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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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 문단에서 공지영은 아이러니한 존재다. 대극적인 사랑과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공지영 만큼 많은 독자들과 호흡하는 작가는 없다.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피드백되며, 가장 많이 평가받는 작가이다. 관심의 대상이란 얘기다.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작가임에는 분명한데 아직도 적지 않은 평단과 대중은 그녀에게 시원한 박수를 거부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지영을 비판하는 이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일차적 논거는 두 가지다. 감상적이며 가볍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2000년대의 한국소설의 위기 가운데 공지영이 쳐올린 공의 높이는 결코 낮지 않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그 공높이의 수준을 평가하는 양극화에 있다. 한국소설의 미래인가 과거인가, 다시 말해 한국 독자의 진보인가 퇴행인가의 중요한 기로점에 소설가 공지영의 존재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자못 진지한 질문으로 서평의 시작을 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의 최신 장편소설 『도가니』는 공지영 문학의 현재성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의 위기를 2000년대로 한정한다면 공지영은 서사의 가난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녀의 의식은 현실 고발(『동트는 새벽』), 후일담(『인간에 대한 예의』), 페미니즘(『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삶과 죽음(『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시대와의 화해(『즐거운 나의 집』)을 거쳐 더 넓게 진화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 바로 『도가니』가 있는 것이다.

  서두부터 장황하게 언급한 공지영 문학에 대한 배경 설명은 그녀의 텍스트를 편견과 선입견을 탈피하여 있는 그대로 읽어보자는 내 의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문학을 위시한 모든 예술적 장르에서의 판단과 비평은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제발 소설가 공지영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비본질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고 했다. 텍스트 밖은 안과 같아서 안팎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공지영 소설을 감상하는 데 인간 공지영의 외연은 접어두자. 소설가 공지영, 그리고 그녀의 텍스트 『도가니』만 보자.

  공지영은 이 소설을 통해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제기한다. 무진이라는 마을에서 끔찍하게 벌어진 장애아 성폭행 사건과 이를 둘러싼 정의와 비정의의 대결을 진지하면서도 섬세하게 담아냈다. 거짓이 보수화되어 썩은 권력으로 공고해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바로잡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이 소설은 개탄스러운 이야기를 통해 충고한다. 처참한 이야기는 인간의 악한 본성과 사회적 이기의 암울함을 혐오스러울 정도로 사실스럽게 관통하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강인호가 기간제교사로 일하기 위해 향하는 무진시의 안개 낀 풍경을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안개로 뒤덮여 있는 무진시의 적막함과 그곳 대형교회의 주일예배 풍경, 그리고 철길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어느 소년의 죽음을 소설 전면에 단 세 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작가가 전면에 배치한 세 군데의 시공간에 동일하게 존재한 것은 '안개'였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안개의 존재성을 부각하며 주기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무진시를 뒤덮고 있는 안개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지방의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과 이를 밝히고자 하는 소수의 진실과 덮으려는 다수의 거짓이 대결하는 구도가 이 소설의 기본 얼개다. 이야기의 절반 가까이가 법정을 배경으로 할 정도로 치열한 대결이 펼쳐진다. 진부할 수도 있는 선악의 대결을 작가는 독자 자신이 마치 법정에 있는 한 명의 분노자인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생명력있게 담아냈다. 공지영의 노련한 감수성은 읽는이의 오감을 자극시키며 온 정신을 처참한 서사에 몰입시킨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나는 주인공 강인호라는 인물에 강한 연민을 느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의 무능력, 자애학원에서 목도한 충격적 진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결단, 쉽지 않은 싸움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는 용기, 대의를 위한 이상과 가족 행복의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상 등 인간 강인호의 입체성은 이 소설을 읽는 가장 큰 묘미라 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과연 나는 강인호의 선택에 대해 자신있는 비난을 던질 수 있을까. 작가의 연금술에 의해 또 하나의 강인호가 된 내 자신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이야기는 종내 정의의 승리로 종결되지 않는다. 얼핏 보면 악의 보수화로 점철된 거짓의 단합이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정의가 비정의를 오롯하게 제압하지 않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무거운 해석의 의무를 토스하고 있다. 책장을 덮은 후 독자는 강인호가 된다. 또한 서유진이 된다. 그리고 끝내 이기지 못한 처절한 싸움의 결말을 응시하며 이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우리네 현실성에 대입하게 된다.

  공지영이 제시한 '도가니'는 도덕과 양심의 폐허가 수구화되고 단합되어진 공간을 상징한 것이기도 하고, 인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악마적 본성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의 암울한 단면에 대한 축소판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분명한 정의가 비정의의 카르텔을 오롯이 재단하는 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가 지불된다는 현실성의 한계를 소름이 돋도록 재인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당위와 존재 사이의 괴리는 인간의 현명함과 악마성이라는 모순된 이중성을 이끌어내며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웅숭깊은 곱씹음을 유도한다.

  참담한 실화를 다루었음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고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공지영의 힘이 놀랍다. 이제 더이상  공지영은 징징대는 이야기만을 만들어내는 감성 과포화 소설가가 아니다. 공지영의 서사와 문장 어느곳에서도 감정 과잉과 가벼움은 찾아볼 수 없다. 뼈아픈 실화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다듬어 유려한 문체로써 독자에게 전달한 냉정함이 돋보인다. 또한 독자 한사람 한사람을 도덕과 상식의 폐허라는 광란의 도가니에 집어넣음으로써 진실과 정의가 재단된 엄연한 실재의 세계를 조망하고 이에 대한 자아의 현재상을 궁구하게 하는 의무감을 각인시킨 작가의 마력에 전율을 느낀다.

  소름이 돋도록 너무나 잘 쓴 소설 『도가니』에 나는 아낌없이 별 다섯 개를 선사한다. 이 소설을 통하여 공지영을 거부했던 이들의 비판논거는 더욱 궁색해질 것이다. 어려운 소재를 냉정하고 담담히 서술한 소설가 공지영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정말 잘 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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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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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글은 역동적이다. 그녀의 글은 유머러스하다. 그녀의 글은 재미있다. 그녀의 글은 외식적이지 않다. 그녀의 글은 솔직하고 담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글은 따뜻하다. 화려한 수식어구나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글을 충분히 맛있고 멋있게 쓸 수 있다는 점을 그녀의 활자는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녀의 글에는 강력한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녀가 오랜만에 에세이를 냈다. 기존의 저서 7권을 모두 섭렵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녹록지 않은 애정을 갖고 있는 내가 그녀의 신간을 대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을 터. 전작들과는 다소 다른 느낌을 주는 제목을 전면에 배치한 한비야의 신작 에세이 『그건, 사랑이었네』는 오랜 기다림과 변찮는 믿음의 인고를 통해 내 손 안에 안착했다.

  제목이 심상치 않다. 사랑이라니. 세계 오지를 누비며 도전과 열정을 불태우거나 구호 현장에서 역동하는 그녀의 평소 모습과 신간의 제목은 아이러니한 부조화를 이룬다. 물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외되고 핍박받는 이들을 보듬어주는 것이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 곧 인류애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전작 어느곳에서도 '사랑'을 제목 전면에 제시한 텍스트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 그건, 여전히, '사랑'이었다. 바로 한비야 자신에 대한.

  이 책은 인간 한비야에 대한 탐구서다. 한비야의 생명력 있는 필치는 철저히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첫사랑과 신앙고백, 글쓰기 노하우와 추천도서, 인생계획과 삶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내밀하고 객관적인 인간 한비야의 단면을 가감없이 고백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월드비젼의 구호팀장이라기보다는 한 존재의 인간으로서, 한 존재의 여자로서 그녀의 객관적 실존이 담백하게 묻어 있다.

  저자는 이 얇은 에세이 한 권을 통해 자신의 맨얼굴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간 말하지 못한 것을 한꺼번에 터뜨리듯이 저자의 고백은 솔직과 담백을 넘어 역동에까지 닿아있다.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다. 진실된 글은 반드시 힘이 있다. 이전 에세이들이 한비야가 조망한 외부세계에 대한 관찰과 해석이라면 이 책은 관찰자와 해석자로서 살았던 자기 자신의 내면적 모습을 조명한 고백서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흥미있고 공감되었던 대목은 글쓰기에 대한 저자 자신의 철학을 언급한 부분이다. 한비야는 글에 대해 겸손하고 겸허한 태도를 견지한다. 좋은 글쓰기는 반드시 인고의 노력이 담보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백 퍼센트 공감되는 말이다. 그 유명한 다독, 다작, 다상량多商量의 삼다三多 외에도 다록多錄과 몰두, 퇴고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노력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한비야의 글쓰기론은 응당 고개가 주억거린다. 글은 마땅히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에세이 작가로서의 활자에 대한 진지한 겸손과 경건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비야가 골라주는 24권의 추천도서 리스트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고전을 위시하여 종교, 영성, 구호, 교양에 이르기까지 한비야 자신이 감명깊게 읽은 리스트들을 폭넓은 분야에서 담았다. 그녀가 추천한 책 중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루쉰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가 인상적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폭넓게 읽는 그녀의 다독을 존중한다. 훌륭한 필자 이전에 진지한 독자 한비야의 모습을 엿본다.

  나는 한비야의 글이 좋다. 여태까지 그녀가 쏟아낸 텍스트에는 모두 동일한 문체가 사용되었다. 그녀의 문체는 항상 일관되다. 재미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외식하지 않는다. 동시에 편안하고 따뜻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녀의 글에는 심장 박동수가 느껴진다. 그렇기에 읽는 이를 움직이게 만든다. 그녀가 쓴 모든 책들을 읽어오면서 새삼 확인하는 진리가 하나 있다. 활자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펜은 강하다.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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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7-3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읽으셨군요. 저도 그녀가 권하는 책에 관심집중이었어요.
행복의정복,과 아침꽃을저녁에줍다, 저도 찜해뒀는데요.^^
한비야님 너무 멋진 '사람'이에요.

다윗 2009-08-01 09:06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한비야 팬입니다. 덧글 고맙습니다. ^^

아로 2009-08-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른 시각으로도 한번 보세요.

여기 한번 방문해 보시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http://afterdan.kr/40 여행자 한비야에 대한 비판 - 과대평가된 시대의 아이콘

님의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인지 알려줄 겁니다...
 
마음은 언제나 네 편이야
하코자키 유키에 지음, 고향옥 옮김, 세키 아야코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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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일컫는 '팔복八福 '은 예수가 전한 복과 관련된 메시지다. 여덟 가지 복 중에서 가장 먼저 예수가 설파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곧바로 겸손의 의미와 연결된다. 내 마음속에 내가 너무 많고 부유할 때 천국은 멀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과연 내 속에 내가 없을 때만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내 안에 있는 내 마음의 크기를 줄여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해석은 예수가 설파한 팔복의 첫 번째 가르침을 피상적이고 일면적으로 받아들인 오류다. 인간을 생기를 불어넣어 신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기독교의 인간 창조론은 인간의 위대한 존재성을 그대로 방증한다. 오히려 내 마음속에 자아의 올바른 인식과 건강한 자기애를 풍성히 담고 있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안정감있는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 이는 비단 종교적 차원의 접근이 아니더라도 심리학을 위시한 수많은 학문을 통해 연구된 사실(fact)이기도 하다. 내가 나로 사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출판사 한겨레아이들의 『마음은 언제나 네 편이야』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타자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주제로 한 따뜻한 이야기다. 이 책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책 제목은 그대로 이 책의 메시지를 잘 요약한다. 저자 하코자키 유키에는 자신의 마음은 항상 자신의 편에 있다는 명징한 지혜를 통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때 힘들고 번민에 빠질 때가 많다. 매사가 승리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희비의 끊임없는 교차와 반복은 우리네 인생의 보편적 얼개다. 그렇기에 인간의 기분과 감정은 항상 요동치게 마련이며 그것을 어떻게 다듬고 갈무리하는가에 따라 행복의 원형이 완성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 마음'에 대한 주도권 쟁취 여부다. 내 마음을 오롯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의무는 매우 소중한 일이다. 왜냐하면 본래 마음은 언제나 내 편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우리 마음속의 32가지 다양한 형태가 소개된다.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기분들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내가 내 마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그 마음이 내 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자신감은 충만해질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에 내가 아닌 타자가 있다는 명확한 진실을 받아들일 때 평온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이 얇디얇은 책은 이 땅의 어린아이들에게 자아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것과 타자와 진실되게 관계하는 것의 소중함을 따뜻하고 평온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심지가 견고한 자가 평강의 평강을 얻는다는 말씀이 있다. 이는 세상만사는 마음먹기 달렸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사랑과 두려움이 양립할 수 없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마음속에 두려움이 사라질 때 사랑만으로 가득할 수 있다는 명제 또한 참이 된다. 내 마음이 나의 것이라는 진실과 마음이 가진 힘은 실로 강력하다는 사실, 바로 그 진리를 이 땅의 아이들이 알고 누리며 쟁취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이 한 권의 책이 그 도구로써 소중히 읽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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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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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소설가와의 술자리에서였다. 서로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였다. 대화꽃은 한국의 정치현실과 인권의 문제에까지 피어있었다. 술이 흥건히 취해 최고의 분위기로 달아오른 순간, 함께 한 소설가는 말했다. 미국은 인권의 나라가 아니며 오히려 인권을 심하게 침해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나는 놀랐다. 자유와 평등으로 대변되는, 무엇보다 세계 제일의 인권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합중국이 인권과는 거리가 먼 인권 침해국이라고. 이후 나는 잠시 깊은 사유에 잠겼다.

  최근 한국 경찰의 강경 시위진압으로 말들이 많다. 군화발로 시민을 밟는다던가 방패로 머리를 가격한다든가 하는 강경한 진압 장면을 미디어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본 국민들은 너무 심한 처사라며 경찰과 정부를 비난한다.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가. 세계 제일의 '인권국가' 미국에 비하면 그 정도는 새발의 피라는 것을. 미국 경찰이 시민들을 어떻게 검문하고 시위대를 어떻게 진압하는지 본 적이 있는가. 유투브에 가서 동영상을 보라. 시민을 개패듯 패는 미국 경찰의 역동성을. 

  비인권국 미국의 실상은 참으로 당황스럽다. 미디어를 통해 인지되는 미국의 이미지는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거대한 긍정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다. 완벽한 삼권분립의 정치제도, 거대한 땅덩어리와 풍부한 자원, 세계 제일의 군사력,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규모, 다양성의 힘과 관용의 에너지 등 미국을 포장하는 것들은 온갖 긍정적인 키워드들이다. 하지만 실재는 항상 보이는 것과 다른 법이다. 술자리에서 강력히 설파한 그 소설가의 주장대로 미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한참 뒤쳐진 인권 후진국이다. 미국의 조악하기만 인권 유린의 단면은 조지 부시 정권에서 그 실상을 선연히 드러낸다.

  이라크 전쟁으로 대변되는 부시 정권의 실정은 한 나라의 행정부의 정책 실패로 갈무리하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을 치뤘다. 전쟁 초기부터 목적이 없는 전쟁임이 밝혀졌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은 궁색하기만 했고 실상 석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아직도 종결되지 않은 이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었는가. 이라크 전쟁은 수없이 많은 것을 죽였다. 이라크 시민을 죽였고, 미국 군인을 죽였으며, 미국의 자존심을 죽였고, 인간의 양심과 용기를 죽였다. 이 참혹한 전쟁과 동일한 의미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있다. 그리고 그 악행들을 강력히 집약하는 아이콘 '관타나모 수용소'가 있다.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는 아프간계 미국인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 마비쉬 칸이 쿠바 관타나노만의 미군기지에서 억울하게 수감되어 있는 수감자들과의 만남을 담은 에세이다. 뉴스와 신문으로 설핏 접해왔던 관타나모의 충격적인 실상이 책 곳곳에 담겨져 있다. 피의 혐의조차 없는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그곳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는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가 어떤 곳인가. 수감자 하나당 5,000~25,000달러를 '보상금'으로 주면서까지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였던 곳이다. 금전적으로 이득을 얻으려는 현지인들의 고발내용을 먼저 조사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잡아온 곳이다. 기소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5년 이상 억류하고 있는 곳이다. 자살한 수감자들의 시신을 고향에 보내기 전에 조직을 제거한 곳이다. 팔십 먹은 노인을 '적 전투원'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륜적 고문과 핍박이 벌어지는 곳이다.

  저자 마비쉬가 목도한 관타나모의 현실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진실보다 심각했다. 수감자들을 위한 통역 봉사로 어렵게시리 관타나모에 간 저자는 수많은 수감자들의 접견에서 그곳의 처절한 실상을 듣고 목격한다. 탈레반과는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잡혀와 수감되었던 일부터 하루하루 고통스런 고문과 비인간적 핍박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보고 들은 것은 잔인하고 개탄스러운 사건의 연속이었다.

  책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당혹과 분노감이 치밀었다. 특히 바레인 출신의 수감자 주마 알 도사리와 가즈니 지역에서 교사로 일했었던 모하메드 자히르가 당했던 신체적 가혹행위를 소개한 부분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발가벗긴 채 미군 여성장교의 생리혈을 얼굴과 온몸에 문지르기도 하고 성기를 면도날로 칼질하기도 했다. 또한 신체적 고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모독도 서슴치 않았다. 수시로 알라와 예언자 모하메드에게 저주를 퍼부면서 수감자들의 정신과 신앙의 자존심을 욕보였다. 불과 몇 년 전에 인권국 미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일이었다.

  이 책이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이유는 충격적인 실상을 전하고 있음에도 겸허하고 차분한 마음을 견지한 저자의 객관적 접근에 있다. 저자는 관타나모 수용소에는 악으로 분류되는 수감자도 적잖이 수감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9·11 테러를 주도한 칼레드 쉐이크 모하메드나 그의 공범 예메니 람지 비날쉬브, 1999년말 요르단과 LA에서 '세기말 폭탄 테러'를 기도했다 미수에 그친 아부 주바이다가 그곳에 수감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점은 그 어떤 사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공개적인 재판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저자의 확고한 믿음이다. 혐의도 확정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가두고 숨기면서 최소한의 인권마저 유린하는 미국 정부의 행위에 대해 저자는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감정적 표현보다는 법과 인권의 가치를 먼저 전제한 저자의 객관적 접근이 이 책의 존재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한 여성 변호사가 쓴 에세이이면서도 남의 일 같지 않은 강한 공감이 발산된 이유가 있다. 아직 완벽한 의식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대사와 관타나모'의 상징성은 상당수 많은 교집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금의 한국 현실은 이곳저곳에서의 다양한 모습으로 '작은 관타나모'의 형상을 오버랩시킨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부활과 이로써 제기된 민주주의의 역행은 2009년 한국의 엄연한 실재이다.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일획일점 건드리지 못한 채 그대로 살아있고 검찰의 정치화 또한 생생히 부활하고 있다. 미국인 여성 변호사가 쓴 한 편의 에세이가 2009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울리는 메시지는 바로 이 대목에서 명징해진다.

  지난 1월 오바마 대통령은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안에 폐쇄한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또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재판을 재검토하고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이른바 고도 특수 심문기법 사용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자신의 주요 선거공약을 실천에 옮긴 것과 동시에 전임 부시 행정부의 주요정책을 번복하는 조치로도 보인다. 늦게나마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올바른 길로 다가가고자 하는 자생력이 아직까지 미국이 잃지 않고 있는 최소한의 자존심이라 믿는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미국의 그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부럽게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오버일까. 개콘의 유행어를 떠올린다. 왠지 씁쓸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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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도발적인 제목을 지닌 이 소설은 독백의 주인공 마리아의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다. 작가 페르로엔은 산문시와 같은 간결한 문체로 일상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능숙하게 전개해 나간다. 많은 텍스트를 사용하진 않는다. 적은 문장으로 많은 사유를 끌어낸다. 한 시간 안에 읽힐 만한 소소한 분량으로 무섭고도 충격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존재성은 녹록지 않다.

  19세기 남아메리카 수리남 지역의 부유한 농장주의 딸 마리아의 열네 번째 생일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진주 목걸이, 성경, 향수, 핸드백 등 가족으로부터 생일선물을 받은 마리아는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빠가 준 선물만큼 놀랍고 매력적인 것은 없다. 그건 바로 어린 흑인 노예 꼬꼬였다. 작은 채찍과 함께 마리아에게 전달된 생일선물 꼬꼬는 한 존재의 '인간'이었다. 

  노예와 다른 피부 색깔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마리아는 상대적 우월감을 가진다. 검은색이 아닌 흰색의 피부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딸아이의 생일을 진심어리게 축복해주는 마리아 가족의 순박한 모습 속에는 흑인 노예들을 물건처럼 거래하고 채찍으로 때리는 악행의 이면이 함께 존재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소설 속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시대의 당연함으로 비춰질 뿐이다.

  마리아에게는 갈망하는 두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엄마와 아줌마들처럼 큰 가슴을 가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루빨리 사촌오빠 루카스와 결혼하는 것이다. 열네 살이 지나 성년이 되었음에도 마리아의 가슴은 커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슴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한 남자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마리아의 일기 전반에 걸쳐 독백된다. 얼핏 보기엔 열네 살의 마리아는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하고 순진한 소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평범한 외연적 이야기의 흐름 속에 무섭고 심오한 내면적 외침을 담고 있다. 동일한 인간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악의적 사고와 행동이 태연하게 펼쳐진다. 작가는 악을 판단하는 지성과 이를 바로잡을 용기를 지닌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악으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범하기만 한 마리아의 일상이 묵묵히 독백되어질 뿐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꽤 무게있는 의무를 독자에게 전가한다. 그것은 역사와 진실과의 관계, 그리고 무지와 절대선의 관계를 반드시 되새겨야 한다는 암묵적인 권고다. 우리가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 항상 진리로만 귀결되었던 것은 아니다. 한 시대의 진실이 다른 시대의 거짓이 되었고, 한 시대의 천사가 다른 시대의 악마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역사는 끊임없이 반추되었고 진화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선을 인간 스스로 깨닫고 쟁취해야 하는 지성의 필요와 책임이다. 모든 인간은 아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행동한다. 앎의 크기가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과연 우리는 인간의 지각으로 감지하는 3차원의 시공간을 얼마나 제대로 알며 느끼고 있는가. 혹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호도된 세계를 조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지가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인류의 역사는 매우 구체적으로 방증한다. 무지로 인해 발생된 모든 귀결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책임이다.

  그 어떤 악의와 양심도 인식하지 못하는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 이야기는 2백 년 전 남아메리카 수리남이라는 시공간의 차이를 초월하여 지금 이 순간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많은 시사를 던진다. 그것은 호도된 역사에 대한 책임일 수도 있고 양심과 용기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인류에게 필요한 절대적 도덕률일 수도 있고 인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 사악함일 수도 있다. 사유와 판단은 오직 독자의 몫이다. 이 소설이 주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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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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