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세친구’를 보다 -
뜬금없이 제법 오래 전에 개봉 된 영화 ‘세친구를 봤다.이 영화, 참 사실적이다. 감독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지 않은 세 친구의 일상을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몰래 카메라 찍듯 찍었다. 극장에서 내가 이 영화를 봤다면 좋게 말하면 주변 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봄으로써 그들이 곤궁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고 했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내 삶도 갑갑한데 갑갑한 영화까지 돈주고 보다니 아깝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그래서 요즘같이 일상이 고달픈 사람들, 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도대체 뭘 믿고 임순례 감독은 이런 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을까? 회피하고 싶어도 회피할 수 없는 갑갑한 현실을 그대로 찍어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세친구’중 만화가가 되고 싶어 하는 친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공모전에 출품도 하고 출판사도 드나든다. 그러나 순진한 이 친구가 공모한 작품을 다른 사람 이름으로 출판해서 팔아 먹고 일본 만화를 뼈끼라는 일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말하는 세계에 아직 발을 들여 놓지 못하고 있다. 싹수는 보이는데 글쎄?
또 한 명, 삼겹살집 아들, 얘 무슨 생각으로 사는 지 모르겠다. 사는 낙이 먹는 것이고, 시간 나면 비디오 보는 일 외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아무데나 취직해서 용돈이라도 벌어보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주인에게 폐만 기친다.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또 다른 한 명, 여자애 같이 거울 보는 거 좋아하고 머리 만지는 일에 흥미를 보이는 친구. 엄마 한테 재수학원 다닌다고 거짓말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미용학원에 등록한 것 까지 좋았다. 매사에 소극적인 아이가 어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역시 소심하다. 대학 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할 용기가 없어 미용사의 길을 포기한다. 동네 아줌머니 머리 만지는 솜씨 보니 그쪽으로 재능이 타고 난 것 같던데 안타깝다. 얘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 갑갑하다.
그렇지만 세친구는 앞 날이 창창한 젊은 친구들, 지금 비록 갑갑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앞날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법, 그러나 세친구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나름대로 이 친구들이 어떻게 살아갈 지 대충 감이 온다. 감독은 스무살 청춘들이 비정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망가져 가는 지를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세친구’ 중 만화를 그리는 친구는 군대에서 상관에게 맞고 청력을 잃는다. 그래서 의병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세상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는 이제 이 친구와는 상관이 없다. 다행인 것은 이 친구가 청력을 잃었음에도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거나 절망스런 얼굴이 아니라 담담한 표정으로 시끌벅적한 시장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세상의 소리들은이 친구를 좌절하게 하고 절망의 늪으로 빠뜨렸기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한 건지도 모르겠다. 귀는 닫혀 있지만 눈을 세상을 향해 열려있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만화가의 꿈을 이룰 것 같다. 정상인들이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것들을 느끼고 그려내어 정상인 만화가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그려내는 만화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쓰는 일, 몸을 움직이는 일을 귀찮아하고 먹는 것에만 온 에너지를 다 쏟아붓는 친구는 걱정스럽다. 살을 뺀다 뺀다 말만 했지 의지가 부족해서 살을 빼지도 못할 것 같고,게으르고 미련해서 취직하기 바쁘게 쫓겨나기 일쑤일 것이고...아버지 등살에 계속 집에서 빈둥 거리며 밥만 축낼 수는 없으니 부모님이 삼겹살 집을 해서 번 돈으로 비디오 방을 하나 내어 자기가 좋아하는 에로영화 실컷 보며 파리만 쫓으며 살아갈 것 같다.
나머지 한 친구, 미용일을 배우던 아이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게이 클럽을 찾아 가기도 하지만 자신이 드나들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게이가 그 친구에게 다가 와 느끼한 행동을 했을 때 아주 어색해 하고 낯설어 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이라 어색해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아이 표정으로 보아 게이에게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다. 대신 미용실을 하는 엄마가 아빠에게 자주 맞은 휴유증으로 미용실 문을 자주 닫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예전에 머리를 해 준 적이 있는 동네 아주머니의 권유로 아버지 몰래 동네 아주머니들 머리를 해 주기 시작하고 아줌마들의 입소문으로 그 동네에서는 제법 인정 받는 미용사가 될 것 같다. 실전을 통해 익힌 실력으로 미용사 자격증 따는 것은 당연지사고.
세 친구들, 특히 만화를 그리는 친구와 미용사를 꿈꾸는 친구에게 ‘답답한 현실 앞에 절대 무릎 꿇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스무살도 되는 일 하나 없이 갑갑하고 막막했지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잘 살아가고 있듯이 세친구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