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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없는 날 ㅣ 동화 보물창고 3
A. 노르덴 지음, 정진희 그림, 배정희 옮김 / 보물창고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잔소리 해방의 날’이라는 동화책 제목을 보는 순간 ‘잔소리 비’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태혜선이라는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었는데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입술 세 개가 쉬엄없이 침을 튀기고 있고, 입술 보다 작게 그려진 아이는 우산을 들고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산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가 얼마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지, 어른들 입술보다 작게 그린 아이의 모습에선 잔소리를 들을 때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지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 때 이 그림을 함께 본 아이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맞아요. 맞아요. 얘 마음이 제 마음이에요.”
그런데 ‘잔소리 해방의 날’ 책 제목을 보고서도 그랬다.
“맞아요. 하루라도 잔소리에서 해방되는 날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내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 잔소리 해방의 날 너희는 뭐하고 싶은데?”
“ 학원 안가고 친구들과 실컷 놀고 싶어요.”
“ 하루종일 컴퓨터 게임 하고 싶어요.”
......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아이들이 책 제목만 보고도 벌써 보고 싶다고 난리다. 그런데 책을 읽어본 아이들 반응은 약간 실망하는 눈치다. 푸셀이 잔소리 없는 날 겪는 일들이 우리 나라 아이들에게 공감을 받을 만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소리 해방의 날’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 책을 읽은 아이들도 푸셀이 잔소리 해방의 날 겪는 일을 보면서 잔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고 했으므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수록 잔소리에 질린 아이가 갑자기 잔소리 없는 날을 맞았을 때 보이는 반응이 실감난다. ‘위험한 일만 아니면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겠다’는 부모 말에 처음에는 아침 식사하고 나서 양치질을 안하기, 먹고 싶은 잼을 실컷 먹기를 통해 부모의 반응을 테스트한다. 부모가 약속 했던 대로 잔소리를 안 하시는 것을 보고 조금씩 벌이는 사건의 강도가 강해지고 그래도 부모가 잔소리를 안하시는 것을 보고 ‘보통 때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뜬금없이 파티를 열겠다더니 술주정뱅이를 데리고 와서 부모님을 놀래키기도 하고, 위험한 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자겠다고 해서 부모께 걱정을 끼치기도 하고.
하지만 ‘보통 때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겪으면서 푸셀은 깨닫는 것이 있다. 덩달아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깨닫는다.부모가 잔소리를 하는 것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과 무책임한 행동 뒤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술주정뱅이 아저씨의 썩은 이들을 보고 어머니가 ‘음식을 먹은 후에는 양치질을 해라’고 하시는 까닭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공원에서 친구와 함께 밤을 보내기로 했을 때 밤이슬을 맞으며 공원 벤치에 앉아 자식의 안전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통해 잔소리 속엔 부모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냥 즐겁게 하루를 보내더라도 해야할 일은 잔소리를 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은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해야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이 책을 읽어도 느끼는 것이 많다. 아이가 못마땅한 행동을 하더라도 일일이 간섭하고 잔소리 하기 보다는 지켜보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푸셀이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술주정뱅이 아저씨를 파티 참석 손님으로 데리고 왔을 때 보통 부모라면 아무리 잔소리 해방의 날이라도 버럭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푸셀의 엄마는 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꺼내와서 거실로 데려가서 몸을 누이고 덮어준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아저씨에게 음식을 차려준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부모가 음식을 먹은 후에 양치질 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까닭과 술 취한 사람은 위험하다는 것, 아무리 술주정뱅이라고 해도 함부로 인격을 무시하면 안된 다는 것 등을 스스로 깨닫는다.
아이들은 잔소리 듣는 것을 싫어한다. 어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한다. 고대 이집트 벽화에 ‘요즘 어린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낙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어른들은 여전히 잔소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잔소리를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아이와 하기 싫어도 할 수 밖에 없는 부모 모두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책이다. 아이와 부모 모두를 위해서도 잔소리 해방의 날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