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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Review /『The Time Seller: A Business Satire』by Fernando Trias de Bes
-어차피 시간의 주체자는 내가 아니잖아,
생소한 이름의 스페인 작가가 쓴 이 소설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땐 은유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판다, 라 너무 얼토당토아니한 말이지 않은가. 하지만 책의 설명글을 봤을 때 나의 닫힌 사고에 놀라고 말았다. 5분에 1.99$라니 푸헐, 정말 시간을 파는 얘기인거야? 호기심은 발동하고 신간이라 할인쿠폰도 주는데다 다이어리도 준다. 덤으로 마일리지 또한 빵빵. 지르라, 지르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라는 지름성서의 구절이 떠오름과 동시에 보관함에 있던 책들을 선별해 장바구니에 넣고 추가 마일리지를 받기 위해 살림지식총서도 한권 끼워 넣고 있었다.
내용은 시간(T)을 파는 어떤 남자(TC)의 기업이 성장하고 결국엔 망하는 이야기다. 더 짧게 말하자면 ‘자유주식회사의 흥망성쇠’. 내가 요약하는 줄거리란 다 이렇다. 그런데 정말로 그 외에 다른 이야긴 없다. 뭐 남자가 회사를 관두기까지의 내용이 한 챕터 정도 되긴 하지만 그것도 결국엔 기업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으니 짧은 요약에선 충분히 생략 가능하다구. 그리하여 이 소설의 구분은 경제소설쯤 되겠다.
경제소설이라고 구분하긴 했지만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결코 시간을 주체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작은 것엔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언제나 원하는 탐욕스런 우리들의 모습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종종 알면서도 실수(?)라는 것을 저지른다, 인간이기에.
이 작품은 젊은 작가의 재기발랄함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T를 절약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것들을 약어로 만들며 능청을 떠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그리고「좋다. 이제 MTC의 어린 시절과 그녀가 TC를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생략함으로써 우리는 약 여섯 페이지를 절약했다.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지 마시길.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떨어지지 않도록 할 자신이 있다」(p.15) 이렇게 작가의 의도를 부여한 생략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입담에 대한 자신만만함을 드러내는 부분도 빠질 수 없는 재미이다.
작가가 너스레를 떨며 하는 이야기는 재미도 있고 어렵지 않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묵직한 주제의식을 내보이며 독자를 무한한 사유의 세계로 이끌 깜냥은 되지 않는지 결말 부분은 거의 경제교과서를 펴놓고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피상적인 주제를 너무 정직하게 서술해서 읽는 재미가 반감된 것이다. 너무 피상적인 접근만을 시도한 것 같다. 뭐 제목부터가 소설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찬찬히 읽다 보면 피상적 이야기 속에 감춰져 있던 내막이 드러나 새로운 즐거움을 줬다면 더 좋은 소설이 되었을 것 같아 아쉽다.
내가 빚지고 있는 시간이 궁금할 때 혹은 내 시간의 주체자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울 때 가볍게 읽고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갖기에 좋을 소설이다. 후반은 너무 교과서적이니 시간에 대한 사유는 독자 본인이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너무 오래 생각하진 말자. 어차피 시간의 주체자가 내가 아님은 바뀌지 않는 결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