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1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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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다소 기독교적 관점에서 썼음.



새롭지 않다. 재미는 그저 그렇다. 핍진성이 떨어진다. 상상력의 한계가 보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신』은 내게 그리 대단한 재미를 주지 못했다. 기존의 베르나르표 서사가 뛰어난 상상력과 흥미있는 이야기 전개로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는 점에서 금번 신작에 대한 기대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였을 뿐이다. 전작 『파피용』보다도 못한 미지근한 몰입도로 흥미없게 두 권을 소화했다.

  『신』은 제목 그대로 '신神'에 대한 이야기다. 집필기간이 9년에 이를 만큼 베르나르 자신의 에너지를 집약하여 쏟아부은 작품이다. 그중 1부인 '우리는 신'이 금번에 번역 출간된 것이다. 총 두 권으로 구성된 1부는 144명의 신 후보생들이 본래의 지구를 본 떠 만든 '18호 지구'를 대상으로 신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렸다. 전작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에서 각기 인간과 천사로 주인공 역할을 한 미카엘 팽송이 금번 작품에선 작중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추동한다.

  소설의 구성이 이채롭다. 미카엘 팽송을 위시하여 144명이 펼치는 신이 되기 위한 이야기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백과사전'이라는 제목의 이야기 보완 테마가 교차된다. 본래 인간이었다가 천사가 된 미카엘 팽송. 이젠 신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밟는다. 하지만 인간이었던 때와 같이 시공간의 구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아에덴이라는 섬에서 신을 향한 학습과 모험을 경험한다 . 여러 선배 신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신의 비밀을 향해 나아간다. 

  미카엘 팽송과 함께 각기 다양한 인물들이 신의 후보생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미카엘의 동기생으로 매우 흥미있는 인물들을 설정했다. 아나키즘의 시조격인 프루동, 영화배우 시몬 시뇨레, 비행기구 발명가 클레망 아데르,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물리학자 마리 퀴리, 스파이로 활약했던 비운의 댄서 마타 하리 등 수없이 많은 유명인사들을 포진시켰다. 144명의 신 후보생들은 각기 다양한 성품과 철학으로 자기 앞에 주어진 18호 지구를 경영한다. 각 테스트가 끝날 때마다 탈락되는 후보생들이 생기면서 144명이었던 후보생 숫자는 점점 줄어든다.

  마치 흥미있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저 수준의 핍진성으로 읽는 내내 내 고개는 좌우로 설레설레했다. 나는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작가가 그려낸 형편없는 신적 세계를 지적한다. 매작품마다 누구나 생각지 못한 발군의 상상력으로 이야기꾼의 면모를 과시했던 베르나르는 금번 작품에서만큼은 초라한 소재 차용에 그치고 만다. 베르나르가 그린 신의 세계는 전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기초했다.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크로노스, 아레스 등이 선배 신으로 등장하며 신의 후보생들을 가르친다. 새로울 게 전혀 없는 기존 신화에서의 소재 차용에 불과하며 부족한 부분은 유대교, 기독교, 불교 등의 교리를 조금씩 접목했을 뿐이다. 상상력은 온데간데 없다.

  무엇보다 베르나르식 신성神性은 초라함의 극치다. 본래 신은 전지知와 전능에서 인간과 선연히 구별된다. 신은 모르는 게 없고 하지 못하는 게 없다. 그렇기에 '신'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베르나르가 그린 신은 인간의 수준에서 차원만 조금 높였을 뿐이다. 상식적으로 신의 차원은 인간의 과학에서 불가해하다. 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신이 아닌 인간의 세계를 그렸다. 베르나르가 그린 신들은 결코 신이 아니다. 시공간과 초월, 과학과 의지에 구속된 존재를 어찌 신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가 그린 신의 세계는 그저 인간 세계의 또 다른 스케치일 뿐이다.

  베르나르는 또한 다신교敎의 세계를 그렸다. 즉 신은 하나가 아니며 굉장히 많이 존재함을 전제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 인용 수준이 함량미달이다. 신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명사 <엘로힘>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기 때문에, 다시말해서 하나밖에 없는 신을 복수로 가리킨다는 것은 최초의 유일신 종교가 보여주는 역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엘로힘>의 의미를 표피적으로 이해한 무지의 소산이다. '엘로힘'의 복수형은 다신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표현이자, 힘과 탁월성의 존엄이 함의된 것이다. 요컨대 '엘로힘'이 내포한 복수형은 숫적 다수가 아닌 신의 신되심을 더욱 강력하게 드러낸 의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기본 학습조차 결락된 작가의 지식이 씁쓸하다.

  신비스럽고 고차원적인 초월의 세계를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쉽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필두로 기존의 종교와 전설을 짜집기한 밋밋한 판타지 서사에 흥미는 반감됐고 체력은 지쳤다. 전제적으로 신성의 불가해성을 인정한 후 지엽적으로 신의 절대성을 그렸으면 어땠을까. 보다 높은 차원의, 보다 깊이 있는, 과히 상상키 어려운 신성을 담아냈으면 어땠을까. 신의 창조성, 전지전능함, 피조물과의 관계, 신성의 발현, 인간의 위치, 신적 세계 스케치 등 모든 것이 초라하고 실망적이다. 과히 '신성모독' 수준이다.

  시작이 반이라 했다. 총 3부작 중에서 갓 1부만을 읽었을 뿐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무료하다. 읽기 전 기대는 읽은 후 허탈로 치환됐다. 차후 출간될 2부를 손에 잡을 지 미지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문학에서 감동과 깊이를 원하진 않는다. 그저 작은 상상력과 재미만 있으면 된다. 책을 읽은 후 남는 건 프랑스어 문장을 매끄럽게 한글화 한 이세욱의 다듬어진 번역밖에 없다. 최소한 내 문학적 취향에선, 그의 전작 『파피용』보다도 상상력이 빈곤하고 재미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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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울고 난 뒤에 바라보는 풍경은 늘 울기 이전과 다르다. 맺혔던 것이 울음으로 대신 터져 가슴속에 후련한 여백이 생기는 까닭이다. 여백을 지닌 가슴으로 바라보면 같은 풍경도 그 흐름이 완만해진다. 완만함 속에 순순히 몸을 맡기게 된다. 그 순간 버리지 못할 것은 없다.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   <p. 36>

그런 사람들이 있다. 주변상황이 자신을 위해 빈틈없이 봉사할 때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 잘 구획된 시스템 안에 들어가기보다, 엉성하더라도 스스로 시스템을 구축해나갈 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 안정과 명성보다는 새로움과 호기심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좋다. 절대 다수가 세상을 존속시킬 때,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p. 48>

우리가 언제, 무엇을 입고, 누구와 함께, 무엇을 타고, 어디로 향해 가는가 등에 따라 풍경은 전혀 다른 정서를 전한다. 풍경은 늘 그곳에 같은 모습으로 있으나 작은 변화에도 이리저리 들썩이는 우리의 유동적인 마음이 전혀 다른 해석으로 풍경을 건져올리는 것이다.   <p. 109>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오직 그 순간의 무게만큼만 짊어진 공기처럼 가벼운 존재들이었다.   <p. 221>

어떤 것이 먼저 오고 어떤 것이 나중에 오느냐의 차이일 뿐, 모든 순간은 동등하다.   <p. 236>

우리가 심장에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사실 그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절제'나 '인내'라는 고무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억압'이나 '위선'이란 어두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과정. 그러나 모두가 다 육중하고 진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심장에 정직한 이들의 경박함을 만날 때 막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심장에 정직한 이들은 적어도 계산하지 않는다. 계산은 심장 박동을 '안정'적으로 뛰게 하기 때문이다.   <p. 275>

나이가 들수록, 사랑의 정의는 단순해진다. 십대에 빚는 사랑의 정의가 거대한 금빛 천사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이십대에는 거기서 금빛을 벗겨내고 날개를 떼어낸다. 그리고 삼십대가 거의 다 끝나는 중년의 지점에 이르면, 천사의 척추만이 남는다. 서로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지고 다시 정중해지며, 주는 것에도 받는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제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을 주고받더라도.   <p. 277>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 속에 깨달았다. 그동안 한 번도 '완전한' 세상을 보지 못했음을. 내가 보았던 것은 인간의 세상이었다.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일정 부분 거세되고 손질되고 격리되거나 치장된 것들의 세상. 그토록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인간'이라는 긴장을 조성하는 존재로부터 자유로이 흩어져 거니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신이 "보기에 참 좋더라" 하셨던 '보기 좋은' 태초의 모습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p. 318>

지평선이란 우리의 시각적 한계일 뿐, 그 어떤 지평선도 기어이 둥근 지구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잇는 그물망의 한 획일 뿐임을. 달리고 또 달린다는 것은 닿고 또 닿아 있는 일임을.   <p. 332>

미래란, 그리로 다가갈 구체적인 수단과 목적이 주어질 때만 존재하는 시제인지도 모른다. 수단과 목적을 찾지 못해 암담한 이들에게 미래란 허공과 다름없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다만 어두운 오늘의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한줄기 빛을 잡고 나아가는 이들에게 미래는 길이다. 발밑에 놓인 단단한 길, 한 발자국이 다음 발자국을 이끄는 길.   <p. 403>

어떤 여행지는 도착하자마자 여행자를 손아귀에 움켜쥔다. 반면, 어떤 여행지는 여행자가 정지한 채 기다려야 한다. 이동을 거듭하던 여행자에게 더 차분해질 것을 명한다. 고여 있을 것을 명한다.   <p. 446>

모든 여행마다 배터리가 방전되고 충전되는 주기가 있다. 방전될 때 여행자는 길 잃은 미아가 되고 충전될 때 이름 없는 철학자가 된다.   <p. 521>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38997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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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나 마타타 우리 같이 춤출래? - 마음의 길을 잃었다면 아프리카로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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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여행작가 오소희가 있다. 그녀는 여행을 사랑한다. 또한 사람을 사랑한다. 여행지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명소'와 '복닥거림'은 그녀에게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비본질보다 본질을 보고, 외연보다 내포를 보며, 비인간보다 인간을 보는 뚜렷한 여행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창조해내는 여행수필 속에는 깊은 향기가 배어 있다. '인간'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의 향기가 말이다.

  그렇기에 오소희는 유명하고 화려한 곳보다는 조용하고 사람 냄새 나는 곳을 찾는다. 터키에서는 올림포스에 경도되어 시간이 정지되었다. 라오스에선 욕망이 멈추는 것을 체감했다. 9개월여만에 선보인 그녀의 신간은 어떤 '공간'을 담아냈을까. 그녀의 공식적인 세번째 여행에세이 『하쿠나 마타타 우리 같이 춤출래?』는 '하쿠나 마타타'라는 스와힐리어 문구를 제목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궁금증에 살포시 귀띔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족하고 빈곤하며 소외된 공간 '아프리카'의 이야기라는 것을.

  아프리카가 어디인가. 에이즈와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는 비운의 대륙이자 물과 식량이 없어 수없이 많은 어린아이들이 굶어죽는 대륙이 아니던가. 또한 문명사회에서 이해하기 힘든 미개한 문화와 원시적인 생활환경을 갖고 살아가는 대륙이며 인간의 욕망과 인권이 최소한의 분량조차 보장되지 않고 정지된 곳이기도 하다. 신조차도 버린 대륙이라 불리며 인류의 소외와 결핍이 하나의 대륙 안에 집대성된 어둠의 공간 아프리카. 우리의 상식은 아프리카를 척박하고 막막하며 우울한 땅이라 부르고 있다.

  반면 아프리카는 또 어떤 곳인가. 넓은 초원에서 수많은 야생 동식물들이 천국과 같은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땅이자 장엄하고 웅장한 자연 환경으로 인간의 오감을 압도하는 거대한 대륙이 아니던가. 극도의 느긋함과 여유로 '태초적' 인간다움이 서려있는 공간이며 가장 낮아져 있어 더이상 낮아질 수 없기에 높아질 미래를 소원할 수 있는 희망의 땅이기도 하다. 어쩌면 작가 오소희는 아프리카가 그녀에게 선사할 것을 믿기에, 더욱이 그 '선사'가 파생해내는 예기치 못한 '기대'와 '설레임'을 소망하고 있기에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리라.

  책이 꽤 두껍다. 할 말이 많았을 게다. 작가는 장장 500페이지가 넘는 거대한 지면 위에 아프리카를 담아냈다. 아들 중빈과 함께 한 한달여의 여행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떨 때는 배꼽이 빠질 정도의 코믹함으로, 어떨 때는 코끝이 찡할 정도의 감동으로, 어떨 때는 주옥같이 정제된 명문장으로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추동한다.

  책의 구성은 일반 여행수기의 포멧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총 45개의 테마로 구성된 에피소드가 텍스트의 주를 이루고 있으며,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텍스트를 수식할 만한 적확한 사진을 실었다. 작가가 직접 디카로 찍은 다양한 사진은 작가 특유의 정갈한 문장과 함께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는 대륙 아프리카를 잘 소개한다. 탄자니아를 시작으로 우간다를 거쳐 르완다에 이르는 한 달간의 동아프리카 여정을 적절한 템포와 높낮이로써 흥미있게 담아냈다.

  그녀가 담아낸 아프리카는 기쁜 곳이다. 춤추는 곳이며 걱정이 없는 곳이다. 모든 것이 느리고 여유있고 부담없이 흘러간다. 우리에게 '심각한' 것들이 그곳에서는 '대충대충'이라는 미명으로 신비롭게 부드러워진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속도는 '선善'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느린 것이 미덕이 되고 그 수치를 측량하지 않는다. 실존 자체가 행복이 되고, 그 행복의 원초성이 춤추는 이유가 된다. 

  또한 그녀가 담아낸 아프리카는 아픈 곳이다. 가난과 질병이 만들어낸 인간의 거짓과 비굴함이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심장마저 왜곡시킨다. 우간다와 르완다의 접경지역 부뇨니의 고아원에서 겪은 '닭 사건'의 충격으로 그녀는 '여행자'에서 '관광객'으로 추락한다. 모든 여행마다 배터리가 방전되고 충전되는 주기가 있기 마련인데, 아프리카의 주기는 유난히 짧기만 하다. 아프리카의 아픈 단면을 목도할 때면 어느새 여행자는 길 잃은 미아가 된다.

   오소희의 발군의 관찰력은 아프리칸의 구체적 면면까지 꼼꼼히 포착한다. 소소하고 다양한 피사체를 잡아내되, '인간'과 '본질'이라는 그녀 특유의 관찰력 브랜드의 속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프리칸의 각기 다양한 말과 행동, 표정과 인식 등은 모두 그녀의 탐구 대상이다. 그러나 관찰과 탐구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녀와 아들 중빈에겐 '느낌'과 '조화'가 있다. 서로의 '다름'으로 상대를 재단하지 않는다. 관계를 맺을 때, 순간, 하나의 소우주를 건설하여 그 우주 속에서 상대와 하나가 된다. 인간에 느끼며 조화하는 열정이 두 모자의 마음속에 오롯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 여행이 그들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지혜의 선물이 아닐까.

  에필로그가 자못 인상적이다. 여행의 네 가지 단계를 정리했다. 작가가 언급한 여행의 네 단계는 이렇다. 처음엔 '나'만을 보다가, 나를 떠나 '그곳'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 다음, 그곳에 있는 것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것을 나누어 그곳을 더 아릅답게 한다. 하지만 어느 단계의 여행자이든, 아프리카에 가면 평범해진다고 작가는 일갈한다. 아프리카가 시공간의 지엽성으로 조망하기엔 너무 크고 무거운 땅이기에, '지구'라는 가장 큰 공감대로 묶어질 수밖에 없는 역할과 의무를 선사하는 신비한 땅이기에 그럴 것이다. 

  결국 아프리카를 권하는 문장으로 에필로그는 끝맺음된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우리가 같은 행성에 공존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이 2세들의 미래를 축복하는 '지구인'이라는 공동체적 삶과 사랑에 대한 일깨움에 있었음이리라.

  작가 오소희를, 그녀의 문장을 만난지도 어언 1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참 좋은 '만남'이다. 내가 그녀의 문장을 흠모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깊은 사색에서 우러나온 삶과 우주적 통찰이 멋진 글귀 위에 용솟음치며 나를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한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게 있다. 그녀의 내공은 여행을 통해 공급받은 경험과 깨달음에 기초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여행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동시에 내가 그녀의 여행수기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백하건대, 그녀의 여행 목적과 내 독서관의 오롯한 부합, 그것이 이 아름다운 만남의 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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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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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만의 문체가 있다. 신경숙만의 향기가 있다. 신경숙만의 우위位가 있다. 이러한 그녀만의 '문체'와 '향기'와 '우위'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역시 신경숙이다, 라는 명료한 한 문장으로 말이다. 1985년 등단한 이후 그녀가 쏟아낸 수많은 텍스트들은 앞서 언급한 공식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소설가 신경숙은 자신만의 선연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안정적 창조가다.

  궁중 무희의 신분으로 프랑스 외교관을 사랑한 실존 여인 '리진'의 삶을 그린 소설 『리진』으로 그녀의 문학적 역량을 포효했던 신경숙은 불과 1년여만에 전혀 새로운 소재를 담은 장편 한 권을 선보였다. 그녀는 신작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인류가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로 인간에게 각인되어 있는 '엄마'라는 존재를 텍스트 위에 감동적으로 녹여냈다.

  소설은 총 네 개의 장과 하나의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각 장마다 시선의 흐름을 주도하는 화자가 교체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각 장의 화자는 '너', '그', '당신'으로 바귀면서 '엄마'의 존재성을 입체화한다. 작가는 딸을 '너'로, 아들을 '그'로, 남편을 '당신'으로 설정했다. '나'라는 친숙한 일인칭 주어를 거부한 채 내가 아닌 타인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를 차용한 작가의 고집은 '엄마'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있다. 

  작가에 의해 의도된 '엄마'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 좁힘은 종내 소설 속 엄마를 독자 '나'의 엄마로 치환시킨다. 곧 소설 속 '너', '그', 당신'은 곧 현실의 '나'가 된다. '네' 회상이 나의 회상이 되고,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며, '당신'의 부끄러움이 나의 부끄러움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작중인물의 호칭을 가공 실명이 아닌 일반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독자 일갈을 향한 문장의 절제미와 합리성을 의도화했는지도 모른다.

  네번째 장 엄마의 회상씬이 인상깊다.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일인칭 화자로 시선을 주도하는 넷째 장은 엄마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된 전지적 시각의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의 구속을 벗어난 엄마는 시선을 자유로이 이동하며 자신의 독백을 주도한다. 그 독백에는 엄마로서 살아야만 하는 십자가를 내포한다. 하지만 그것에만 함몰되진 않는다. 여자로서의 비밀과 방황도 함께 있다. 즉 세상 모든 '엄마'가 발현해내는 '신성聖'과 한 여인으로서 감춰야만 했던 내밀한 '인성性'을 공존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교차 합일을 통해 '엄마' 속에 내재한 신의 속성을 이끌어낸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에 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개월째다, 로 시작하는 에필로그 <장미 묵주>는 소설의 완성도를 오롯하게 만든 텍스트 연금술의 극치다. 소설을 시작한 '너' 큰딸의 시선은 엄마를 잃어버린 먼 훗날의 시점으로 회귀하여 소설을 끝맺음한다. 미켈란젤로의 명조각상 피에타상 앞에서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라며 애원하는 큰딸 '너'의 마지막 명장면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두 손으로 보듬는 모성에 대한 고개숙임이자 찬탄이리라. 

  대중음악가 이적은 이 소설을 "세상 모든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라고 프리뷰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평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소설은 모성을 빚진 자식들의 원론적 죄값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단선적 조망은 신경숙 자신의 모든 문학적 역량을 쏟아부어 창조한 경외스런 텍스트에 대한 지엽적 감상의 오류이자 모독이다. 감히 평하건대,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라는 존재로 대변되는 인류 유일무이한 아가페적 사랑에 대한 오마주이자, 온전하면서도 온전치 못한 인간으로서의 '엄마'를
단층 해부한 'CT촬영'이다. 

  매우 깊은 문학적 감동을 선사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문장 곳곳에 작정하고 쓴 흔적이 역력하다. 고결한 주제를 뛰어난 연금술로 완벽하게 창조해낸 텍스트에 별 다섯개는 한없이 적게만 느껴진다. 한국 문단에 신경숙이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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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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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떨 때는 잔잔한 동화 한 편이 더욱 심원한 인생의 이치를 말해주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떨 때는 얇은 그림소설 한 권이 긴 서사가 말해주지 못하는 영역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동화는 아이만을 위한 텍스트가 아니다. 잘 다듬어진 동화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순수성 결락의 질병을 앓는 성인들에게 일그러진 자화상을 자각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한국적이며 토속적인 정서와 감수성을 발군의 내공으로 만들어내는 작가 김주영이 동화 같은 그림소설을 새롭게 선보였다. 나는 그의 대표작 『객주』를 통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꾼인지를 경험했다. 조선 상인의 생생한 삶과 역동성을 극히 섬세하고 토속적인 문체로 담아낸 『객주』는 한국 문학사에서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요 몇 년 사이 개정판으로 새롭게 선보여 현대인들이 읽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총 아홉 권에 달하는 김주영의 역작 『객주』는 반드시 읽어야 할 사회소설로 지인들에게 아낌없이 추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김주영 작가가 그림소설을 새롭게 선보였다는 소식은 솔깃했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똥친 막대기'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선연한 유추가 자못 어려운 제목이다. 과연 김주영은 그림을 배치하면서까지 무슨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걸까. 거장의 변화는 언제나 독자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양장본의 첫 장을 넘기면서 거장 김주영의 동화 속으로 침투한다.

  여기 한 그루의 백양나무가 있다. 오랜 세월 갖은 고난을 감내하며 강인한 나무로 성장했다. 소설 속 화자 '나'는 바로 그 백양나무의 곁가지다. 어미나무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으며 무탈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한 농부의 손에 의해 꺾이면서 '나'의 삶은 송두리째 뒤바뀐다.

  '나'는 수많은 정체성의 변신을 거듭한다. 본래 백양나무 곁가지였다. 그러다가 암소 엉덩이와 재희(농부의 딸)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초리로 변신한다. 그런가 하면 하룻밤 사이에 똥친 막대기가 되어 측간에 갇힌다. 또다시 어미나무 곁인 봇도랑으로 돌아와 꽂혀 있는 막대기가 된다. 낚싯대가 되기도 한다. 홍수에 의해 오랜 시간 떠내려가다 어느 한 곳에 몸을 박고 뿌리를 내리면서 '나'의 지난한 여정은 끝난다.

  『똥친 막대기』는 꿈과 사랑의 이야기다. 막대기의 꿈과 사랑은 짧은 서사를 지탱하는 두 가지의 본류다. 한 농부의 손에 의해 절단되어 작은 막대기로서 다양한 변신을 꾀하며 모험을 거듭한 '나'의 꿈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것이다. 어미나무가 간단없이 몰아치는 여름의 비바람과 천둥 번개를 견뎌냈던 것처럼, 겨울의 칼바람에 잎이 찢어지고 가지가 휘어지는 담금질에도 꿋꿋하게 견뎌왔던 것처럼, 강인하고 생명력있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종국에 스스로 뿌리내릴 곳을 찾아 우뚝 서기까지 작은 막대기의 찬란한 여정은 참으로 아름답다.

  막대기의 사랑 또한 구슬프다. 농부의 딸 재희에게 한 눈에 반한 막대기의 사랑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까지 생명을 지탱케 한 원인이자 작동 장치이다. 막대기는 재희에게 선택되길 바랐다. 하지만 재희의 회초리로 선택될 때는 가슴이 아팠다. 측간에서 똥친 막대기로  갇혀 있을 때도 재희의 손길을 기다렸다. 재희가 자신을 무기로 동네 악다구니들을 쫓을 때는 한없이 기쁘기도 했다. 다시 어미나무 곁인 봇도랑으로 돌아와 꽂혀 있는 막대기가 될 때에는 재희에게 감사했다. 소설의 말미, 막대기는 자신이 살아갈 땅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재희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똥친 막대기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꿈의 실현은 한 존재에 대한 사랑의 방향성과 합치되면서 아름다운 꿈과 사랑의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꿈과 사랑의 가치가 훼손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젊고 어려운 시절의 꿈은 물질 만능에 영합한 현실주의로부터 가치를 외면당한다. 사랑의 의미 또한 퇴색됐다. 절대적 사랑 아가페(agapē)는 신의 전유물로만 각인된다. 아무리 시대와 가치관이 바뀐다 하더라도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와 의미가 있다. 그것이 바로 '꿈'이고, '사랑'이다. 꿈이 현실이 될 때 인류는 진보했고, 사랑의 가치가 녹록지 않은 시대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했다. 어쩌면 작가 김주영은 『똥친 막대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결핍되고 폄하되고 있는 꿈과 사랑의 가치와 의미를 전하고 싶었으리라. 

  『똥친 막대기』는 맑다. 아름답다. 여자의 변신도 무죄지만, 거장의 변신도 무죄다. 대하소설에서 얇은 동화 그림소설로 돌아온 작가 김주영을 환영하며, 그가 새롭게 만들어낸 맑고 아름다운 텍스트에 별 다섯 개를 아낌없이 선사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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