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시절


나는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인 1920년대 말에 태어났다. 미국은 10년이 넘는 동안 대공황의 재앙에 시달렸다. 물론 나는 어린 나이에 대공황을 겪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다섯 살 때 빵을 구하려고 장사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는 거예요? 하고 부모님께 질문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내가 성년이 되어서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애틀랜타 시 오번 가에서 태어났다. 애틀랜타는 조지아의 주도(州都)로 `남부지역의 관문'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나에게 오번 가는 집이나 다름없다. 어려서부터 다녔고 지금 공동목사로 일하는 에버니저 침례교회도 오번 가에 있다. 현재 내가 일하는 SCLC(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남부기독교지도자협의회) 사무실도 오번 가에 있다.
나는 애틀랜타에서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애틀랜타 대학 부설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그 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2년 만에 부커 T. 워싱턴 고등학교로 전학해야 했다.
내가 태어난 동네는 서민층에 속했다. 재산가도, `상류계층'에 속하는 사람도 없었다. 부유한 흑인들은 대부분 `헌터 힐'이라는 다른 지역에 살았다. 우리 동네 주민들은 순박하고 검소하며 지나치게 가난한 사람도 없었다. 주민들을 굳이 분류한다면 보통 수준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우리 동네는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건전한 마을이었으며, 사람들은 대부분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날 때부터 건강체질이었던 나는 몸이 아픈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를 정도로 건강하게 자랐다. 물론 정신적인 면에서도 건강했다. 어려서부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소 조숙했으니, 나는 핏줄을 통해서 건강이라는 타고난 축복을 물려받은 사람인 것 같다. 집안 분위기는 화목했다. 부모님은 훌륭한 분들이셨다. 나는 두 분이 언쟁을 벌이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는 나의 종교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사랑을 베푸는 주님의 존재를 별 어려움 없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과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은 모두 타고난 건강 체질과 화목하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가정 덕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거친 면과 부드러운 면을 동시에 가진 사람도 있고, 이상적인 면과 현실적인 면을 함께 가진 사람도 있다. 내 경우, 강인하고 열정적인 성격의 아버지에게서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단호한 결단력을 물려받고, 부드럽고 상냥한 어머니에게서는 온화한 품성을 물려받은 것 같다.


나의 어머니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 여사는 나를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 키워주셨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을 가졌으며, 아버지와는 달리 부드러운 말씨에 모난 곳이 없는 성격이셨다. 약간 내성적이지만 매우 상냥해서 누구나 쉽게 사귈 수 있는 분이다.
어머니는 유명한 A. D. 윌리엄스 목사의 딸로 비교적 안락하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흑인이 갈 수 있는 학교 중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경험하지 않고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흑백분리제도에 결코 순응하지 않았으며, 어릴 때부터 자식들의 마음속에 자부심을 심어주셨다.
미국에 사는 흑인들은 누구나 '아이들에게 인종차별과 흑백분리제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자신이 '당당한 인간'임을 잠시라도 잊지 말아라. 사회에 나가서 '열등하다'거나 '못났다'는 말을 듣는 일이 생기더라도 언제나 당당한 태도로 맞서야 한다"고 일깨워주셨다. 노예제도와 남북전쟁, 그리고 노예제도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남부의 일부 지역에선 아직도 학교와 식당, 극장, 주택, 술집, 대합실, 화장실 등에 흑백분리제도가 잔존해 있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질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상황일 뿐이니 이런 제도에 순응해서도 안 되고`열등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내게 `너는 누구 못지않게 뛰어난 아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대부분의 흑인아이들이 `불평등'이 무엇인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시절부터 늘 듣는 말이다. 나를 품에 안고 인종차별제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후일 내가 인종차별 철폐투쟁에 나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

아버지 마틴 루터 킹 1세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인하며 활달한 성격이셨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 만큼 체격이 컸으며 의지가 굳센 자신만만한 분이다. 나는 아버지보다 더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난폭한 백인들을 겁내지 않았다.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 백인들에게 아버지는 단호하게 '그런 말투는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난폭한 백인들을 직접 겪으며 자랐고, 어렸을 때부터 백인들에게 반항적이었다. 아버지는 애틀랜타에서 18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 스톡브리지에서 자랐다. 농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농장주인이 할아버지를 속여서 피땀 흘려 번 돈을 부당하게 빼앗는 현장을 목격했다. 아버지는 농장주인 앞에서 할아버지에게 주인이 부당한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렸다. 그러자 농장주인은 "짐, 이 검둥이 입을 당장 틀어막지 않으면 내 주먹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하며 몹시 화를 냈다. 그 농장주인에게 밉보였다가는 밥줄이 끊길 형편이었기에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가장 훌륭한 덕목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품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정직하고 헌신적으로 도덕적 원칙을 지키셨으며 어떤 일에도 성실하게 임하셨다. 아버지의 솔직한 태도를 마땅찮게 여기는 사람들조차도 아버지의 정직한 동기와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진실을 말하거나 자신의 속마음을 밝힐 때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솔직성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게 `자네 아버지는 너무 무서워'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실 아버지는 여러 면에서 엄격한 분이시다.
아버지는 시민권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유색인종의 향상을 위한 전국협회)의 애틀랜타 지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사회개혁에 앞장서고 계시다. 아버지는 버스에 탄 흑인들에게 퍼부어지던 폭력과 모욕을 목격한 다음부터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애틀랜타에서 교원급여 평준화투쟁을 주도했고, 법원 내 엘리베이터의 흑백차별을 철폐하는 데 기여하셨다.
아버지는 에버니저 침례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흑인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백인들 중에도 아버지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물리적인 공격을 받은 적도 없었는데, 이 점은 흑백차별의 긴장감 속에서 자란 우리 형제들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흑백분리제도의 부당성과 부도덕성을 확신하게 된 것은 이런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기에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어릴 적에는 거의 생활의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가족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셨으며 항상 모든 필수품을 부족하지 않게 마련해주셨다. 아버지는 월급 외에는 별다른 수입이 없었지만 예산에 따라 절약하며 생활하는 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궁색함을 모르고 지냈다. 아버지의 검소한 생활 태도가 아니었다면 나는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안락한 생활을 했다. 문제가 생길 때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해결되었다. 인생은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멋지게 포장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항상 일자리를 찾아다녔고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혹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다섯 살 때부터였다. 당시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때 교회에서는 부활절 행사가 한창이었다. 버지니아에서 초빙되어온 전도자 한 분이 구원에 대해서 설교하고 나서 교회에 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날 아침 맨 처음으로 교회에 간 것은 바로 누나였다. 나도 누나에게 뒤질세라 교회로 달려갔다. 그때만 해도 교회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세례를 받을 즈음에도 나는 건성으로 교회를 다녔다.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누나에게 뒤지고 싶지 않다는 어린아이다운 욕심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교회는 내게 있어 제2의 집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다. 주일학교에서 친구들도 사귀고 사이좋게 지내는 법도 배웠다. 목사의 아들답게 나는 대학 2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교회에 다니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주일학교에서는 근본주의적인 교의를 배웠다. 주일학교 교사들은 대부분 학력이 낮았고 성서비평이란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런 교사들의 무비판적인 성서 해설을 아무런 의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천성적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퍼붓는 조숙한 아이였으므로 이런 무비판적인 태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열세 살 때 나는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하고 질문해 주일학교 아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 뒤부터 신앙적인 의혹은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미워하는 인종을 사랑하라니?

소년기가 끝날 무렵 나는 정신적 성장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첫번째 계기는 외할머니의 죽음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외할머니를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유난히 외할머니를 좋아했다. 외할머니는 손자들을 모두 아끼셨지만 나를 가장 아끼셨다. 외할머니를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도저히 그분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모님의 자상한 설명 덕분에 외할머니는 아직도 살아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영생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두번째 계기는 여섯 살 무렵의 일이었다. 세 살 때부터 나는 한 백인 아이와 친해져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함께 놀며 자랐다. 서로 집이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가 우리 집 맞은 편에 있어 매일 함께 어울려 다녔다. 여섯 살이 되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우리는 다른 학교로 갈라져야 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자 그 아이는 함께 노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은 그 아이가 `우리 아버지가 이제부터는 너랑 같이 놀지 말래' 하고 말한 뒤부터였다. 그 말에 충격받은 나는 당장 부모님께 달려가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여쭤보았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인종문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인종문제로 빚어지는 여러 비극과 모욕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하셨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아 앞으로는 모든 백인들을 미워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생각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굳어져 갔다.
부모님은 한결같이 `백인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백인을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의무다'라고 가르치셨다. 내 마음속에서는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나를 미워하는 백인들, 천진한 아이들의 우정까지 짓밟는 백인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은 여러 해 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I have a dream today!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나라에서 언젠가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킹 목사 연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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