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소설가와의 술자리에서였다. 서로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였다. 대화꽃은 한국의 정치현실과 인권의 문제에까지 피어있었다. 술이 흥건히 취해 최고의 분위기로 달아오른 순간, 함께 한 소설가는 말했다. 미국은 인권의 나라가 아니며 오히려 인권을 심하게 침해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나는 놀랐다. 자유와 평등으로 대변되는, 무엇보다 세계 제일의 인권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합중국이 인권과는 거리가 먼 인권 침해국이라고. 이후 나는 잠시 깊은 사유에 잠겼다.

  최근 한국 경찰의 강경 시위진압으로 말들이 많다. 군화발로 시민을 밟는다던가 방패로 머리를 가격한다든가 하는 강경한 진압 장면을 미디어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본 국민들은 너무 심한 처사라며 경찰과 정부를 비난한다.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가. 세계 제일의 '인권국가' 미국에 비하면 그 정도는 새발의 피라는 것을. 미국 경찰이 시민들을 어떻게 검문하고 시위대를 어떻게 진압하는지 본 적이 있는가. 유투브에 가서 동영상을 보라. 시민을 개패듯 패는 미국 경찰의 역동성을. 

  비인권국 미국의 실상은 참으로 당황스럽다. 미디어를 통해 인지되는 미국의 이미지는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거대한 긍정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다. 완벽한 삼권분립의 정치제도, 거대한 땅덩어리와 풍부한 자원, 세계 제일의 군사력,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규모, 다양성의 힘과 관용의 에너지 등 미국을 포장하는 것들은 온갖 긍정적인 키워드들이다. 하지만 실재는 항상 보이는 것과 다른 법이다. 술자리에서 강력히 설파한 그 소설가의 주장대로 미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한참 뒤쳐진 인권 후진국이다. 미국의 조악하기만 인권 유린의 단면은 조지 부시 정권에서 그 실상을 선연히 드러낸다.

  이라크 전쟁으로 대변되는 부시 정권의 실정은 한 나라의 행정부의 정책 실패로 갈무리하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을 치뤘다. 전쟁 초기부터 목적이 없는 전쟁임이 밝혀졌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은 궁색하기만 했고 실상 석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아직도 종결되지 않은 이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었는가. 이라크 전쟁은 수없이 많은 것을 죽였다. 이라크 시민을 죽였고, 미국 군인을 죽였으며, 미국의 자존심을 죽였고, 인간의 양심과 용기를 죽였다. 이 참혹한 전쟁과 동일한 의미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있다. 그리고 그 악행들을 강력히 집약하는 아이콘 '관타나모 수용소'가 있다.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는 아프간계 미국인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 마비쉬 칸이 쿠바 관타나노만의 미군기지에서 억울하게 수감되어 있는 수감자들과의 만남을 담은 에세이다. 뉴스와 신문으로 설핏 접해왔던 관타나모의 충격적인 실상이 책 곳곳에 담겨져 있다. 피의 혐의조차 없는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그곳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는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가 어떤 곳인가. 수감자 하나당 5,000~25,000달러를 '보상금'으로 주면서까지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였던 곳이다. 금전적으로 이득을 얻으려는 현지인들의 고발내용을 먼저 조사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잡아온 곳이다. 기소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5년 이상 억류하고 있는 곳이다. 자살한 수감자들의 시신을 고향에 보내기 전에 조직을 제거한 곳이다. 팔십 먹은 노인을 '적 전투원'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륜적 고문과 핍박이 벌어지는 곳이다.

  저자 마비쉬가 목도한 관타나모의 현실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진실보다 심각했다. 수감자들을 위한 통역 봉사로 어렵게시리 관타나모에 간 저자는 수많은 수감자들의 접견에서 그곳의 처절한 실상을 듣고 목격한다. 탈레반과는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잡혀와 수감되었던 일부터 하루하루 고통스런 고문과 비인간적 핍박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보고 들은 것은 잔인하고 개탄스러운 사건의 연속이었다.

  책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당혹과 분노감이 치밀었다. 특히 바레인 출신의 수감자 주마 알 도사리와 가즈니 지역에서 교사로 일했었던 모하메드 자히르가 당했던 신체적 가혹행위를 소개한 부분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발가벗긴 채 미군 여성장교의 생리혈을 얼굴과 온몸에 문지르기도 하고 성기를 면도날로 칼질하기도 했다. 또한 신체적 고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모독도 서슴치 않았다. 수시로 알라와 예언자 모하메드에게 저주를 퍼부면서 수감자들의 정신과 신앙의 자존심을 욕보였다. 불과 몇 년 전에 인권국 미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일이었다.

  이 책이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이유는 충격적인 실상을 전하고 있음에도 겸허하고 차분한 마음을 견지한 저자의 객관적 접근에 있다. 저자는 관타나모 수용소에는 악으로 분류되는 수감자도 적잖이 수감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9·11 테러를 주도한 칼레드 쉐이크 모하메드나 그의 공범 예메니 람지 비날쉬브, 1999년말 요르단과 LA에서 '세기말 폭탄 테러'를 기도했다 미수에 그친 아부 주바이다가 그곳에 수감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점은 그 어떤 사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공개적인 재판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저자의 확고한 믿음이다. 혐의도 확정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가두고 숨기면서 최소한의 인권마저 유린하는 미국 정부의 행위에 대해 저자는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감정적 표현보다는 법과 인권의 가치를 먼저 전제한 저자의 객관적 접근이 이 책의 존재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한 여성 변호사가 쓴 에세이이면서도 남의 일 같지 않은 강한 공감이 발산된 이유가 있다. 아직 완벽한 의식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대사와 관타나모'의 상징성은 상당수 많은 교집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금의 한국 현실은 이곳저곳에서의 다양한 모습으로 '작은 관타나모'의 형상을 오버랩시킨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부활과 이로써 제기된 민주주의의 역행은 2009년 한국의 엄연한 실재이다.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일획일점 건드리지 못한 채 그대로 살아있고 검찰의 정치화 또한 생생히 부활하고 있다. 미국인 여성 변호사가 쓴 한 편의 에세이가 2009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울리는 메시지는 바로 이 대목에서 명징해진다.

  지난 1월 오바마 대통령은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안에 폐쇄한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또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재판을 재검토하고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이른바 고도 특수 심문기법 사용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자신의 주요 선거공약을 실천에 옮긴 것과 동시에 전임 부시 행정부의 주요정책을 번복하는 조치로도 보인다. 늦게나마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올바른 길로 다가가고자 하는 자생력이 아직까지 미국이 잃지 않고 있는 최소한의 자존심이라 믿는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미국의 그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부럽게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오버일까. 개콘의 유행어를 떠올린다. 왠지 씁쓸하구만..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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