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동물 사이언스 클래식 1
로버트 라이트 지음, 박영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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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윈이 이룬 업적에는 어떤 일관성이 있다. 그가 변덕스럽게 탐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기 의심과 과도한 복종심 때문에 곤경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지위 상승을 추구했지만 양심의 가책과 겸손 속에 그것을 능숙하게 감추었다. 다윈이 받았던 양심의 가책 속에는 도덕이 위치해 있다. 성취를 이룬 사람들에게 그가 복종을 표시했던 그 밑으로는 사회의 공격에 대비한 결연한 방어 의지가 있다. 그가 친구들에 표했던 교감 그 밑으로는 용의주도한 정치적 동맹이 있다. 얼마나 대단한 동물인가!-454쪽

이와 같은 이유에서 다윈은 인간 종이 도덕적인 종이고, 인간은 도덕적인 동물이라고 믿었다. "도덕적인 존재란 자신의 과거 행동들과 동기들을 미래의 것들과 비교할 수 있고, 그것들을 승인하거나 승인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다른 하등 동물들이 이 능력을 갖고 있으리라고 가정할 어떤 이유도 없다." 라고 썼다.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도덕적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진실되고 반성된 삶을 살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는 자기 인식, 기억, 통찰력, 판단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진화론적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기술적' 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도록 이끌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가 진실하고 긴장되는 도덕적인 정밀 조사를 받고, 우리의 행동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것은 디자인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잠재적으로 도덕적 동물이지만 (어떤 다른 동물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연적으로 도덕적 동물인 것은 아니다. 도덕적인 동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철저하게 도덕적 동물이 아닌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502쪽

도덕을 측정하는 세밀한 잣대를 가지고 다윈은 자신의 삶에 합격점을 주었다. "나는 정직하게 평생을 과학에 전념했고 헌신해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큰 죄도 짓지 않았다는 안도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종 내 주위 사람들에게 좀 더 직접적으로 이익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어떤 주제나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옮기기 어려운 정신 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을 봉사에 헌신하면서 살아도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더 훌륭한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다윈이 최선을 다해 공리주의자의 삶을 살지는 않았음은 사실이다. 누구도 그런 삶을 산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친절하고 너그럽게 살아온 삶과, 성실히 수행한 의무들과 다는 아니었어도 그가 그 근원을 처음 발견한 이기심에 대한 고통스러운 투쟁에 대해 올바르게 숙고할 수 있었다. 그 삶은 완벽한 삶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보다 더 추악해질 수 있다.-5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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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수필 2 - 수필에 길을 묻다
법정(法頂) 외 지음, 손광성 외 엮음 / 을유문화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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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넘긴 나,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롭게 삶에 대한 포용력을 가지고 조금은 호기를 부릴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不惑(불혹)'-보고 듣는 것에 유혹받지 아니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함-이란 말은, 따지고 보면 슬픈 말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격하지 않고, 슬픈 것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고, 불의를 보고도 노하지 않으며, 귀중한 것을 보고도 탐내지 않는 삶은 허망한 것이리라.
그것은 즉 이제는 치열한 삶의 무대에서 내려와 그저 삶을 관조하는 구경꾼으로 자리바꿈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니, 어쩌면 '불혹'이란 일종의 두려움, 삶의 한가운데로 다시 뛰어들 용기가 없는데에 대한 슬픈 자기 방어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짝사랑이란 삶에 대한 강렬한 참여의 한 형태이다. 충만한 삶에는 뚜렷한 참여의식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환희뿐만 아니라 고통역시수반하게 마련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다른 모든 일들처럼 -201쪽

사랑도 연습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짝사랑이야말로 성숙의 첩경이고 사랑 연습의 으뜸이다. 학문의 길도 어쩌면 외롭고 고달픈 짝사랑의 길이다. 안타깝게 두드리며 파헤쳐도 대답 없는 벽 앞에서 끝없는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만이 마침내 그 벽을 허물고 좀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승리자가 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짝사랑하라. 사람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학문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저 푸른 나무 저 높은 하늘을 사랑하고, 그대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을 열렬히 사랑하라. 사랑에 익숙지 않은 옹색한 마음이나 사랑에 '통달'한 게으른 마음들을 마음껏 비웃고동정하며 열심히 사랑하라. 눈앞에 보이는 보상에 연연하여, 남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랑의 거지가 되지 말라. 창밖의 젊은이들을 보며 나도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불혹'의 편안함보다는 여전히 짝사랑의 고뇌를 택하리라고. 내가 매일 대하는 저 아름다운 청춘들을 한껏 질투하며 나의 삶을, 나의 학문을, 나의 학생들을 더욱더 열심히 혼신을 다해 짝사랑하리라.
언젠가 먼 훗날 나의 삶이 사그라질 때 짝사랑에 대해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면 미국 소설가 잭 런던과 같이 말하리라.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겠다"고. 그 말에는 무덤덤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찬란한 섬광 속에서 사랑의 불꽃을 한껏 태우는 삶이 더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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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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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우주 현상을 설명하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초끈이론의 발견 과정을 소개하면서 지난 100년간의 물리학의 핵심을 아주 쉽고 흥미진진하게 설명해 주었다. 쉽게 설명하는 저자의 글 솜씨와 역자의 보충은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초끈이론 연구가 진전되면 10년 안에 우주의 비밀을 풀어 줄 궁극이론이 발견될 거라고 전망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게 될까? 호킹도 1988년에 쓴 【시간의 역사】에서 20세기 안에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게 될 거라고 호언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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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
김창엽 외 지음 / 삼인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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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가 장애인의 날이라는데, 평범한 하루였다. 장애인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는 글모음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을 읽고 있는데 책제목인 궁금했었던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란 글을 오늘 읽게 되었다.

모름지기 장애인은 착해야 동정 받고 사랑 받으며 도움 받아 살아갈 수 있다고 암시적으로 강요되었고 그에 순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받아들여지게 되어 버렸다는 것. 저자는 그것이 비장애인들이 만들어 놓은 편견이라고 한다. 장애란 삶의 조건일 뿐, 그 불리한 조건에 대해서 적절한 도움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장애인에게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고, 봉사와 희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전문가가 필요하다.”

동정이 아닌 사랑을 쟁취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편견과의 대결인 것이다!

장애인의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맨먼저 이 책부터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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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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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우리가 아예 복제과학이란 것을 생각조차 못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거죠. 과학기술의발달이 꼭 지금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어야 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뭐 별겁니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호기심이 가장 많은 동물은 단연 우리 인간이죠. 저는 과학이란 우리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망과 행동을 체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앙의 행동'은 우리의 본능이죠. 저는 심지어 기독교도 과학을 부추겼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대 과학이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서 꽃을 피웠느냐 하는 문제에 의견들이 분분한데, 저도 하나 보태렵니다. 하느님은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지식의 나무'를 일부러 골라내어 그건 절대로 먹지 말라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을까요? 저는 하느님이 당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 인간에게 과학을 허락하신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멈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이 문제일 뿐이죠.

도정일
바로 거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과 과학은 상당한 맹목성을 가지고 있죠. 방법의 맹목성이요.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을 위한' 방법인가를 따집니다. 목적의 정당성 여부를 질문하는 거죠.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효과적 방법이 기술이라는 건데, 이때 방법만 생각하고 목적의 정당성은 따지지 않는 것이 기술의 맹목성입니다 자, 여기 유대인 100만 명이 있다, 이들을 가장 빨리, 가장 효과적으로 죽여 없애는 방법이 뭐냐? 이것이 히틀러의 주문이었어요. 기술자들이 생각해낸 '최선의 방법'이 가스실 처형이었습니다. 방법이 있더라도 목적 자체가 정당하지 않으면 그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인문학적 사고입니다. 흔한 지적이지만 '어떻게?'를 생각하는 사고와 '왜'라고 질문하는 사고의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175쪽

최재천
생물의 번식력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겁니다. 누군가가 죽어주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거죠. 죽음이 삶을 허락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죽지 않게 되는 날이 모두가 함께 죽기 시작하는 날이 되는 겁니다.-177쪽

도정일
대학의 학부 영문학강의는 인문학 교육의 일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인간은 어째서 인간인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 인문학의 핵심 질문이죠. 영문학이든 국문학이든, 학부의 문학 강의는 그 질문을 늘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질문이 두어 개 더 있습니다. 하나는 문학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 사람을 형성하는, 말하자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데 무슨 중요성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고, 또 하나는 영문학 교육이란 것이 서구 문명과 문화, 그리고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영문학은 서양학의 일종이니까 이런 문제를 때놓을 수 없습니다.-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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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09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