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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Review /『The fifth child』 by Doris Lessing
-씨앗은 자라나 열매를 맺지,
현대 영국 문학계의 가장 중심에 서 있다는 작가, 도리스 레싱. 모든 소설 형식을 아우르며 20세기 주요한 지적 문제들을 포함하는 작품을 쓴다고 한다. 책 표지의 설명을 읽어 보면 굉장한 작가 같은데 이름도 몰랐고 작품은 더더욱 몰랐다. 무식은 죄가 아니라구. 그런데도 이 작가의 작품을 구입한 이유는 제목에서 풍기는 묘한 기운 때문이었다.『다섯째 아이』, 불길한 예감을 조성하는 이 짧은 제목은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풀어낼 것만 같았다.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모범 청춘들이다. 마약이나 문란한 혼전 성관계 따위는 그들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절차를 밟어 가정을 이룬다. 아이는 많을수록 좋아, 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커다란 저택을 구입하면서부터 이 가정의 역사는 시작된다. 데이비드의 능력만으로는 유지하기도 힘들법한 저택, 그러나 그들은 마냥 즐겁다. 저택이 헤리엇과 데이비드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꿈꾸던 생활, 행복했다. 그리고 이 젊은 부부가 가족을 생산하면서 균열, 아니 불행은 시작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젊은 부부의 삶이 ‘보여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수에 넘치는 저택을 구입한 이유가 ‘단지’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집을 원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부활절 휴가, 여름 휴가, 크리스마스 휴가 등 명절에 온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왁자지껄하게 모여 과장된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허리가 휠 정도로 많은 비용이 들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개의치 않는다. 과장된 일상에서 이들은 100점짜리 가정을 타인-가족일지라도-에게 보여주며 행복해한다. 이렇게 100점짜리 가정이 유지되고 보여지면서 그들은 타인에게 롤모델이 되기도 한다. 행복하다. 내가 원한 삶은 이런 것이야, 이런 것.
그러나 표준의 잣대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파괴되기 시작한다. 도리스 레싱은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로 이 가정의 균열(다섯째 아이의 탄생)로 야기되는 불행을 보여주고 있다.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가 일차적으로 보여주는 균열의 씨앗은 비현실적이다. 자궁 속에서 어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다섯째 아이, 비정상적인 크기로 조산을 감행할 수 밖에 없던 다섯째 아이, 태어나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어미와 의사를 노려보던 다섯째 아이. 다섯째 아이는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가정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비와 어미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아니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왜? 그들은 표준이거든, 표준.
불행의 씨앗인 다섯째 아이가 가져오는 균열은 처음엔 미미했다. 헤리엇이 웃지 않을 뿐이었다. 씨앗은 양분을 섭취하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만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법이다. 다섯째 아이는 헤리엇의 웃음을 빼앗으면서부터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어든 자라고 자라면 양분이 더 필요한 법. 헤리엇의 웃음을 시작으로 데이비드의 유머와 아이들의 조잘댐, 그리고 가정의 행복과 더 나아가선 가족의 행복까지 섭취함으로써 마침낸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가족의 허상과 붕괴였다. 헤리엇이 웃지 않음으로써 생기던 미세한 균열이 보여주기에 급급했던 롤모델의 실체를 드러내고 파괴한 것이다.
사실적인 문체가 과장된 일상을 천천히 조롱하면서 가족을 파괴하는 과정은 다섯째 아이의 그 비이성적인 행동들보다 더 잔인하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혼란스러운 롤모델은 도리스 레싱의 펜 끝에서 느리고 처참하게 해체된다. 뭔가가 도리스 레싱의 유년기에 참혹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공산당에 참여했을 때 공산당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허상을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작은 가정을 시작으로 가족이 붕괴되는 일상을 그리며 자신이 느꼈던 허상에게 복수의 펀치를 날렸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뭐 다르게 말하자면 삽질이지, 깔깔.
서서히 조여오는 불행의 그림자를 ‘관전’하는 것은 이 작품의 장점이다. 몰입을 방해하며 ‘관찰’만을 유도하는 작가의 지시에 따라 소설을 읽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경험이다. 생각해보면 작가가 관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극도로 몰입해서 자신이 믿었던 이데올로기가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니까. 어쨌든 난 도리스 레싱이 궁금해졌다. 보관함에 들어가는 작가들이 자꾸 늘어난다.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