 빠졌다. 이 소설 속에서 전장과 아질울포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조용한 수녀야 말로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질울포를 존재하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내들의 나약함과 변덕 그리고 우매함에 지친 브라다만테는 존재하지 않지만 강하고 올곧고 언제나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아질울포에게서 그녀의 완벽한 사내를 본다. 그래서 아질울포에게 구애하지만 아질울포는 브라다만테의 구애에 응할 만큼 뻔뻔하지 않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대 여성의 허영심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이 소설이 중세의 전장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브라다만테의 구애는 현대 여성들이 꿈꾸는 백마 탄 왕자와도 무관하지 않다. 여성들은 테레비에서 보았던 왕자님 아니 재벌의 아들을 꿈꾸지만 그런 일들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런 재벌가들은 자기네들끼리의 교류와 혼인 등으로 중세의 귀족이나 왕족들처럼 핏줄을 이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알고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여성의 허영심은 자신의 범위 안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그들을 꿈꾸는 것까지는 허용한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고 존재하지 않을 것들이기 때문이다. 봐라, 브라다만테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아질울포에게 무모한 구애를 해대는 것과 묘하게 닮아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장에 뛰어든 솜털이 보송보송한 청년, 람발도는 아질울포에게서 기이한 매력을 느낀다. 아무것도 모르고 전장에 들어왔지만 아버지의 복수가 결국 적의 병사 한두 명쯤 죽이는 것으로 계산이 끝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탈로 칼비노의 정치활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는 공산당을 위해 군대에 자원했다가 15년 뒤에는 공산당을 탈당하고 좌익 인사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람발도처럼 확고한 신념으로 공산당을 위해 싸웠지만 결국 그것이 수만으로만 계산되는 덧없는 일인 것을 깨닫고 공산당을 탈당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신이 불나방처럼 군대에 지원하던 시절을 람발도라는 인물에 투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카를로 대제가 아질울포에게 내리는 하인 구르둘르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순간순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자신을 착각하며 살아간다. 오리를 쫓아 연못에 들어 갔다가 오리가 되어 나와서는 다시 배나무가 되기도 하고 죽을 먹다가 죽통에 빠져서는 결국 자신이 죽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인간, 순수한 의미의 백치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통틀어 구르둘르만큼 상념이 없고 고민하지 않는 인물은 없다. 그래서 구르둘르는 행복하다. 눈에 보이는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 갓난 아기들처럼. 그래서 아기들은 잘 웃고 기분이 좋고 즉흥적이다. 구르둘르와 같은 상태인 것이다. 작가는 혹시, 우리 인간들이 사리사욕을 버리고 구르둘르와 같은 인간 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는 인물들 중심으로만 이 작품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 작품의 절정은 아질울포라는 기사의 존재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한 청년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청년 토리스몬도는 아질울포에게 기사라는 작위를 받게 해준 처녀가 사실 처녀가 아니었고 자신의 어머니였다고 고백한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질울포에게 내려진 기사 작위는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변해버리고 아질울포는 존재할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아질울포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 ‘처녀’를 찾아 나서게 되고 토리스몬도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토리스몬도가 찾아 나선 자신의 아버지는 ‘성배기사단’의 기사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성불가침에 의해 혼인을 할 수 없으며 당연히 자식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토리스몬도는 자신의 진짜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 성배기사단을 찾아내고 그들 가까이에서 생활하게 된다. 신의 부름과 말씀에 따라 행동한다는 성배기사단은 사실 아무 명분없이 마을을 습격해 짓밟고 강탈하는 도둑들에 불과하다. 마을이 쓸모없어지면 완전히 불태워버려서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어버리는 악질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토리스몬도는 약자편에 서서 결국 성배기사단에 대항하고 그들에게서 승리를 이뤄낸다. 그러나 토리스몬도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어머니와의 좋은 시절을 앗아갔다고 생각해서 아질울포의 존재를 부정하며 자신의 뿌리까지 뒤흔들며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성배기사단을 찾았지만 그들이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것이 부끄럽다. 차라리 모든 것을 밝히지 말 것을 그랬다. 우리가 덧없고 후회와 실수로 점철된 인생을 뒤돌아 볼 때 처럼. 

    끝자락에 가서 토리스몬도는 한 ‘처녀’와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이 처녀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소프로니아였다. 이것을 알게 된 아질울포는 존재할 이유와 가치를 잃음으로 해서 자신을 공기중에 산화시키고 람발도에게 자신이 ‘존재’했던 유일한 증거인 깨끗하고 하얀 갑옷을 람발도에게 남긴다. 하지만 토리스몬도는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지 않고 자신의 계보를 잘 정리해 소프로니아와 자신이 혈연에 얽혀있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행복한 결혼에 이른다. 아질울포가 자신 때문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아무 상관없다. 그는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기사였으므로.

    자신에게 꼭 맞는 갑옷을 얻게 된 람발도는 브라다만테를 찾아 떠나는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를 존재했던 기사로 만들고 있는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수녀가 바로 브라다만테라는 것이다. 브라다만테는 이제,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하얀 갑옷의 기사는 안중에 없다.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 행복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브라다만테가 람발도를 맞이하러 뛰어나가면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정상을 회복하지만 정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기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이 결말이 씁쓸하지 만은 않다. 어쨌든 해피엔딩이 아닌가.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더불어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이라는 이탈로 칼비노의 이 소설은 동화를 닮았다. 아니 동화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로빈후드>나 <사자왕 리처드>같은 중세의 갑옷 입은 기사들이 나오는 동화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느끼게 하는 설정들이나 어디에서건 볼 수 있는 인간 유형, 그리고 재치있는 유머와 풍자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탈로 칼비노의 이 작품은 재미있다. 약간 낯선 문체에 적응만 하면 책장 넘기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다. 사랑해요, 이탈로 칼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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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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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Il barone rampante』by Italo Calvino

-수단에 잠식당한 현대인의 자화상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에서 두번째 작품에 해당하는『나무 위의 남작』은 18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18세기, 계몽주의가 도래하고 혁명의 불씨들이 꿈틀거리던 바로 그 시기이다. 이런 시기에 사소한 반항으로 나무 위에 올라가 평생을 나무 위에서 보낸 남작의 기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디론도 백작의 저택에서 아침부터 소동이 일어난다. 장남 코지모가 누나가 요리한 달팽이 요리를 먹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까이거 뭐라고 먹네, 안 먹네 하느냐면 전날 밤, 코지모는 동생과 함께 이 달팽이들을 지하 광에서 탈출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달팽이는 달팽이일 뿐, 느려터진 달팽이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스프와 기묘한 요리들로 재탄생되어 식탁에 오른 것이다. 코지모는 자신이 새 삶을 열어주려고 했던 달팽이들을 차마 먹을 순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다가 끝내 정원의 나무 위에 올라가고 만다. 그러고는 선언한다. 다시는 땅을 밟지 않겠노라고.

   가족들은 잠깐 이러다가 말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코지모는 나무에 자신을 적응시키고 있었다. 도르래를 만들어 필요한 물품을 나무 위로 끌어 올리고 양가죽을 덧댄 커다란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잔다. 물론 이 주머니를 튼튼한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사냥을 해서 짐승의 가죽과 고기를 얻었고 그 가죽과 고기로 스스로 구할 수 없는 것들과 교환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 냄새가 났다. 시작의 달팽이 사건만 해도 그렇다(사회 참여를 위해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던 칼비노를 되돌아 보니 더욱 확고해졌다). 느려터져서 결국 생포되는 달팽이들은 마치 민중에 비유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코지모는 민중을 선동하는 혁명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많은 혁명들이 그러했듯이 코지모의 노력도 실패하고 만다. 그러고는 스스로 나무 위에 유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코지모는 유배지에서의 삶을 즐긴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나무 위에서의 삶이 결코 황량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코지모는 농부들에게 자신이 고안한 관개시설을 만들어주고, 끊임없이 여인들을 만나기도 한다. 나무 위에 산다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무 위로만 여행하기도 해서 그곳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지만 나무 위의 삶을 포기할 수 없어 그들과 이별한다. 그쯤 되자 코지모에게 나무 위의 삶은 더 이상 유배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수단을 포기하지 못해 계속 유배지에서 살아가는 코지모.

   수단이 기능을 넘어서서 주체자가 수단에게 잠식당한 형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장소에서 만연하고 있는 일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보통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돈을 번단 말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후에도 일을 멈추지는 않는다. 축적한 부를 불리기 위해 재테크를 시작하고 이를 위해선 어느 정도의 자본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그 자본을 위해 돈을 더 벌 수밖에 없는 조금은 우스운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렇듯 종종 수단에 잠식당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한 후에도 벗어날 수는 없다. 잠식당한 채 살아온 시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 익숙함이 편안해, 혹은 익숙함을 깨부쉈을 때의 낯섦이 무서워 현대인들은 수단에 잠식된 자신을 못 본체 한다. 이탈로 칼비노는 이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존재하지 않는 기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을 통해서도 현대인의 자화상을 우회적인 형식으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작품에서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긍정을 통해 현대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 했듯이 이 작품을 통해서는 수단에 잠식당해 자아를 잃고 마는 현대인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다. 코지모가 여가를 보내기 위해 책을 읽다가 나중엔 산적을 위해 책을 구하고 읽어야만 했던 에피소드에서도 이러한 점은 잘 나타난다. 역시 칼비노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그러나 코지모는 삶을 충분히 즐긴다. 유명세를 떨치기도 하고, 사랑도 나누며(반쪽짜리 사랑도 포함된다) 최대한 자신의 삶에 충실했다. 현대인들이 삶을 즐기지 못하고 아둥바둥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작가는 코지모라는 인물을 통해 ’당신들 그렇게만 사는 것 피곤하지 않수?’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단에 잠식당한채 사는 것을 즐기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모델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라고 쓰고 나니 비약이 좀 심한 것같다;;)

   어쨌든 이 소설은 칼비노의 다른 작품들처럼 상당히 재미있다. 문제의식이고 나발이고 따위에 신경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사랑해요, 이탈로 칼비노(나는 역시나 칼비노 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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