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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Review / 박민규,『카스테라』
-안녕, 나하고 놀자.
유쾌하고 예리한 칼날의 그, 박민규가 돌아왔다. 데뷔한지 만 3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장편소설 두 권을 선보이더니-유수의 문학상들까지 거머쥐었다- 소설집까지 한 권 들고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왕성한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그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서 그를 조종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집『카스테라』에선 화자인 ‘나’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이야기들이 있다. 배추흰나비가 되려고 겨우내 번데기 안에서 흰 날개를 구겨 접고 기다리는 벌레는 아니더라도 박민규 소설 속의 ‘나’들은 충분히 다른 세상을 꿈꾼다.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공무원이라는 틀에 자신을 구겨 넣기 위해 공부를 한다거나(「아, 하세요 펠리컨」)-그러나 결국 다른 꿈과 세상을 향해 나간 사장의 유원지를 떠맡고-, 9호 구름을 타고 도착한 개복치여관에서 링고 스타를 만나기도 하고(「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대왕오징어와 외계생물체들의 기습을 염려하여 친구들과 대비책을 갈구하기도 한다(「대왕오징어의 습격」).
얼핏 이야기만 들으면 공상과학만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구름을 타고 미국까지 여행을 한다거나 오리배가 한 가족의 기지가 되어 여기저기 날아다니기도 하며, 미확인비행물체가 등장해 농가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은 우리가 보았던 만화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전작들인 두 편의 장편소설에서도 박민규만의 만화적 상상력을 보여주었지만 이 소설집에서의 상상력은 더 과장되었고 우스꽝스러우며 슬프다.
소설집의 화자이자 주인공들은 나름 평범한 삶을 꿈꾸며 살고 있지만 그 평범함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선 도시락을 들고 찾아간 사무실에서 아버지의 ‘갸날픈’ 표정을 본 후로 원래 ‘좀 노는 축’에 속하던 화자는 말이 없어지고 방학 동안이면 미친 듯이 알바를 해대며 살아가는 청소년이 된다. 후에 집을 나가 기린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마주하고서도 놀라거나 원망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설득한다, 그저. 모든 어려움이 다 해결되었으니 이제 방황 그만하고 돌아오세요, 라는 식으로. 현실에서 도태되어 기린이 된 아버지를 다시 현실로 끌어들이려 노력하는 화자와 기린의 대화에선 이상하게도 상황에서 느껴질법한 판타지가 거세되어 있다. 기린과 대화라는 판타지한 설정의 배경이 지독하게 현실적인 지하철 승강장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으면서 고골리의 단편소설인「코」가 묘하게 겹쳐졌다. 공무원인 주인공의 코가 실종(?)되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공황과 혼란, 그리고 일상성에 대한 블랙코미디인「코」또한 판타지한 이야기이지만 세세한 상황묘사와 배경들이 현실적이다. 그래서 읽으면서 이 단편의 또 다른 주인공인 ‘코’의 행보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더 이상 ‘코’는 판타지의 산물이 아닌, 주인공이 현실에서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자아가 되어버린 셈이다.
어쩌면「코」와 유사하게「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의 기린은 주인공이 먼 미래에 보게 될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니었을까? 괴롭고 힘든 현실에서 탈출한 채 아버지처럼 기린으로 살아갈 자신, 슬픈 이야기다.
SF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확인비행물체와 비만이 되어버린 아내, 학원을 세 곳이나 돌고 집에 돌아와야 하는 아홉살난 자식 그리고 아내가 비만이 되기 전 사귀던 선배의 이야기인「코리언 스탠더즈」도 슬픈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빼빼 마른 여자와 결혼해서 그녀를 비만으로 만들어 함께 살고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수도권 신도시에 아파트를 마련해 자신을 ‘코리언 스탠더즈’라고 지칭하며 헤이즐넛을 즐기는 남자이다. 살이 찐 부인과 재롱 떨 시간도 없이 학원과외에 지쳐 집에 돌아오곤 하는 딸자식과 함께 여름 휴가를 계획하지만 아내의 전 애인이자 자신의 사수였던 선배의 전화 한 통에 ‘코리언 스탠더즈’를 잠시 이탈한다. 이유는 선배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자책감을 벗어나기 위해서지만 말이다.
원망하는 아내와 자식을 떼어놓고 도착한 선배의 ‘농촌’은 그야말로 농촌이었다. T V에서나 보았던 자연속에서 주인공은 나름의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감상도 잠시, 선배의 말들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외계인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말은 목격하기 전까진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UFO가 나타나 자행하는 일들을 목격하자 그 곳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선배와의 토론은 예전을 생각나게 할만큼 신선한 것이지만 주인공에게는 ‘코리언 스탠더즈’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선배의 요구를 들어줄 만큼의 힘과 연줄이 없는 평범한 사회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주인공과 선배는 외계인들이 남긴 크롭 서클을 발견하는데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이다. 대한민국의 표준을 뜻하는 KS마크의 거대함 앞에서 선배는 ‘이놈들… 우릴 너무 잘 알고 있구나’라는 말을 남긴다. ‘해는 떠오를 만큼 높이 떠버린 느낌’이었지만 거대한 표준마크 앞에서 주인공은, 선배가 태우는 담배연기에 실려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을 것이다. 외계인도 인정한 ‘코리언 스탠더즈’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길인지 선배의 여자였던 아내와의 행복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내가 이 소설을 읽고 크롭 서클이 남겨진 선배의 옥수수밭을 걱정한 것이다. 이거 다 뻥이지롱- 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소설을 읽고 나서 이렇게 현실적인 사안을 걱정했다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런것이 박민규 소설의 힘인 것 같다. 전생에 훌리건이었을 법한 냉장고에 부시와 중국까지 집어넣고 나서 마지막에 속살이 포실한 카스테라를 선사받는 이야기(「카스테라」)를 읽고 나면 중국에게 부시가 뼈와 살이 녹도록 냉장고안에서 구타당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박민규의 소설. 한없이 유쾌하고 가볍게 보이지만 헤집고 들어가면 번득이는 예리한 칼날이 요리하고 있는, 현실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박민규의 능력이다.
동네 후미진 곳에 위치한 ‘갑을고시원’이라는 곳에서 ‘헤드락’을 일삼으며 ‘너구리’를 친구로 삼아 글을 쓰고 있을 법한 박민규, 우연히라도 그를 마주치면 그가 ‘야쿠르트’를 하나 건내며 이렇게 이야기 할 것 같다. “안녕, 나하고 놀자.”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저씨 상상력을 좀 나누어 주세요, 그럼 같이 놀께요.” 박민규가 응할까? 깔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