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를 점검하러 온 젊은 청년이 2011년 탁상용 달력을 내민다. 봉투에 싸여 있는 달력은 크기로 보아 올해의 그것과 똑같아 보인다. 올해와 똑같을지도 모를 한 해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 정녕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난감하기만 하다.  

생각하니, 매일 술을 마신다. 정확한 기억만을 더듬어도 2주째다. 2주 동안 숙취해소 음료를 세 번 마셨고, 두통약을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는 급기야 정종을 두 병 마시고, 맥주로 입가심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걸어오는 길, 배는 출렁거렸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아직은 술값을 치를 돈과 카드가 남아 있음에 감사했다. 이렇게 거르지않고 운동을 했으면, 아침에 바지 앞단추가 떨어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겠다. 실과 바늘을 찾는데 적어도 1시간을 쏟았는데, 결국 회장님에게 빌렸다. 난처하기만 하다.  

이십대에도 멀리했던 술을 이제와 퍼마시는 까닭이 무엇인지, 바지 단추가 떨어지고 나니 궁금해졌다. 무엇인지 정확히 꼬집어 낼 수는 없지만, 안다고 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어떤 이미지 하나가 떠오르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아버지_ 84년, 늦은 겨울 밤, 알콜솜처럼 젖은 입김. 풀어진 머플러, 바람에 얻어맞은 머리카락, 식어서 축축해진 호빵, 그리고 당신의 난감한 웃음_ 떠오르는 이미지에 따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얼얼하기만 하다. 

백석의 시집을 꺼내들고 차가워진 커피 한 사발을 들이킨다. 오늘은 살아내야 하니까. 저녁까지 끝내야 할 보고서는 마무리해야 하니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두통약이 아니라, 백석이다.  

 

적경寂境

신 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 오는 아츰 
나어린 아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즞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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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2010-12-0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신의 몸이, 목숨이 당신것만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소홀히 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못할 만큼 힘든 친구님!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주시길! 부디 잘 살아내주시길 !

굿바이 2010-12-03 11:33   좋아요 0 | URL
뉘신지 알 것 같소. 고맙소, 매우매우, 딥플리딥플리하게, 고맙소.

연말이고, 날도 추운데, 12월 중순쯤에 얼굴이나 봅시다.
추운 날, 밥은 먹고 다니는지, 밥값 없으면 언제든 문자로 계좌번호 찍으시오. 안녕~

향편 2010-12-0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두번재 단락을 읽으면서 어.. 잘못왔나? 하고는 서재를 이리저리 살폈어요. 2주째 술이라니, 여기는 굿바이님 서재인데, 이상하잖아요.ㅎㅎ
2주째 술먹는 페이퍼는 차좋아가 써야죠. 서재에는 일상의 별일을 쓰곤 하니까 제가 2주내내 술을 마시면 쓸만하지만, 굿바이님이 2주째 술이라니...... 이건 일상의 별일 수준이 아닌데요. 술을 왜그리 많이 마셔요~~~

백석과 함께 금주를...ㅎㅎ

굿바이 2010-12-03 11:38   좋아요 0 | URL
그렇군, 그간 나름 이미지 깔끔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려나요? ㅋㅋㅋㅋ

잘 모르겠는데 말이지, 술이 좋은 건 딱 하나 있는 것 같아. 나에게 좀 너그러워진다는 것. 내게 자비를 베푸는 그 누구가 없어, 스스로 자비를 베푸는 형국이니, 몸은 축나고, 배는 나오지만, 또 그렇게 서럽지도 않더라는~
그러나, 춘삼월 꽃노래도 한때라고, 다시 정상으로 복귀해야지, 백석과 함께!

가시장미 2010-12-03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뵈어요. ^^ 가시장미라고 합니다.
이웃의 글인줄 알았는데,즐겨찾기 등록이 안 되어 있더군요.
지금쯤 보고서 다 마감하시고,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시겠네요.
힘든 하루 잘 마무리 하시고, 재충전하셔서 내일은 상쾌하게 시작하시길 바래요.
내일만 지나면 주말이잖아요. 으흐

사실 이 글에 이런 댓글을 남기는 게 실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님의 글이 제 마음을 움직여, 글을 남기지 않을 수가 없네요.
모르는 사람의 글이 가끔은 더 진실하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깐요.
저의 마음도 님에게 진실로 다가가 응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누구나 각자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있고, 아픔이 있다는 걸 알지만...
가끔은 그 정도가 모든 사람에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길 바라곤해요.
그 바람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게 위안이
될 때도 있지만, 딱 그만큼만 힘들어 할 수 있다는 게 더 큰 위안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럼, 앞으로 종종 또 뵈어요.
편안한 주말 되시길..

굿바이 2010-12-03 11: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새벽에 바람이 세찼죠? 제가 사는 곳은 한강근처라 바람이 부는 날에는 잠들기가 쉽지 않답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 넙죽 받습니다. 뭔가 받아보면 또 누군가에게 줄 수도 있는 것이라는, 그런 식상한 이유를 들이대면서, 가시장미님이 보내주신 진정을 오롯이 챙깁니다.

오늘은 금요일, 무엇이든 행복한 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토깽이민정 2010-12-0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

내가 있을때는 술잔도 잘 받지도 않더니 눈오는 겨울
굿바이 언니가 술을 마신다

태평양 건너 저 멀리서
민정이는 컴퓨터를 보며 혀를 찬다

컴컴한 부엌에서 형부가 언니의 술국을 끓인다 (끓이고 계실까?)
바다건너 또 한 부엌에서도 북어국을 끓인다

언니!!!
술 고만 자시고
커피도 줄이시고
차를 드시어요!

웽스북스 2010-12-04 01:25   좋아요 0 | URL
태평양 건너 저 멀리서
컴퓨터 보며 혀를 차는 민정언니를
웬디는 상상한다

언니의 웃음소리가 귀에 울리는 새벽이에요 :)

굿바이 2010-12-06 09:55   좋아요 0 | URL
진짜 민정이 웃음소리가 들려 ^^

이 풍진세상을 살다보면 말이다......ㅋㅋㅋ
여튼 다 네가 서울에 없어서 빚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암만!

꽃도둑 2010-12-03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제목이 재밌네요..'늘 제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나는 지난 밤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따!!!!! 왜?왜?왜 그랬어요?...

굿바이 2010-12-06 09:56   좋아요 0 | URL
뜨앗! 제가 지난 밤 저지른 추태를 알고 계십니까?

누구시오????? ㅎㅎㅎ

2010-12-03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6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우 2010-12-06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구바이님.
백석에는 커피를 마시지만, 굿바이님의 세밑 84년도 아버님에는 술말고 다른 걸 마시시기를.
부군께 미역국을 끓여 달라시던가... ㅎㅎㅎ
웃지만 굿바이님의 백석은 시큰합니다.

굿바이 2010-12-06 09:48   좋아요 0 | URL
동우님, 마음도 몸도 산만해서 연락도 못드렸습니다.
이렇게 사람 노릇을 하면서 사는게 어려운 일인줄 몰랐습니다.

연말이라 바쁘시겠습니다. 그래도 건강관리 잘 하시고, 무탈한 12월 보내시길 바랍니다.

cyrus 2010-12-0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정본 백석 시집' 을 읽고 있는게 굿바이님의 리뷰를 보니
더 반갑네요. 저도 굿바이님이 소개하신 '적경' 이라는 시가 무척 좋더라고요.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고향 마을의 정겨움이라고 해야되나요,,
백석의 시에는 마을 사람들의 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은거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굿바이 2010-12-06 13:26   좋아요 0 | URL
언제 꺼내봐도 참 좋은 시집입니다.
백석이 살았던 시절의 풍경들이 이제는 참으로 옛일이 되었지만
시인이 사랑했던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은 것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