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관에서 점심을 먹고 숭양서원에 갔다
이곳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집터로 선조 6년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의논 끝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아울러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앞 쪽에 교육공간, 뒤쪽 언덕엔 제사 공간을 배치한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적이 모습을 하고 있다.
숭양서원 들어가는 입구에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하던 돌(마상대,마하대)이 있다.
오른쪽, 왼쪽 각 1개씩 2개가 있다. 삼면에 사자와 개를 조각해 놓았다. 앞 쪽에 교육하는 공간은 앞 뒤가 개방되어 있다. 뒤에 있는 제사 공간도 개방되어 있다. 위패를 모신 공간까지 다 개방해 놓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제사를 모시는 공간은 신성시 하는데 비해 북한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서의 의미보다 관광객들에게 정몽주 유적을 보여주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 왼쪽 방에는 정몽주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개성 시내를 가로 질러 선죽교와 표충비를 보러 갔다.
선죽교는 919년 축조된 건축물로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된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정몽주가 피살되기 이전에는 선지교라고 불렀다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저녁 참대가 솟아 올랐다고 했서 선죽교 (善竹橋)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원래 난간석은 없었으나 후손들이 다리를 보호 하기 위해 후에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옆에 있는 다리 또한 후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기 전에 이 곳에 정몽주의 피가 아직도 이곳에 남아있다는 예기를 들었던 터라 일행에게 물어보니 밝그레한 부분을 가리킨다.
선죽교 옆에는 한석봉이 쓴 선죽교 비가 있다.
선죽교 맞은 편에 고종이 표충비를 만들면서 세웠다는 표충각이 있다.
(표충각)
이곳에는 영조와 고종이 정몽주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2개가 있다.
왼쪽 비는 영조가, 오른쪽 비는 고종이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안내원 말로는 왼쪽은 숫 거북, 오른쪽은 암 거북인데 총각은 오른쪽 거북의 머리를, 처녀는 왼쪽 거북의 머리를 만지면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있단다. 그 얘기를 듣고 다시 거북을 보니 고종이 세운 오른쪽 거북 등껍질 무늬가 왼쪽 거북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비문에 쓰인 글씨는 왕들의 친필이고 이 비를 세운 목적을 써 놓았다고 한다.
개성 시내를 가로 질러 고려시대 성균관 건물 18채 중 4개를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는 고려 박물관에 갔다.
앞 마당에는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를 듯한 모습을 한 두 마리의 용이 있다. 한 마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고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널찍한 공간에 건물들이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있고 수백년된 나무들이 가지를 마음껏 펼치고 서 있다.
건물만 봐도 좋다.
(고려 박물관 입구)
성균관 바깥에 우리가 보고자 하는 탑 3기와 석등, 탑비등의 문화재가 있어 사람들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역순으로 답사를 했다.
먼저 개국사 석등.
개국사는 고려시대 세운 절로 조선시대 폐사된 사찰이란다. 통일신라시대 화려한 장식의 석등들과는 달리 장식이 간결하다. 하지만 웅장하고 호방한 느낌을 주는 이 탑은 용감하고 씩씩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이어받은 고려 사내 같다 . 받침단 윗 연꽃 조각과 화사석 아랫면의 연꽃 조각이 다르다. 화사석 윗면 조각은 연꽃이 활짝 피어있는 모습으로 그 사이사이 안에 있는 연꽃잎도 조각해 놓았다.간결한한 장식이 더 마음을 끄는 석등이다.
석등 왼쪽으로 난 길 위에 불일사 5층 탑이 있다.
불일사는 광종 2년 국왕의 어머니 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판문군 보봉산 기슭에 건립한 사찰로 조선시대에 폐사되어 현재는 동서 150만, 남북 100칸의 옛절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절의 규모로 알수 있듯이 이 탑 또한 규모에 어울리게 높이가 약 7.44미터에 이른다. 각 전각에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불일사 터에 서 있던 때를 생각하면 이 탑은 자존심이 많이 상할 것 같다. 지금은 고려 박물관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섰지만 언젠가는 제 자리를 찾아 서게 될 것이다.그 나마 성균관에 뜰에 모셔 놓지 않고 바깥 낮은 언덕빼기에 모셔놓았으니 덜 답답해 보인다.
흥국사탑
이 탑은 기단부는 온전하게 남아있는데 탑신부가 없고 심하게 파괴된 옥개석 3개가 위에 얹혀 있다. 특이한 것은 기단 면석에 이 탑의 건립 연대와 동기, 세운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도심 속의 섬 선유도’라는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분이 올린 자료를 보니 ‘글자 크기 직경 3cm의 해서체로 음각했으며, 석탑기의 적힌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瓚)이 나라의 태평과 집안의 평안을 빌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고 하며 건립 연대는 제8대 현종 12년(1021)이란다. 그래서 다른 석탑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기도 한단다.
흥국사탑 옆에 유수영 문루가 있다
조선시대 지방 관청의 정문으로 1394년에 건립된 것을 1768년에 여러 건물들과 함께 고쳐 지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 때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앞 네 개의 석주 중 가운데 두 석주에 "관리중진(管理重鎭)", "분사고도(分司故都)"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흥국사 문루 앞에는 헌화사 탑비와 헌화사 7층석탑이 있다.
헌화사는 고려시대 역대 왕실의 각종 법회가 열렸던 사찰이라고 한다. 그 곳에 있던 헌화사 탑비나 7층 석탑도 조각이 섬세하고 정성을 많이 들인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탑신에 부처님과 보살 조각을 새겨넣었다.
현재 현화사 탑비와 7층석탑 둘 다 북한의 국보다.
탑비는 귀부 탑신 이수가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탑신에는 헌화사 건립 내역을 알 수 있는 2,400여자의 글자가 앞 뒤로 새겨져 있다.
비신 좌.우측면에는 용트림하는 두 마리의 용이 아주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다
개성 관광은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우리 조상들의 유물이나 유적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던 것은 단편적이나마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협동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썬글라스를 낀 사람, 기타를 메고 가는 사람, 안 보는 듯 하면서 흘깃흘깃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던 초등학생.
개성 시내와 봉동을 지나오면서 머릿속에 ‘통일비용’문제가 떠올랐다.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통일을 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통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낡고 오래된 건물들을 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