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를 나와 선본사를 가려던 계획을 바꿔 원효암만 가기로 했다. 선본사 뒷산 중턱에 있다는 탑과 정상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을 보려면 불굴사랑 환성사는 아무래도 가기 힘들 것 같다.그래서 선본사 가는 길을 따라가다 원효암 진입로를 알리는 표지판을 보고 방향을 틀었다.가파른 산길을 제법 올라가니 평지에 다소곳이 앉은 원효암이 나왔다

 원효암은 문무왕 8년에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지만 조선시대 중창한 건물과 80년대 새로 지은 건물 등은 86년에 난 산불로 모두 타고 지금 있는 극락전,산령각 같은 건물들은 90년대 지었단다.사자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가니 조용하다.



(원효암 사자루)



(원효암 극락전 뒤에서 본 풍경)

 극락전 앞 마당이 아닌 화단에는 통일신라 탑으로 추정된다는 자그마한 3층석탑이 화단에 심어논 나무같이 서 있다.



(원효암 3층 석탑)

 옥개석 모서리는 떨어져나갔고 이끼가 잔뜩 끼어있다. 다른 탑들은 사찰 마당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섰는데 .... 스님이 기거 하시는 요사채 뒷편 마당에는 꽃이 만발한 밤나무 한 그루가 있다.밤나무가 절 마당에 서 있는 까닭은 원효대사 관련 설화와 관련이 있다.


  극락전 뒤편으로 올라가니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마애좌불상이 계셨다.



감실을 얕게 파고 양각으로 새겼는데 얼굴부분은 마모가 심해 표정을 알아 볼 수가 없다. 광배 부분에 무늬가 없어 밋밋하고 연화좌대 무늬도 멋이 없다. 그런데  연화좌대 가운데 줄기인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연꽃 줄기 끝에 앉아 계신 것처럼 보인다. 

 마애좌불상을 보고 내려 와 공양주 할머니께 커피를 얻어 마시고 불굴사에 갔다. 가는 길에 보니 절 오른쪽에 있는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다



.나중에 보니 그 바위 뿐만 아니라 원효굴 가는 길도 온통 바위 절벽이다. 원효대사와 김유신 장군이 저 굴에서 기도를 하고 원을 이루었다는데.

 

  불굴사 들어서니 인부들이 건물 보수 작업을 하고 있는 약사전이 보인다. 안에 들어가니  약사여래입상이 바닥 바위 위에 서 계신다. 바위에 세워 놓은 약사여래입상을 보호 하기 위해 후대에 약사전을 지은 모양이다. 적멸보궁 아래 마당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약사전 앞에 있는 석등 한 기)


(불굴사 삼층석탑과 주변에 놓인 부재들)

이 탑은 통일신라 시대 탑이란다. 2층과 3층 옥개석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곳도 있고 1층 기단 모서리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단정하고 균형잡힌 탑이다. 탑 옆에는 제 자리를 잃은 부재 몇 개가 놓여있다.  규모가 컸던 사찰이었던 모양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건물이 500동에 이를 만큼 규모가 큰 사찰이었단다. 그런데 유생들의 횡포를 막으려 행한 일로 인해 산사태로 절 건물을 다 잃고 건물 몇 째만 복원, 오늘에 이르렀단다. 

 절 오른쪽에는 원효굴 가는 길이 있다. 절벽 바위 안에 원효대사가 수도하던 곳이자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렸던 굴이 있다.



지그재그로 놓인 가파른 철제 계단과 난간을 잡고 올라가니 굴 속 바위 가운데 부처님이 앉아계시고 좌우로 금강역사상과 인왕역사상이 계신다. 조성시기는 그리 오래돼 보이지는 않는다.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굴 안에 있는 약숫물을 마셨다. 맛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바위 돌틈 사이에 약수가 흘러나오는 것도 신기하다.. 철제 계단을 타고 바위 사이를 헤집고 올라가니 500나한 중 신통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이 나온다.



(원효굴 위 독서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신단다. 

  불굴사를 내려와 환성사엘 갔다. 이곳은 경산에 사는 일행 한 명이 적극 추천해서 가게된 절집이다. 산모롱이 몇 개를 돌아 제법 산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 환성사 주차장이 보였다. 추천해 준 일행이 환성사라고 했을 땐 생각나는게 없더니만 일주문을 보니 알겠다. 누군가가 ‘복원을 우째 그리 해 놨는지?’ 라고 했던 그 문.


(환성사 일주문,2005년가지 네걔의 돌기둥만 서 있던 것은 이후 복원했다)

일주문에서 수월관까지 오르는 길이 참 좋다.



(환성사 수월관)

  수월관(水月觀)은 쌍계사 팔영루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도교적인 느낌을 주는 이름 때문인지 정자 같다.


(일주문에서 수월관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는 이 사찰이 지금처럼 작아지게 된 원인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 오는 연못이 있다)

수월관 밑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대웅전 앞에 독특한 탑 한기와 등잔을 피우던 두 돌기둥이 보인다. 먼저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고 절 내부를 돌아봤다.


(환성사 대웅전)

그런데 수미단이 눈길을 끈다. 다양한 조각 작품들을 하나하나 액자에 넣어 전시하듯 둘러놓았다. 그 중에 네모난 판을 들고 약간 쭈그린 상태로 울상을 짓고 있는 사람 모습이 익살스럽다.    

  대웅전을 나와 탑을 살펴보기 전에 안내판을 찾았다.탑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 탑을 몇 층 석탑이라고 해야 하나?



1층 기단과 2층 기단은 흔히 볼 수 있는 탑 모습을 하고 있는데 탑신부분은 파격적이다. 그런데도 절집 분위기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어우러진다.수월관에 앉아 조용한 절 마당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려왔다. 오는 길에 오른쪽에 있는 부도밭에 들렀다.



약사여래불 옆에 기단부 복련 조각이 이색적인 부도 한 기가 눈에 뛴다. 연꽃잎 조각을 보니 정성들여 멋을 부렸다.


  환성사를 나오니 햇볕이 기운을 잃고 있다.

 * 좋은 사람들과 느긋하게 팔공산 답사를 한 후 경산서 저녁을 먹고 그래도 에너지가 남아서  내려 오는 길에 첨성대랑 안압지 야밤답까지 하고 내려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작년, 팔공산 자락에 있는 동화사, 부인사, 파계사 같은 절집 몇 군데를 답사한 적이 있다. 그 때 팔공산 자락에 있지만 못 돌아본 절집 몇 군데를 팔공산 자락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지인과 돌아보기로 했다. 답사 코스는 신령면에 있는 거조암을 시작으로 ,은해사,백흥암,원효암,불굴사,환성사.

  거조암은 고려시대 지은 영산전이 볼만하다는데 초파일에 달아놓은 등을 떼지 않아 앞면은 볼 수 없었다.측면과 뒤란을 둘러보니 멋부리지 않아서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물이다.


(거조암 요사채)


(거조암 범종각 사물)


(거조암 영산전 서까래 끝에 달린 풍경)

삼층석탑도 등 속에 파묻혔다.


(거조암 삼층석탑)

 이 탑은 고려시대 탑으로 상층기단 면석과 각 몸돌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다. 영산전 안에는 오백나한을 모셔놓았다. 나한 한분한분 표정도 모습도 제각각이다. 개구쟁이,새침떼기,얌전이,왕삐짐... 별명을 붙이기도 하고 표정이나 모습을 보고 흉내를 내 기도 하면서 보니 재미있다.

  거조암을 보고 내려와 은해사엘 갔다. 아침을 일찍 먹고 출발해서 그런지 다들 배가 고프다고 난리다. 일단 밥을 먹고 사찰을 둘러 보기로 하고 나무 그늘을 찾았다. 그런데 은해사 주변 숲에 있는 나무들이 이름표를 달고 있다. 알고 보니 '수목장‘한 나무들이었다.부도밭 앞에는 범로스님의 수목장한 나무도 있었다.


(부도밭 앞에 있는 범로스님 수목장 나무)

은해사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와 건물을 돌아보니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은해사 대웅전)


(은해사 대웅전 벽에 그려놓은 심우도 일부)

오른쪽서부터 한장한장 나름대로 해설을 하며 봤다. 은해사 앞에 두 갈래 폭포가 흘러내고 있다.


(은해사 앞 계곡 폭포)
 물소리도 모습도 시원하다. 

 은해사를 둘러보고 백흥암엘 갔다. 하안거 중인 스님들이 조용조용 밖으로 나오고 계신다. 휴식 시간인 모양이다. 초파일 외엔 들어갈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해서 먼빛으로 건물만 둘러봤다.


(백흥암 보화루)

극락전 안 수미단 조각이 볼만하다는데 닫힌 보화루 문 사이로 빛바랜 단청을 입은 건물만 목을 쭈욱 빼고 보다가 왔다.

  백흥암을 갔다 오며 보니 은해사 경내로 걸어들어오는 숲깊에 부도밭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맞은편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건너 가 보니 신기한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사랑나무.



느티나무 가지 하나가 참나무에 딱 붙어 뻗치고 있다. 은해사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숲길을 걸어들어오면 수많은 나무들과 더불어 볼 수 있는 나무다. 사랑나무를 보고 부도밭에 갔다. 이 곳에 있는 부도들은 옥개석이 몸돌보다 커서 어색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맘 때 쯤 산과 들 지천에 먹거리가 가득하다. 오디, 산딸기, 앵두, 운 좋으면 알 굵은 보리수 열매까지. 팔공산 자락도 예외는 아니다. 현충일에 팔공산 자락 답사를 갔다가 앵두랑 오디 원없이 먹고 왔다.

영천 신령면에 있는 거조암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에 뽕나무가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라 양이 많진 않았지만  새까맣게 익은 오디가 제법 달려있었다. 길옆에 차를 세우고 오디를 따 먹었다. 같이 간 사람들은 맛있다고 야단들이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앵두랑 딸기도 지금 제철이니까 오가는 길에 눈 크게 뜨고 잘 보라고^^

  한번 맛본 오디 맛에 반한 두 아줌마와 한 처자는 이 때부터 주변 나무들에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한다. 드디어 원효암을 올라가는 길에 빨갛게 익은 앵두가 조랑조랑 열려 있는 걸 눈 밝은 일행 한 사람이 봤다. 하지만 내려오는 길에 따 먹기로 하고 올라갔다.  원효암 극락전 뒤 마애좌불상을 보고 오는 길에 산딸기 2개를 땄다. 딸기 나무는 많은데 음지라 그런지 열매가 열리지 않아 반개씩 나눠먹었다.그 맛은 짧고도 깊었다. 맛을 느끼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어서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없다. 

  원효암을 둘러보고 내려 오는 길에 오면서 본 앵두나무 근처에 차를 세웠다. 앵두나무 주인인듯한 댁 가게에 들어가 앵두 좀 따먹어도 되겠는냐고 여쭤 봤다. 인심 좋은 주인 아주머니께서 허락을 하셨다. 우린 행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아줌마 바람 났다는 둥~ 개사한 노래를 불러대며 앵두를 따먹었다.


앵두 맛도 맛이지만 앵두따는 재미도 쏠쏠했다 

 환선사를 갔다가 내려오는 길, 새까맣게 익은 오디가 조랑조랑 달린 뽕나무를 발견했다.우리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어쩌구 저쩌구 이러면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오디를 따 먹었다.



그런데 다 따먹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절반 정도는 남겨두고 왔다. 지금쯤 그 뽕나무에 오디가 새까맣게 달려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통일관에서 점심을 먹고 숭양서원에 갔다



 이곳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집터로 선조 6년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의논 끝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아울러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앞 쪽에 교육공간, 뒤쪽 언덕엔 제사 공간을 배치한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적이 모습을 하고 있다.

  숭양서원 들어가는 입구에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하던 돌(마상대,마하대)이 있다.



 오른쪽, 왼쪽 각 1개씩 2개가 있다. 삼면에 사자와 개를 조각해 놓았다. 앞 쪽에 교육하는 공간은 앞 뒤가 개방되어 있다. 뒤에 있는 제사 공간도 개방되어 있다. 위패를 모신 공간까지 다 개방해 놓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제사를 모시는 공간은 신성시 하는데 비해 북한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서의 의미보다 관광객들에게 정몽주 유적을 보여주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 왼쪽 방에는 정몽주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개성 시내를 가로 질러 선죽교와 표충비를 보러 갔다. 


  선죽교는 919년 축조된 건축물로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된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정몽주가 피살되기 이전에는 선지교라고 불렀다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저녁 참대가 솟아 올랐다고 했서 선죽교 (善竹橋)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원래 난간석은 없었으나 후손들이 다리를 보호 하기 위해 후에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옆에 있는 다리 또한 후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기 전에 이 곳에 정몽주의 피가 아직도 이곳에 남아있다는 예기를 들었던 터라 일행에게 물어보니 밝그레한 부분을 가리킨다.



 선죽교 옆에는 한석봉이 쓴 선죽교 비가 있다.



 선죽교 맞은 편에 고종이 표충비를 만들면서 세웠다는 표충각이 있다.


(표충각)
이곳에는 영조와 고종이 정몽주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2개가 있다.



 왼쪽 비는 영조가, 오른쪽 비는 고종이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안내원 말로는 왼쪽은 숫 거북, 오른쪽은 암 거북인데 총각은 오른쪽 거북의 머리를, 처녀는 왼쪽 거북의 머리를 만지면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있단다. 그 얘기를 듣고 다시 거북을 보니 고종이 세운 오른쪽 거북 등껍질 무늬가 왼쪽 거북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비문에 쓰인 글씨는 왕들의 친필이고 이 비를 세운 목적을 써 놓았다고 한다.

 

  개성 시내를 가로 질러 고려시대 성균관 건물 18채 중 4개를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는 고려 박물관에 갔다.


앞 마당에는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를 듯한 모습을 한 두 마리의 용이 있다. 한 마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고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널찍한 공간에 건물들이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있고 수백년된 나무들이 가지를 마음껏 펼치고 서 있다.



건물만 봐도 좋다.




(고려 박물관 입구)
성균관 바깥에 우리가 보고자 하는 탑 3기와 석등, 탑비등의 문화재가 있어 사람들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역순으로 답사를 했다. 

  먼저 개국사 석등.



개국사는 고려시대 세운 절로 조선시대 폐사된 사찰이란다. 통일신라시대 화려한 장식의 석등들과는 달리 장식이 간결하다. 하지만 웅장하고 호방한 느낌을 주는 이 탑은 용감하고 씩씩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이어받은 고려 사내 같다 . 받침단 윗 연꽃 조각과 화사석 아랫면의 연꽃 조각이 다르다. 화사석 윗면 조각은 연꽃이 활짝 피어있는 모습으로 그 사이사이 안에 있는 연꽃잎도 조각해 놓았다.간결한한 장식이 더 마음을 끄는 석등이다. 


  석등 왼쪽으로 난 길 위에 불일사 5층 탑이 있다.



불일사는 광종 2년 국왕의 어머니 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판문군 보봉산 기슭에 건립한 사찰로 조선시대에 폐사되어 현재는 동서 150만, 남북 100칸의 옛절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절의 규모로 알수 있듯이 이 탑 또한 규모에 어울리게 높이가 약 7.44미터에 이른다. 각 전각에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불일사 터에 서 있던 때를 생각하면 이 탑은 자존심이 많이 상할 것 같다. 지금은 고려 박물관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섰지만 언젠가는 제 자리를 찾아 서게 될 것이다.그 나마 성균관에 뜰에 모셔 놓지 않고 바깥 낮은 언덕빼기에 모셔놓았으니 덜 답답해 보인다. 

  흥국사탑


  이 탑은 기단부는 온전하게 남아있는데 탑신부가 없고 심하게 파괴된 옥개석 3개가 위에 얹혀 있다. 특이한 것은 기단 면석에 이 탑의 건립 연대와 동기, 세운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도심 속의 섬 선유도’라는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분이 올린 자료를 보니 ‘글자 크기 직경 3cm의 해서체로 음각했으며, 석탑기의 적힌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瓚)이 나라의 태평과 집안의 평안을 빌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고 하며 건립 연대는 제8대 현종 12년(1021)이란다. 그래서 다른 석탑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기도 한단다. 

  흥국사탑 옆에 유수영 문루가 있다


  조선시대 지방 관청의 정문으로 1394년에 건립된 것을 1768년에 여러 건물들과 함께 고쳐 지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 때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앞 네 개의 석주 중 가운데 두 석주에 "관리중진(管理重鎭)", "분사고도(分司故都)"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흥국사 문루 앞에는 헌화사 탑비와 헌화사 7층석탑이 있다.



헌화사는 고려시대 역대 왕실의 각종 법회가 열렸던 사찰이라고 한다. 그 곳에 있던 헌화사 탑비나 7층 석탑도 조각이 섬세하고 정성을 많이 들인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탑신에 부처님과 보살 조각을 새겨넣었다.

 



 현재 현화사 탑비와 7층석탑 둘 다 북한의 국보다.
 
  탑비는 귀부 탑신 이수가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탑신에는 헌화사 건립 내역을 알 수 있는  2,400여자의 글자가 앞 뒤로 새겨져 있다.



비신 좌.우측면에는 용트림하는 두 마리의 용이 아주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다

  개성 관광은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우리 조상들의 유물이나 유적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던 것은 단편적이나마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협동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썬글라스를 낀 사람, 기타를 메고 가는 사람, 안 보는 듯 하면서 흘깃흘깃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던 초등학생.

  개성 시내와 봉동을 지나오면서 머릿속에 ‘통일비용’문제가 떠올랐다.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통일을 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통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낡고 오래된 건물들을 보니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08-05-19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용은 다른 말로 투자가 될 수 있죠. 내수시장에 엄청난 활기가 될 수 있답니다.
그나저나 사진만 봐도 좋네요. 부럽습니다.

다솜 2008-05-19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그런데 새로 지은 건물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와 주변 마을들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더군요.나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사람이구나 했어요
 

 오전 일정을 마치고 13첩 반상기로 유명하다는 통일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우리는 11첩 반상기에 담은 개성 음식들을 먹었는데 숙주 나물, 묵,도라지 나물 무침, 김부각,오이무침,국물김치,오리알 1개, 소고기 장조림, 마늘 장아찌 등이 나왔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요리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심심하다는 불평들을 많이 하셨지만 나는 맛있었다. 우리는 2달러를 주고 냉면도 한 그릇 시켜 먹었는데 조미료 맛이 아닌 재료 맛이 그대로 우러나 역시 맛있었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분들 중 금강산 관광을 갔을 때 옥류관에서 서빙 하던 아가씨들은 하나 같이 예쁘더만 이 곳에는 우째 이래 못생긴 애들만 데려다 놨냐고..우스개 소릴 했다.

우리가 식사했던 통일관 가까운 곳에 고려 공양왕 때 조성했다는 개성 남대문이 있었는데 나무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남대문이 잘 보이는 곳에서 내려 서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개성 시내가 찍힐 수도 있다고 북한 안내원들이 막았다. 개성을 다녀와서  겨울에 이곳을 다녀온 분들이 블로그에 올린 사진을 보니 남대문 루에 유명한 연복사 종이 보존되어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간 분들은 남대문의 대략적인 형태만 눈에 담아 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