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하지 않은 인생, 고마워요 - 평범한 이웃들의 웃음+눈물+감사한 인생이야기
박은기 외 32인 지음 / 수선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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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닫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다. 하나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생의 영광은 반드시 고난 뒤에 따른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경험이나 타인의 삶을 통해 얻게 되는 이 두 가지의 깨달음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면서 다양하게 적용된다.

  인간은 평범한 것들의 특별함을 잊고 살아간다. '평범함'과 '특별함'이라는 의미적 상치는 서로를 수식하는 종속적 관계로서 연결된다.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면 그 앎의 가치의 특별성 또한 알게 된다. 소소한 것에 감사하고, 녹록한 것에 기뻐하며, 범상한 것에서 기적을 보는 삶이야말로 가장 특별한 삶인 것이다.

  고난의 문제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통과의례다. 비단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인용치 않더라도 고난과 승리는 하나의 패키지로 연결되는 인과관계를 갖는다. 우리 주변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보라. 그들에게는 반드시 역경을 이겨낸 분투가 있었다. 현재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을 암시하는 가장 분명한 기회다. 이 또한 진리다.

  수선재의 『반듯하지 않은 인생, 고마워요』는 여러 사람들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이다. 각 필자들은 소소하면서도 은밀한 삶의 에피소드들을 고백한다. 반듯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자신의 현재성이 완성될 수밖에 없었던 깊은 울림들이 수필집 곳곳에 배어 있다.

  서른세 명의 필자들은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삶을 들여다본다. 고통, 상실, 번민, 실패 등 모든 부정적 삶의 편린들은 종내 '감사'라는 희망의 삶적 동력으로 치환된다. 각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독자는 필자의 입장이 되며 강한 공감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평범한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각기 특별한 삶의 형태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파하고 회복되어질 우리네 인생들의 보편성이다.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마지막에 덧글 형식으로 이웃들의 코멘트들을 달았다. 타인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녹록지 않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는 이웃들이 있기에 필자들은 행복하다. 공감 덧글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바야흐로 자본주의 시대다. 능력이 선이 되고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이웃들의 따뜻한 관심과 격려는 점점 희박해져만 간다. 명상이라는 동일한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모습에서 따뜻한 이웃애를 느낀다.

  이 수필집의 필자들은 전문 작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글 곳곳에 투박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그 투박함은 정겨움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이기에 빛나는 글이 있다. 수필집의 구성과 내용을 감안했을 때 다듬어지지 않는 필력은 오히려 좋은 조화를 이룬다. 아마추어이기에 더욱 따뜻하고 공감적이며 진정성이 있는 문장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함'이라는 테마는 프로보다는 아마추어에 어울린다. 그게 훨씬 부드럽다. 그리고 정겹다. 그래서 좋다.

  각 필자들을 하나로 묶는 '명상'이라는 것에 대해 책 속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점은 자못 아쉽다. 그들이 함께 생활하며 공감하는 명상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어떠한 것인지 충분히 언급되지 않는다. 명상이 나를 평온케 했고 도전을 준 결과에 대해서는 고백하지만 정작 명상 자체의 구체화에 대해서는 결락되어 있다. 수선재와 명상에 대한 보다 자상한 언급과 그로 인한 각 필자들의 관계성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다면 보다 힘있는 수필집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책 제목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자. 반듯하지 않은 인생이 고맙다는 말은 '범상'과 '감사'와의 함수관계를 발생시킨다. 이 책은 반듯하지 않았던 인생을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고백함으로써 또 다른 평범한 이웃으로부터 위로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종내 '감사'라는 절대 긍정적 가치를 이끌어낸다. 결국 제목으로 회귀한다. 반듯하지 않은 인생이었기에 결국 '감사'한 것이다. 이 깨달음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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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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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한 인간 사이의 소통의 이야기다. 기독교의 교리와 제도 안에 구속되진 않지만 엄연한 기독교 신앙과 정신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그렇기에 서평의 논조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하나님을 안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내가 언급하는 '하나님'이라 함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즉 삼위일체의 신神을 말한다. 여섯 살 때 교회에 속해 있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그후로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찬양을 부르며 기도를 해오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해 아직도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해 완벽한 인지가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은 엄연한 신이기에 인간의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성과 절대성을 실존 자체에서 본인 스스로 내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력 부족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세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바로 이 순간 고뇌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나는 한 가지 뚜렷하게 이해되지 않는 질문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인간의 행복을 원하시는 사랑의 신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악한 사람이 승리하고 선한 사람이 패배하는 경우가 수없이 발생하는 곳이다. 선과 승리, 악과 패배 사이의 방정식이 정방향뿐만 아니라 역방향으로도 굴곡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사회 곳곳에서 엄연하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불가해하기만 한 '불공평'이라는 테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신앙을 흔들어 왔는지 모른다. 선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왜 선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승리를 한단 말인가. 이게 과연 공의의 하나님과 부합할 수 있는 일인가. 깊은 사념이 내 신앙을, 아니 어쩌면 이 세계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도전을 가해오고 있다.

  소설 『오두막』은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 라는 강렬한 문장을 띠지로 두르고 있는 이 소설은 악과 양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작가 윌리엄 폴 영(이하 '윌리')은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련한 필력으로 감동적인 서사를 그려냈다. 

  소설은 윌리가 자신의 친구인 매켄지 앨런 필립스(이하 '맥')의 고백을 대필해나가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맥의 막내딸 미시가 캠핑장에서 유괴되어 살해된 사건을 통해 맥이 겪는 슬픔과 분노, 기적과 회복,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맥이 딸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확인한 '오두막'이라는 공간은 맥의 '거대한 슬픔'을 완전한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치환적 시공간이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결국 이 소설의 제목 '오두막'의 상징성을 내밀하면서도 함축적이게 하는 요인이 된다.

  맥이 시각적으로 목도한 하나님의 형상은 기존의 인간적 상상력을 전복한다. 성부 파파는 흑인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는 중동계 남자의 모습으로, 성령 사라유는 아시아계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왠지 수염이 있고 연세가 있으며 백인의 형상을 띨 것이라는 쓸 데 없는 인간의 과도한 상상력에 조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3차원 과학 안에서 비쥬얼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불가한 것이다. 단 우리의 삶 곳곳에 각기 다양한 의도와 모습으로 역사하시며 섭리하실 뿐이다.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단순화하자. 이 소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성人性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관계성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밀도감 있게 접근한다.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인간 형상들은 하나님의 인성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제도나 규칙이 아닌 '관계'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과 호흡하려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상처받은 한 명의 인간에게 구체적이고 진실된 심정으로 진리와 평안을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수고를 오두막이라는 표상적 시공간을 통해 작가는 아름답게 녹여놓고 있다. 

  작가는 하나님의 존재성을 삼위의 신으로 완벽하게 소개한다.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파파, 예수, 사라유는 그대로 성부, 성자聖子, 성령의 하나님과 연결된다.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끌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길 원하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풀이하고 있다. 오두막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셨다. 서로 토의하고 기도하시며 맥의 구원을 성취시키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함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선연히 구분되는 고유 특질을 잘 보여준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이 먼저 신을 찾아나섰다. 오직 기독교만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아나선 종교다.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셨고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먼저 찾아나섰다. 무엇보다 신의 차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직접 들어오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한 인간 쫓기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사상이 종내 '사랑'이라는 거대한 선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고결함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은 사랑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오두막에서 맥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에 눈물을 짓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집요하고 실재적이며 파워풀하다. 악의 승리는 하나님 역사의 사실성에 대한 증거 불충분 요건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맥의 딸을 살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 하셨다.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하나님의 고민은 철저히 하나님의 시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인간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오게 될 때 몰이해에서 야기된 의심과 불신이 발생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짓는 지혜와 결단이 응당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신의 차원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초고차원의 하나님이 저차원의 인간을 향해 발산하는 사랑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하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낮은 차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신을 이해할 때 신의 차원과 영역을 전제하지 않을 경우 상당한 사유적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다시 한 번 단언한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관계에서는 가깝고 차원에서는 멀다.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가 신과 인간인 것이다. 이 소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과 상치성을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따뜻하게 들려주고 있다.

  이야기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매우 농밀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야기 자체도 감동적이지만 작가가 의도한 서사 구도의 방식 또한 감동을 배가하고 있다. 작가는 뒷 이야기를 통해 이 소설이 철저히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픽션임을 고백한다. 맥은 실존인물이 아니며 모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딸을 잃은 한 남자가 오두막에서 며칠동안 삼위의 하나님과 대면하여 지낸다는 이야기 자체가 황당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기적은 믿음 안에서 '현실'이 되는 법이다. 작가의 가공인물인 친구 맥의 고백을 작가 자신이 대필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의도는 이 소설이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부담없이 읽힐 수 있는 폭넓은 공간성을 함의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처를 받고 위로를 얻고 싶어한다. 인간의 고통과 신의 위로가 만나는 오두막이라는 상징적 공간은 인간이라면 응당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바로 그곳이다.  

  어떤 소설은 별 다섯 개로도 부족하다. 『오두막』은 네이버 리뷰로그의 별점 포화지수인 다섯 개의 별점으로도 호평이 부족한 소설이다. 감동적인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좋은 소설, 소름이 돋도록 감동을 주는 소설은 흔치 않다. 또한 이를 평가하는 잣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오두막』은 매우 잘 쓴, 감동적이고 깊이있는 서사를 담고 있는 훌륭한 소설이다.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난해한 교의를 다양한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 편안하고 부담없도록 상징화한 부분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상처'와 '치유'라는 상반된 성질의 것이 결국 동일한 곳에서 치환된다는 진리의 울림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깊은 감동의 본질이다. 

  이런 소설은 혼자 읽기가 아깝다. 타인과 함께 나눌 때 감동의 파장은 지수적이 된다.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서점에서 추가 다섯 권을 주문한다. 『오두막』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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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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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박민규를 처음 만난 건 대부분의 독자가 그러했듯이 바로 '그' 작품을 통해서였다. 제8회 한겨레문학상은 매우 신선하고 유쾌한 작품에게 돌아갔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통해 2003년 혜성처럼 등장한 박민규는 한국 문단에 큰 충격이었다. 어느덧 그 충격은 한국소설의 기대와 미래로까지 진보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박민규가 되었다.

  그를 지금에 있게 한 작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소위 '삼미'는 여느 소설가의 처녀작들보다 인상적이다. 독특한 소재와 개성있는 문체로 술술 읽히면서도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박민규식의 이단아적인 텍스트는 그에게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희한한 닉네임이 붙는 계기가 되었다. 김애란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미래'라는 태제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그가 이번에는 로맨스를 들고 왔다. 박민규와 로맨스라는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조합에 그의 신작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있다.

  이 소설은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 그 자체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작가 박민규는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양산한 부조리의 산물을 소설 소재의 전면에 내세운다. 여성 권력의 핵심으로 포효하고 있는 '외모'라는 테마를 통해 위대한 사랑의 가치를 이끌어내고 있다. 소설 속 화자의 독백은 기존 박민규 문체의 특징이었던 유쾌함과는 다소 거리를 둔다. 술술 잘 읽히지만 이야기 전반에 걸쳐 흐르는 무게감 있는 독백 서술은 독자의 몰입도를 더욱 깊이있게 이끈다.

  작가는 20대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못생긴 여자를 사랑했던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각기 다른 상처를 갖고 있는 세 명의 인물이 이야기 전개의 핵심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중반의 서울, 아버지로부터의 트라우마를 지닌 소설 속 화자 '나'와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못생긴 '그녀', 그리고 '나'의 정신적 멘토 요한, 세 명의 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그녀'에 대한 '나'의 변함없는 사랑과 철학 강의하듯 '나'에게 자신의 사유들을 풀어놓는 요한의 멘토링이 화자 '나'의 독백적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이 특이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사 구도와 멀티 엔딩을 통한 반전 효과는 수준급이다. 독자의 의지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2개의 이야기, 혹은 3개의 이야기로 해석이 가능하다. 소설의 뒷부분, 독자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 흐름이 바뀔 수 있게 한 박민규의 의도는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고려해볼 때 매우 적절한 장치이다.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적지 않은 분량의 독백 서사를 인내했다면 마지막에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이야기 구도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독자에게 시원한 한 방을 날리는 작가의 결말 처리 방식은 고도의 센스로 이해할 만하다.

  박민규는 역시 마이너리티의 편에 서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부와 아름다움의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작가는 미 가 곧 선善을 결정하는 세계, 외연의 미적 퀄리티가 곧 존재의 크기를 결정하는 굴절된 세계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을 가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행복의 근원과 사랑의 본질마저도 왜곡시키는 미의 권력화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우리 삶 곳곳에 점점 진보되고 공고해져 왔음을 상기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고 박민규는 말한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의 벽을 넘지 못하고서는 인간은 근원적인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그는 꼬집는다. 내 행복의 절대적 가치 기준은 바로 나 자신임이 분명한데 자본주의 시스템의 과도한 맹신은 종내 자아의 행복을 타자의 현재성에 견주는 오류를 양산한다. 부끄러워하면 할 수록, 부러워하면 할 수록 내 행복의 척도를 가늠하는 최저점의 마지노선은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호도된 자아상에 대한 올바른 예방법은 부끄럽고 부러워해야 할 모든 것들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박민규는 일깨운다. 그것들이 내 안에서 시시해질 때야 비로소 외연보다는 내면이, 비본질보다는 본질의 가치가 우선하는 진정한 행복의 세계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박민규는 이를 사랑의 가치로까지 발전시킨다. 우주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단 하나의 절대선으로 축약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타협과 토론이 필요없는 절대적 선善이다. 이 거대한 본질은 너무 거룩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 어떤 외연의 요소들에 의해 변질될 수 없다. 그게 진리다. 작가 박민규는 거대하고도 오묘한 사랑의 카테고리 안에서 부富와 미美라는 외형성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인지를 간절한 메시지로 증거하고 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진정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고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는 명징한 진리를 설파하는 박민규의 서사에 한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쏟아내는 다듬어진 구어적 문체, 주옥과 같이 정제된 사유와 철학적 메시지들,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오가며 주제의 간절함을 극대화하는 탄탄한 얼개, 독자의 입장에서 질문과 답변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멀티 엔딩 등은 이 소설의 완전성을 더욱 오롯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위대하고 거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독특한 소재를 통해 중량감 있게 전달한 박민규식 서사에 박수를 보낸다. 술술 잘 읽히면서도 녹록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역시 박민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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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vs 백악관
박찬수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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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많은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 앞에 온 국민은 경악했고 슬퍼했다. 한때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지지했던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그의 죽음이 오로지 언론과 검찰 때문이라는 판단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굴곡과 오욕으로 점철된 한국의 현대사를 반드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해의 요소 중에 바로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모순적인 정치구도가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은 엄연한 대통령중심제 국가이다. 대통령제를 처음 시행한 미국과는 역사와 의식의 차이가 많이 벌어져 있지만 한국의 대통령제 또한 많은 발전을 이루어왔다. 의회가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을 만큼 한국의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많은 성숙을 이루었다. 하지만 아직까지의 질적 수준은 미국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아직도 먼 것이다.

  개마고원의 『청와대 VS 백악관』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대통령중심제 국가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다룬 책이다. 저자는 과거의 경험과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한국의 대통령제와 미국의 대통령제를 비교 대조하고 있다. 두 나라 대통령제를 표상하는 강력한 아이콘인 '청와대'와 '백악관'을 제목 전면에 배치하여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저자는 두 나라의 대통령제의 의식수준이 경제규모만큼이나 큰 차이를 보이는 수많은 실례들을 매우 흥미있게 소개한다.

  1부 <권력의 심장은 어떻게 뛰는가>에서는 대통령 전용차에서 대변인까지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실감할 수 있는 다양한 키워드들을 소개한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규모와 구조, 대통령 전용차와 전용기의 특징과 형태, 경호원들과 주치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최고 권력의 실재를 설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두 국가의 두드러진 차이가 흥미로운데, 한국의 그것들은 위용과 형식을 중시한다면 미국의 그것들은 실용과 합리에 맞춰져 있다. 외연적 권위에 치중하기보다 효율과 실용을 중시하는 미국식 대통령제의 격식이 더 겸손하고 합리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2부 <권력의 허브를 구성하는 것들>에서는 보다 본질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대통령의 인사검증에서부터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화들을 소개하며 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설명한다. 미국에서 정권 부패와 인사 실패가 비교적 많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소개한 부분은 자못 흥미로우면서도 진지하게 읽힌다. 아직까지 우리의 대통령제는 그런대로의 형식은 갖추었으나 품격있는 의식을 갖추는 데는 많은 부족이 보이기 때문이다.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불거지는 정권 실세들의 부패 문제는 제도권의 후진적인 민주주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각 파트마다 양국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많은 내용들이 소개되어 독자의 관심을 이끈다. 두 나라의 차이도 흥미롭지만 역대 한국 대통령들의 성격과 기질, 업무 스타일과 공과를 다룬 부분들도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특히 맨마지막 파트인 한미간의 정당회담 충돌사는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몰랐던 사건을 아는 희열 만큼이나 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개성들을 엿볼 수 있어 맛깔스럽게 읽을 수 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책이 한 권 또 있다. 네모북스에서 출간한 『도대체 청와대엔 무슨 일이?』 도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심장부인 청와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당시 현역 최장기 청와대 출입기자가 보고 듣고 느끼고 취재한 것을 정리한 책이다. 한국 대통령의 다양한 단면들을 소개하고 있어 이 책과 적절한 교집합을 가진다. 책이 출간될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내용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그의 서거 이후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가벼운 참고도서로 읽어보는 데 큰 무리가 없다.

  한국과 미국은 삼권분립을 기치로 하여 대통령중심제라는 동일한 제도를 헌법에 명시해놓고 있다. 하지만 운영 능력과 국민 의식은 큰 차이를 보인다.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에 대한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는 한국의 모습은 미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답고 모범적인 전직 대통령 문화는 미국의 자랑거리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세계 초유의 사태를 이뤄낸 대한민국의 암울한 대통령 역사는 퇴임 후가 더 아름다운 미국의 그것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몇번의 정권이 바뀌고 몇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들도 평화롭고 안정감 있게 퇴임 이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의 중량감을 느낀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지 현재의 국민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그 나라 지도자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비례한다는 얘기다. 한국 전직 대통령들의 불행한 역사가 그대로 한국민들의 수준 낮음과 연결된다고 믿지는 않는다. 허나 분명한 것은 대의 민주주의를 엄연하게 실시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좋은 지도자의 출현과 성숙된 민주주의의 실현은 바로 한국민의 책임과 의무라는 사실이다. 선택은 결국 국민의 몫인 것이다. 지난 수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룬 한국인의 힘과 역동성은 보다 좋은 미래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라는 긍정적인 희망을 엿보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전제다. 난 그 전제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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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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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문단에서 공지영은 아이러니한 존재다. 대극적인 사랑과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공지영 만큼 많은 독자들과 호흡하는 작가는 없다.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피드백되며, 가장 많이 평가받는 작가이다. 관심의 대상이란 얘기다.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작가임에는 분명한데 아직도 적지 않은 평단과 대중은 그녀에게 시원한 박수를 거부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지영을 비판하는 이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일차적 논거는 두 가지다. 감상적이며 가볍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2000년대의 한국소설의 위기 가운데 공지영이 쳐올린 공의 높이는 결코 낮지 않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그 공높이의 수준을 평가하는 양극화에 있다. 한국소설의 미래인가 과거인가, 다시 말해 한국 독자의 진보인가 퇴행인가의 중요한 기로점에 소설가 공지영의 존재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자못 진지한 질문으로 서평의 시작을 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의 최신 장편소설 『도가니』는 공지영 문학의 현재성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의 위기를 2000년대로 한정한다면 공지영은 서사의 가난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녀의 의식은 현실 고발(『동트는 새벽』), 후일담(『인간에 대한 예의』), 페미니즘(『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삶과 죽음(『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시대와의 화해(『즐거운 나의 집』)을 거쳐 더 넓게 진화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 바로 『도가니』가 있는 것이다.

  서두부터 장황하게 언급한 공지영 문학에 대한 배경 설명은 그녀의 텍스트를 편견과 선입견을 탈피하여 있는 그대로 읽어보자는 내 의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문학을 위시한 모든 예술적 장르에서의 판단과 비평은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제발 소설가 공지영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비본질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고 했다. 텍스트 밖은 안과 같아서 안팎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공지영 소설을 감상하는 데 인간 공지영의 외연은 접어두자. 소설가 공지영, 그리고 그녀의 텍스트 『도가니』만 보자.

  공지영은 이 소설을 통해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제기한다. 무진이라는 마을에서 끔찍하게 벌어진 장애아 성폭행 사건과 이를 둘러싼 정의와 비정의의 대결을 진지하면서도 섬세하게 담아냈다. 거짓이 보수화되어 썩은 권력으로 공고해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바로잡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이 소설은 개탄스러운 이야기를 통해 충고한다. 처참한 이야기는 인간의 악한 본성과 사회적 이기의 암울함을 혐오스러울 정도로 사실스럽게 관통하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강인호가 기간제교사로 일하기 위해 향하는 무진시의 안개 낀 풍경을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안개로 뒤덮여 있는 무진시의 적막함과 그곳 대형교회의 주일예배 풍경, 그리고 철길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어느 소년의 죽음을 소설 전면에 단 세 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작가가 전면에 배치한 세 군데의 시공간에 동일하게 존재한 것은 '안개'였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안개의 존재성을 부각하며 주기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무진시를 뒤덮고 있는 안개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지방의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과 이를 밝히고자 하는 소수의 진실과 덮으려는 다수의 거짓이 대결하는 구도가 이 소설의 기본 얼개다. 이야기의 절반 가까이가 법정을 배경으로 할 정도로 치열한 대결이 펼쳐진다. 진부할 수도 있는 선악의 대결을 작가는 독자 자신이 마치 법정에 있는 한 명의 분노자인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생명력있게 담아냈다. 공지영의 노련한 감수성은 읽는이의 오감을 자극시키며 온 정신을 처참한 서사에 몰입시킨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나는 주인공 강인호라는 인물에 강한 연민을 느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의 무능력, 자애학원에서 목도한 충격적 진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결단, 쉽지 않은 싸움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는 용기, 대의를 위한 이상과 가족 행복의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상 등 인간 강인호의 입체성은 이 소설을 읽는 가장 큰 묘미라 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과연 나는 강인호의 선택에 대해 자신있는 비난을 던질 수 있을까. 작가의 연금술에 의해 또 하나의 강인호가 된 내 자신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이야기는 종내 정의의 승리로 종결되지 않는다. 얼핏 보면 악의 보수화로 점철된 거짓의 단합이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정의가 비정의를 오롯하게 제압하지 않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무거운 해석의 의무를 토스하고 있다. 책장을 덮은 후 독자는 강인호가 된다. 또한 서유진이 된다. 그리고 끝내 이기지 못한 처절한 싸움의 결말을 응시하며 이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우리네 현실성에 대입하게 된다.

  공지영이 제시한 '도가니'는 도덕과 양심의 폐허가 수구화되고 단합되어진 공간을 상징한 것이기도 하고, 인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악마적 본성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의 암울한 단면에 대한 축소판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분명한 정의가 비정의의 카르텔을 오롯이 재단하는 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가 지불된다는 현실성의 한계를 소름이 돋도록 재인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당위와 존재 사이의 괴리는 인간의 현명함과 악마성이라는 모순된 이중성을 이끌어내며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웅숭깊은 곱씹음을 유도한다.

  참담한 실화를 다루었음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고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공지영의 힘이 놀랍다. 이제 더이상  공지영은 징징대는 이야기만을 만들어내는 감성 과포화 소설가가 아니다. 공지영의 서사와 문장 어느곳에서도 감정 과잉과 가벼움은 찾아볼 수 없다. 뼈아픈 실화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다듬어 유려한 문체로써 독자에게 전달한 냉정함이 돋보인다. 또한 독자 한사람 한사람을 도덕과 상식의 폐허라는 광란의 도가니에 집어넣음으로써 진실과 정의가 재단된 엄연한 실재의 세계를 조망하고 이에 대한 자아의 현재상을 궁구하게 하는 의무감을 각인시킨 작가의 마력에 전율을 느낀다.

  소름이 돋도록 너무나 잘 쓴 소설 『도가니』에 나는 아낌없이 별 다섯 개를 선사한다. 이 소설을 통하여 공지영을 거부했던 이들의 비판논거는 더욱 궁색해질 것이다. 어려운 소재를 냉정하고 담담히 서술한 소설가 공지영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정말 잘 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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