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사물들 속에서 저 근원적 언어의 흔적을 다시 보고, 그 이름을 다시 불러주어야 한다. 사물은 문자가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때문에 글자처럼 읽을 수가 있다. 이렇게 "결코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는" 것이 벤야민의 과제다. 그는 사물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듣고 그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것을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하려 한다. 이것이 이른바 '구제비평'이다.
현대 예술에는 '형식'만 남았다. 내용이 없기에 예술은 말을 잃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언어적 본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평은 '형식' 속에서 언어적 본질을 보고,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옮겨 그 안에 담긴 진리를 구제한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현대예술의 형식에서 아담의 눈은 추할 대로 추해진 사회의 상태를 본다. -104쪽
갈가리 찢겨진 형식에서 아담의 귀는 커질 대로 커진 인간의 고통을 듣는다. 이렇게 비평은 아담의 눈과 귀가 되어 말을 잃은 예술에 말을 되돌려준다. 말을 잃은 현대 예술은 우리에게 불현듯 자기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어떤 '깨달음'을 준다.
'토라'가 사본들 속에 흩어져 내리듯이, 신의 말씀도 사물들 속으로 흩어져 내린다. 사물의 이름을 부르던 아담처럼 비평은 사물들의 이름을 불러준다. 번역을 통해 "신의 말씀의 궁극적 명료함"으로 상승하듯이, 비평 역시 사물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옮김으로써 근원으로 상승한다. 사물 속으로 흩어진 말씀의 파편들을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서로 연결시켜 배열할 때, 이 속에서 창조의 근원적 말씀이 불현듯 별자리가 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번개처럼 스쳐가는 깨달음. 세속적 계시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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