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하게도 책은 읽지 않고 작가의 말만 몇 번을 읽고 쓰다듬는다.
"돌이켜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사랑'이나 '희망'같은 단어들을 써 본 적이 없다."라는 문장이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이유를 겁이 많아서,였다고 썼다. 겁이 많아서.
'사랑'이나 '희망'같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던 나는 겁이 없었을까. 아니다. 겁났다. 어느 날에는 숨 쉬는 일도 겁났다. 엄살을 떨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랬다. 그래서 덜컥 사랑하고 그렇게 덜컥 시작된 사랑에 어김없이 떨었다. 미련하오,라고 말하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미련했다. 미련해서 늘 '사랑'이나 '희망'을 몰래 끄적였다. 그러니까 나는 겁도 많고 미련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멀고 먼 나라로 떠난다는 친구는 같이 가자고 했다.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심이 아닌 것을 말하는 친구도 듣는 나도 알고 있는데 둘 다 잠시 머뭇거렸다. 전력질주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늘 제자리인 아니 출발선보다 후퇴한 이유가 뭘까, 더 나아가 가망없는 사람들인데 생을 단념할 수도 없었던 이유가 뭘까. 작가의 말처럼 늘 질문이 돌아온다. 그리고 질문마저 늘 제자리이다. 정녕 겁나는 일이다.
"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풍경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풍경은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
오늘 새벽 눈이 아프도록 한강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그렇게 강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렇게 버티는 강을 보며 또 다시 물었다. 생을 단념할 수도 없었던 이유가 뭔지.
작가는 "미수에 그친 한 줄씩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걸 버리지 못했다."라고 썼다. 미수에 그친 문장. 나는 그것이라도 얻고 싶었는데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단념해야 할 것을 하나라도 발견한 셈이다.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불면이 늘 고통인 것은 아니다.
내가 작가의 장편소설을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책의 제목은 오래오래 중얼거릴 것 같다. 이제는 단념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출발선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언제는 전력질주가 아니었던가. 그건 정말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