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벌써 지난 금요일 
그러니까 각자 회사에 비슷한 거짓말을 했다. 월차라든가 휴가라든가 뭐 그런 것들을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 이유없이 하루 쉬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니. 그래서 없는 병을 만들어 만났다. 물론 아프기는 했다. 봄인데 멀쩡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그 중 나이 어린,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른 중반인, P가 싱글벙글이다. 우리는 P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런 광채는 볼터치나 하이빔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빛이라는 것을 너무 잘~아니까. 그래도 짐짓 모르는 척 P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근자에 읽은 책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정유정의 소설과 신형철의 산문집이 대세인 것 같았다. 다들 <7년의 밤>에 대해 전혀 전문적이지 않은 소감을 말하고 <느낌의 공동체>을 복기하면서 낄낄거리거나 가끔 멍해지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P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지.  

물론 자질구레한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잘해라, 열심히 해라, 뭐 그런 이야기가 있었고, P는 뭘 잘해야 하나요, 뭘 열심히 해야 하나요, 등등의 말도 안되는 질문을 속눈썹 끔벅거리며 제법 진지하게 물었다. 모르지, 낸들 아냐, 뭘 잘해야 하는지, 뭘 열심히 해야 하는지, 그냥 힘껏 해라, 라고 얼버무렸는데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창피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P는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나름 실용적인 질문을 했다.
"언니, 주말에 만나기로 했는데, 뭘 입을까요?"
물어보기는 앉아있는 언니 세 명에게 했건만, 다들 나만 바라보니 참! 
"그러게....."
옆에 있던 K가 진짜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말한다. 
"야~야~ 그러지 말고 도움을 좀 줘라. P가 연애한다잖냐"
"P가 연애하면 나한테 떡이 생기냐, 아님 연봉이 오르냐, 아님 뱃살이 주냐?"
옆에 있던 L이 말한다.
"배가 아파서 뱃살이 줄지 않을까?" 
우리는 웃기지 않는 농담을 하고도 뻔뻔하게 웃고 있는 L을 약속이나 한 듯 쏘아 보았다.  

여튼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한 복장규정,이라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취향도 다르고 더 중요한 건 내 조언이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무조건 흰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
K와 L은 동시에 나를 보고 합창하듯이 따진다.
"아야~ 왜 고무신도 신으라고 하지?"
이런 무식한 인간들하고 내가 입을 섞고 있다니...다행히 P는 뭔가 느낌이 온 모양이었다.
"언니? 어떤 블라우스 어떤 스타일의 치마?"
나는 K와 L의 구겨진 얼굴은 무시하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블라우스는 일단 단추부터 중요한데, 진주모양 단추가 좋아, 소재는 실크면 좋고, 되도록 몸에 잘 맞지만 부드러워야 하고, 중요한 건 긴팔이어야 한다. 락스를 쓴 것 처럼 하얀 것 말고 크림빛이 살짝 도는 것으로. 치마는 검은 쉬폰이나 실크로 주름이 있는 플레어가 좋고 정강이 중간에서 끊어지는 그래서 발목이 나와야 하지, 블라우스를 치마 속으로 넣어 입고, 신발은 발가락이 보이는 샌들이 좋겠다. 요즘 유행하는 검투사들이 신는 것 같은 그런 징박힌 거 신으면 안되고, 킬힐이니 그런 것도 안된단다. 자연스럽고 조용해 보이는 것으로 신으렴."
말이 끝나기도 전에 K가 나를 흘겨보며 말한다. 
"야~야~ 도인 나셨네, 야! 그러고보니 너 그런 옷 많지? 다 작업용이었냐?"
"나는 한평생 작.업.을 한 적이 없다. 이 무식한 것들아!" 

그러니까 벌써 지난 토요일
그러니까 아끼던 동생의 결혼식이었다. 학교 후배도 아니고 직장 후배도 아니니 결혼식장에서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얼마나 좋은지. 여튼 꼭 그럴 때면 그동안 입지 못하고 고이 모셔둔 옷들을 죄다 꺼내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나는 무려 일곱 벌의 원피스를 입어보고 도로 벗었다. 어떤 건 이제 나이와 어울리지 않고, 어떤 건 시상식에나 입고 갈 만 하고, 어떤 건 지퍼가 안올라가고, 어떤 건 장만옥언니나 입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런 걸 내가 왜 샀을까나. 그래서 그냥 늘 입는대로 바지를 입었다.

결혼식장에서 만나기로 한 이제는 식구같은 J는 푸른 원피스를 입고 왔다. 바삐 왔는지 볼이 붉다. 아~ 이쁘다. 나는 J에게 손짓을 해 위치를 알려주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금요일에 만난 P에게 문자를 보냈다. 
"데이트 장소에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나가라. 그리고 약속장소까지 뛰어라!" 
P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니, 미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워하지 마라. 흰색이건 푸른색이건 이제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나를 너까지 미워하면 우짜겠냐. 더군다나 나는 지금 예식장에서 갈비 한 점 못 먹었다!!!! 

예식장에 함께 있었던 H, L, J 그리고 나는 예술의 전당으로 향해 커피를 마시고, 약속이나 한 듯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다름아닌 매화반점! 다른 동네 사는 사람들도 한 번씩은 왔다 간다는 맛집이라는데 정작 동네 주민인 나는 가보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더니 모두 매화반점에 가는 것에 동의했다. 예상했듯이 거의 사십분 가량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칭따오 맥주와 무려 다섯 가지의 요리를 시켜 기다렸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오래오래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기에 좋았다. 물론 개인적으로 가지튀김을 먹을 수 있어 매우 흡족하였더라는. 

그리고, 여행에 대한 이야기들. 어디로 갈 지 고민했다. 그런데 어디면 또 어떠냐. 물론 이성복의 시를 운운하며 남해로 갈까 싶었는데, H가 이성복시인과 이승복어린이를 헷갈려하는 통에 남해는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언젠가 내가 H에게 보낸 연서에 분명 이성복시인의 시를 적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H는 그때도 이성복과 이승복을 헷갈려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기형도는 또 어찌 기억할는지. 수학이나 건축에 나오는 명칭으로 알려나. 아이구나.   

* 이 글을 계속 쓰려고 했으나, 오늘 점심 식당에서 밥을 먹더가 돌을 씹었는데 하필이면 치료받은 치아에 걸렸다. 그리고 정말 어이없지만 떼웠던 치아의 부속물이 빠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 치과에 가야한다. 식당 아주머니는 계속 쌀에 돌이 있을 리 없다고 하시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돌을 씹었고 치아에 끼워둔 금은 빠졌는데.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살다보면. 돌이 씹히고, 떼워놓았던 치아의 금이 빠지고, 바람은 불고, 날은 째지고, 점심을 못 먹어 배는 고프고. 아주머니는 그럴 리 없다고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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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5-1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꺅 소리 나게 재미진 페이퍼입니다. 으흐, 굿바이 님, 제 옷도 좀 골라주심 안 될까여?
마지막은 이 무슨 시트콤스런 일이랍니까. 에혀. 부디 돈은 그다지 많이 안 들기만을 바랄 뿐.

굿바이 2011-05-17 09:58   좋아요 0 | URL
허접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치니님이 저는 꺅 소리가 나게 좋아요:)
그나저나 옷을 골라달라구요? 에에~ 뵌 적은 없지만 스타일이 무척 좋으실 것 같은데 이 무슨 망언이십니까!!!ㅋㅋㅋ
그리고 저는 삶이 그냥 시트콤이랍니다. 아~ 정말~

마노아 2011-05-16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 극장 한 편을 본 느낌이에요. 이렇게 드라마틱하다니! 치과 다녀오시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맛있는 것 드셔요. 저는 봄날의 수다 2편을 기다리겠습니다.^^

굿바이 2011-05-17 10:02   좋아요 0 | URL
덕분에 치과는 잘 다녀왔습니다. 견적이 생각보다 많아서...ㅜㅜ 에잇!
그나저나 봄날의 수다 2편을 기다리신다니, 참으로 은혜가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하늘을 가립니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

웽스북스 2011-05-16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J의 볼이 붉었던 건 뛰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포지틴트의 도움이었다는 것을 아뢰옵니다. 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치아는 이를 우째요 -_-

굿바이 2011-05-17 10:06   좋아요 0 | URL
엄훠!~ 포지틴트!!!! 당분간 P는 피해다녀야겠다 ㅋㅋㅋ

치아는...망했어. 치아가 깨지면서 부속물이 빠진거라 공사가 크네. 엉엉~

웽스북스 2011-05-17 15:52   좋아요 0 | URL
ㅎㅎ 어쨌든 볼터치도 하이빔도 아니긴 하니까. ㅋㅋㅋ

pjy 2011-05-2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기회에 홈쇼핑이지만 치아보험을 심각하게 고려보셔야될듯 ^^;
굿바이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번주 일욜에 친구? 결혼식장에 가야합니다..저는 신랑쪽인데 들리는 풍문으로는 그 아이의 친구들이 꽤 건질만 하답니다.. 해서......바람불면 날아가는 소녀가 꼭 붙잡고 매달리면 좋은 그런,안습몸매의 소유자로 큰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크림색의 진주단추 블라우스가 없답니다 ㅠ.ㅠ 물론 파란원피스도 없고, 뛰면 사우나댕겨온만큼 급 땀흘립니다ㅋㅋㅋ

굿바이 2011-05-20 11:2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안습몸매가 아니라 볼륨이 좋은거겠죠.
아무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제 생각으로는 말이죠 체격이 좀 있는 분들은 당당하게 입을 때 가장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

아참 신랑쪽 친구들이 꽤 건질만 하다구요? 눈 밝은 친구들이라면 pjy님의 매력을 금방 알겁니다. 그러니 씩씩하게 다녀오세요^^

pjy 2011-05-20 16:29   좋아요 0 | URL
네, 저 볼륨 죽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날씬한것들은 거적대기를 걸쳐도 미모가 돋보이는법이고~
볼륨몸매는 혼자 멀리 있으면 티 덜 납니다ㅋㅋ; 이래서 제가 왕따를 자초하나봐요~~ 청초하게는 무리군요! 역시 씩씩하게-_-;

굿바이 2011-05-20 18:01   좋아요 0 | URL
저와 함께 씩씩하고 쉬크한 동지들의 모임, 뭐 이런 거 하나 결성하실래요? :)
부디 신나는 주말 보내세요~

잘잘라 2011-05-2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주머니는 그럴리 없다 하시고'
마지막 문장이 콱- 와서 박힙니다.

굿바이 2011-05-20 18:02   좋아요 0 | URL
정말 자해공갈단이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억울해요, 사는 일이 ㅜㅡ

風流男兒 2011-05-30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 잘 다녀왔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