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박민규를 처음 만난 건 대부분의 독자가 그러했듯이 바로 '그' 작품을 통해서였다. 제8회 한겨레문학상은 매우 신선하고 유쾌한 작품에게 돌아갔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통해 2003년 혜성처럼 등장한 박민규는 한국 문단에 큰 충격이었다. 어느덧 그 충격은 한국소설의 기대와 미래로까지 진보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박민규가 되었다.

  그를 지금에 있게 한 작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소위 '삼미'는 여느 소설가의 처녀작들보다 인상적이다. 독특한 소재와 개성있는 문체로 술술 읽히면서도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박민규식의 이단아적인 텍스트는 그에게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희한한 닉네임이 붙는 계기가 되었다. 김애란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미래'라는 태제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그가 이번에는 로맨스를 들고 왔다. 박민규와 로맨스라는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조합에 그의 신작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있다.

  이 소설은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 그 자체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작가 박민규는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양산한 부조리의 산물을 소설 소재의 전면에 내세운다. 여성 권력의 핵심으로 포효하고 있는 '외모'라는 테마를 통해 위대한 사랑의 가치를 이끌어내고 있다. 소설 속 화자의 독백은 기존 박민규 문체의 특징이었던 유쾌함과는 다소 거리를 둔다. 술술 잘 읽히지만 이야기 전반에 걸쳐 흐르는 무게감 있는 독백 서술은 독자의 몰입도를 더욱 깊이있게 이끈다.

  작가는 20대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못생긴 여자를 사랑했던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각기 다른 상처를 갖고 있는 세 명의 인물이 이야기 전개의 핵심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중반의 서울, 아버지로부터의 트라우마를 지닌 소설 속 화자 '나'와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못생긴 '그녀', 그리고 '나'의 정신적 멘토 요한, 세 명의 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그녀'에 대한 '나'의 변함없는 사랑과 철학 강의하듯 '나'에게 자신의 사유들을 풀어놓는 요한의 멘토링이 화자 '나'의 독백적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이 특이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사 구도와 멀티 엔딩을 통한 반전 효과는 수준급이다. 독자의 의지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2개의 이야기, 혹은 3개의 이야기로 해석이 가능하다. 소설의 뒷부분, 독자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 흐름이 바뀔 수 있게 한 박민규의 의도는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고려해볼 때 매우 적절한 장치이다.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적지 않은 분량의 독백 서사를 인내했다면 마지막에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이야기 구도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독자에게 시원한 한 방을 날리는 작가의 결말 처리 방식은 고도의 센스로 이해할 만하다.

  박민규는 역시 마이너리티의 편에 서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부와 아름다움의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작가는 미 가 곧 선善을 결정하는 세계, 외연의 미적 퀄리티가 곧 존재의 크기를 결정하는 굴절된 세계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을 가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행복의 근원과 사랑의 본질마저도 왜곡시키는 미의 권력화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우리 삶 곳곳에 점점 진보되고 공고해져 왔음을 상기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고 박민규는 말한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의 벽을 넘지 못하고서는 인간은 근원적인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그는 꼬집는다. 내 행복의 절대적 가치 기준은 바로 나 자신임이 분명한데 자본주의 시스템의 과도한 맹신은 종내 자아의 행복을 타자의 현재성에 견주는 오류를 양산한다. 부끄러워하면 할 수록, 부러워하면 할 수록 내 행복의 척도를 가늠하는 최저점의 마지노선은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호도된 자아상에 대한 올바른 예방법은 부끄럽고 부러워해야 할 모든 것들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박민규는 일깨운다. 그것들이 내 안에서 시시해질 때야 비로소 외연보다는 내면이, 비본질보다는 본질의 가치가 우선하는 진정한 행복의 세계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박민규는 이를 사랑의 가치로까지 발전시킨다. 우주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단 하나의 절대선으로 축약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타협과 토론이 필요없는 절대적 선善이다. 이 거대한 본질은 너무 거룩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 어떤 외연의 요소들에 의해 변질될 수 없다. 그게 진리다. 작가 박민규는 거대하고도 오묘한 사랑의 카테고리 안에서 부富와 미美라는 외형성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인지를 간절한 메시지로 증거하고 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진정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고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는 명징한 진리를 설파하는 박민규의 서사에 한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쏟아내는 다듬어진 구어적 문체, 주옥과 같이 정제된 사유와 철학적 메시지들,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오가며 주제의 간절함을 극대화하는 탄탄한 얼개, 독자의 입장에서 질문과 답변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멀티 엔딩 등은 이 소설의 완전성을 더욱 오롯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위대하고 거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독특한 소재를 통해 중량감 있게 전달한 박민규식 서사에 박수를 보낸다. 술술 잘 읽히면서도 녹록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역시 박민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