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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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키의 귀환 #

  하루키가 돌아왔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거대한 분량의 장편소설로 일본열도를 흥분시키고 있다. 그의 신간 『1Q84』의 인기가 장난이 아니다. 출간 당일에만 68만 부 판매, 발매 10일 만에 100만 부 판매, 3개월 만에 2009년 일본 전체 도서 판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일본에서의 경이적인 판매부수는 국내에서도 그대로 전도되고 있다. 각 서점의 소설 및 전체 서적 베스트셀러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한국인들의 하루키 사랑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하루키를 찾게끔 만드는가. 왜 하루키에 열광하는가. 그의 신작 장편소설 『1Q84』는 이러한 하루키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제시한다.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그는 쉽게 쓴다. 그리고 재미있게 쓴다. 쉽고 재미있는 카테고리 안에서 하루키적 요소들은 역동하고 조화한다. 그럼으로써 독자와 친근하게 호흡한다. 혹자는 이러한 하루키 문학의 친화력을 '대중'이라는 비판논거로 풀이한다. 하지만 이는 선후가 잘못된 해석이다. 대중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문학이 조명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문학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에 대중이 환호하는 것이다. 문학과 문학인을 평가할 때 대중이라는 단어만큼 불편하고 부적절한 것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분명 뛰어난 소설가다. 『1Q84』는 하루키 특유의 사유 우주와 문학 세계가 집대성된, 그의 천재적 작가의 면모를 가감없이 드러낸 명품 텍스트다.


# 『1Q84』의 배경 #

  굉장한 분량이다. 1,300페이지가 넘는 거대 서사에 눈과 머리와 가슴을 맡긴지 10일 만에 완독을 마무리했다. 본래 책을 느리게 읽지만 소설은 더 그러하다. 게다가 하루키의 소설은 최대한 느리게 읽는다. 하루키가 그려낸 현실과 초현실의 아이러니한 스케치, 뒷부분을 알 수 없는 숨막히는 이야기 전개, 등장인물들의 기막힌 매력, 간결한 문체와 적절한 관념성 등은 하루키 문학이 갖는 강점들이다. 『1Q84』 또한 하루키 소설의 유전자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보다 광대해졌고 더욱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즉 하루키는 이 소설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폭과 깊이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구성이 특이하다. 하루키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두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홀수장은 아오마메라는 서른살 여자의 이야기가, 짝수장은 덴고라는 동년배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개의 이야기는 각각 독립된 것처럼 평행선을 달리다가 뒷부분으로 갈수록 종속되며 엮여진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그들의 나이 10살 때의 어느 겨울날에 서로의 손을 잠깐 잡는 것으로 둘 사이의 운명성을 개시 한다. 여기서 두 인물의 '손잡음'의 차이가 있다. 아오마메는 손을 '잡는' 능동적 주체인 반면 덴고는 손을 '잡히는' 수동적 입장에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잠깐 손을 잡은 것이 전부인 그들의 첫 '결합'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찾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 방향'이라는 소설의 본류를 태동시킨다. 


# 하루키의 세계관 #

  『1Q84』는 출간 전부터 옴진리교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현실사회에 정면으로 부딪혀보고자 하는 하루키의 작가적인 기백이 회자되며 부각된 소설이다. 하지만 이는 이 소설의 배경, 즉 외연에 한한 부분이다. 하루키는 결코 사회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소설은 철저히 개인의 영역, 그것도 '사랑'의 힘을 역설한다. 세계가 변한다 해도 '나'는 변하지 않으며 그 진리를 자각하는 데서 진정한 사랑의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그가 그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강조해온 세계관이기도 하다. 

  하루키는 항상 그랬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강조한 사랑은 '본질'로서의 사랑이다. 하루키는 '지고지순順'이나 '일편단심心'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의 방법이나 색상의 영역이다. 본질로서의 사랑은 주체와 객체를 동일한 실존 세계에 묶어두지 않음으로써 그 의미를 집대성한다. 태생성 안에 절대적으로 내재된 근본 사랑의 본체는 인간이 기껏 인지하는 3차원의 시공간을 초월한다. 즉 '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너'의 실존이 '나'의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1Q84』에서 전하는, 아니 하루키의 소설 전반에 걸쳐 흐르는 하루키적 사랑의 근본적 의미이다.

  소설에서 덴고를 향한 아오마메의 사랑이 그렇다. 동시에 아오마메에 대한 덴고의 사랑도 그렇다. 자신이 죽어야만 덴고가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아오마메는 죽어야만 했다. 덴고도 다르지 않다. 아버지의 병상 위에 '공기 번데기'라는 판타지로 부활한 10살 무렵의 아오마메의 형상은 덴고의 사랑을 더욱 분명하고 명징케 한다. 이미 이 세계에서 사라진 아오마메의 존재를 갈구한다. 이러한 아오마메를 향한 덴고의 방향성은 이 소설의 연장선상에까지 확장된다. 하루키가 마저 또는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은, 하지만 독자에게 다의적 해석으로 양보한 사랑의 완전성을 멀티 엔딩의 형태로 재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의도는 결국 속편을 암시한 것일 수 있다. 벌써부터 3편에 대한 목소리가 적잖이 들리는 것 같다. 『태옆감는새』의 답습이 진행될 지 진지하게 지켜볼 일이다.


  1권은 정말 쉼없이 읽힌다. 하루키는 '자아, 종교, 사랑, 철학, 인간, 현실, 상실, 고독' 등 다양한 세계와 우주를 그의 간결한 문장 위에 올려놓는다. 흡입력 있는 서사는 독자를 끊임없이 빨아들이며 숨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2권의 가독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1권이 서사의 응집력을 단단히 하여 이야기 자체만으로 독자를 흡수한다면 2권은 아오마메와 덴고 사이의 사랑을 집중적으로 관념화하고 상징화한다. 두 인물의 사랑을 통찰하고 조정하는 관념적 문장들이 2권 곳곳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렇기에 2권은 1권보다 느린 속도를 요구한다. 다분히 다의적 해석을 독자에게 요구하는 하루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소설에서 '1984'의 세계인지 '1Q84'의 세계인지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의 개수로 판명된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각자의 이유와 사건을 통해 두 개의 달이 하늘에 떠 있는 '1Q84'의 세계를 살아간다.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두 개의 달'은 소설 속에서 수없이 반복 등장되면서 실제의 현실(1984)과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그 세계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그 안에서 생동하는 아오마메와 덴고는 분명한 현실을 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가 아닌 개인, 즉 '나'의 좌표다. 달이 한 개밖에 없건, 두 개가 있건 세 개가 있건, 결국 덴고(아오마메)라는 인간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의 말미 덴고가 아버지의 병상 앞에서 고백하는 자아에 대한 주체적 인식은 결국 문제의 본질이 외부세계가 아닌 나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교훈한다. 세계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인 것이다. 어디에 있더라도 나는 나일 뿐이다. 나의 본질과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고유의 문제를 안고 있고 고유의 자질을 가진 한 명의 똑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달에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포효하는 덴고의 모습에서 하루키의 판타지는 현실적 메시지로 환원된다.


# 『1Q84』의 매력 #

  하루키는 매력적인 소설기법과 다양한 소재를 통해 뛰어난 재미를 선사한다. 소설에서 그려진 두개의, 아니 그 이상의 세계들은 전부 애매모호하다. 하루키는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를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나'의 존재가 실재인지 허상인지 실존 근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소설에서 달이 한 개 떠 있는 1984년의 현실성과 '분명하게' 두 개 떠 있는 '1Q84'라는 비현실적 현실성을 가름하는 객관은 명확하지가 않다. 물론 다의적 해석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결국 하루키의 이러한 의도는 그의 전작들을 곱씹게 하는 동시에 별도의 문학적 획을 긋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신비스럽고 입체적인 소설작법 또한 인상적이다. 후카에리가 말하고 아자미가 받아쓰며 덴고가 리라이팅하는 「공기 번데기」 는 『1Q84』 속 액자소설로서 특수한 역할을 지닌다. 또한 인물이 소설 속 소설로 침투하기도 하고 다른 인물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한다. '1Q84'로 향하는 입구는 있되 출구는 없는 일방통행식 초대, 엄연한 자연 환경인 하나의 달 외의 또 하나의 달의 존재, 현실의 '1984'와 대비되는 또 다른 현실세계 '1Q84'의 명칭 변경 등은 소설가로서의 하루키의 재치와 아이디어를 다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몇몇 소재들의 교집함을 목도하게 되는데 『1Q84』에서도 그 경향은 두드러진다. 독자는 하루키 소설에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코드들─고양이, 입구와 출구, 성기, 도서관, 상실, 세계, 쥐, 분신─을 만난다. 하루키가 자주 사용하는 이러한 조각들은 그의 문학에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것들이다. 많은 독자들이 『1Q84』 속에서 『상실의 시대』를 읽고 『해변의 카프카』를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묘한 기시감이 반드시 동반되는 게 하루키 소설의 명징한 특징이다.

  하루키의 소설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1Q84』를 읽는 가장 큰 흥미는 주인공의 기막힌 매력에 있다. 이 소설의 매력중 8할은 두 주인공의 매력이다. 책을 읽는 내내 아오마메와 덴고의 매력에 흠취했다. 그 매력은 다른 어떤 소설 속 주인공들의 그것보다 농밀하고 압도적이었다. 나에게 『1Q84』를 여는 것은 아오마메와 덴고를 만나는 순간이었고 닫는 것은 그들과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아오마메는 내 속에서 숨쉬었고 덴고는 내 가슴을 두근거렸다. 나도 모르게 방 창문을 열고 달의 개수를 확인했다. 그리고 어느덧 『1Q84』 안에 들어가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목도했다. 그랬다. 나는 하루키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설 안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인물을 창조해내는 하루키의 힘이다.


# 근대문학의 종언과 하루키의 위치 #

  일본 문단은 현재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태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가라타니 고진이나 가와니시 마사아키 등 일본 내 저명한 평론가들은 일본소설이 종내 마침표를 찍었다고 단언한다. 그 마침표의 좌표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 이후 120년 동안 일본문학은 진보했고 발전해왔다. 일본소설은 그들의 역사와 함께 소재를 공유해왔던 '나(我), 집(家), 성(性), 신(神)'을 모두 관통했고 조명했다. 하나의 소설사에서 나올 수 있는 훌륭한 작품들이 모두 나왔다고 할 만큼 풍성했다. 이제는 예전의 소설보다 더욱 훌륭한 소설을 써야만 하는 의무감이 일본 문단을 압박하고 있다. 바로 그 시종점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소설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하루키적 마침표의 디테일은 무엇일까.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가와바탸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주창했다. 그로부터 26년이 흘러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말했던 것은 '애매한 일본의 나'였다. 야스나리가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외쳤을 때 '아름다운 일본'과 '나'는 종언을 맞이하고 있었다. 겐자부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나'를 규명했을 때 일본인 안에서 명확한 '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근대문학의 종언의 마침표에 해당한다면 그는 과연 무엇으로써 일본과 일본인 사이의 결락을 연결지을까. 하루키 소설이 끊임없이 읽힐 수밖에 없는 보다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너무 잘 쓴 소설 『1Q84』 #

  서평의 말미에 도착했다. 내가 일천한 분석으로 『1Q84』와 하루키에 대해 찬연한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잘 썼기 때문이다. 『1Q84』는 정말 잘 쓴 소설이다. 이전 작품을 전부 끌어안으면서도 확연한 한 획을 긋는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결정판, 이라는 수식어구가 전혀 아깝지 않다. 명품 텍스트는 명품 작가를 통해 창조된다. 하루키는 명품 소설가다. 소설 『1Q84』는 하루키의 천재성을 충분하고도 적확하게 증명하고 있는 최신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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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인기가 녹록지 않다. 출간 10개월 만에 100만 부를 달성, 국내 순문학 단행본으로는 최단 기간 100만 부 돌파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웠다. 많이 팔린다고 해서 좋은 책은 아니다. 평소 베스트셀러에 주관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기에 오히려 대중적인 문학에 대한 나름의 편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책에 대한 평가는 종내 '텍스트' 자체로 귀결된다. 텍스트가 곧 진리요 본질이다. 바로 그 기준에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참 잘 쓴 훌륭한 소설이다.

  이미 나는 지난 두 번의 서평을 통해 이 소설에 대해 전례가 드문 찬탄을 선사한 바 있다. 신경숙만이 쓸 수 있는 완전한 문체로 엄마라는 소재에 대한 기존의 통속성을 완벽히 무너뜨린 찬란한 텍스트에 대해 나는 별 다섯 개로도 모자라다며 징징대었었다. 정말 잘 쓴 완벽한 소설이었기에 책의 막장을 덮은 후의 좋은 느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평評은 객관 위에 주관을 올려놓는 작업이다. 동일한 작품일지라도 각 사람의 기호와 판단에 따라 평가는 엇갈린다. 어떤 사람에게 셰익스피어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천재가 된다.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영국에 의해 과대포장된 범상한 극작가에 불과하다. 사람은 각기 다르다. 다양성의 힘은 실로 놀랍다. 인류가 위대한 것은 다양성에 대한 깊은 지성과 이를 관용容할 수 있는 힘을 동시에 가졌다는 점이다.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행복하고 그것을 인정할 때 위대하다. 다름은 곧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이는 문학을 보는 잣대와 기준에서도 적용된다.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평가도 사람마다 각기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이 소설이 잘 쓴 소설임에는 대부분이 공감한다. 하지만 보다 디테일한 문학적 평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적잖다. 어떤 사람은 <엄마를 부탁해>가 잘 쓴 소설임은 인정하지만 평단과 대중의 과도한 찬사를 받을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정도의 소설은 범상의 영역에서 창조될 수 있는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아마 그들은 이 소설이 모성母性이라는 식상한 소재를 반복했다는 점 자체를 전제적으로 꼬집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아직도 특별하고 예민하며 뜨거운, 하지만 동시에 진부한 '감자'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대한 내 찬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대목에서 발산된다. 소위 '엄마 서사'로 명명될 수 있는 통속적인 이야기를 진부하지 않게 철저히 문학적으로 썼기 때문이다. 즉 통속성의 파괴와 섬세한 문학미가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거기다 신경숙의 발군의 문체는 보너스다.

  질문하자. 한국 문학사에서 이 소설 만큼 장편소설의 형태에서 모성의 내면과 외면을 동시적으로 깊이있게 조명한 작품이 있었던가. 만약 있다면 한 권 추천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모성의 성질을 일면적 조명이 아닌 다면적 조망으로 풀이했다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엄마라는 주제에서 우리의 사유를 보수화했던 "여성女性 = 모성母性 = 성모= 신성性"이라는 전통적 공식을 일거에 거부한 신경숙의 '마지막 한 방의 충격'은 과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또한 나는 신경숙 만큼 완벽한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물론 소설가마다 갖는 문체의 특징은 다양하다. 문체의 개성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섬세함으로 풀이되는 신경숙 문체는 완벽함 그 자체이다. 각각의 문장들이, 조사 하나하나의 쓰임새까지도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다. 소설의 각 단어와 문장이 갖는 함축적 속성과 비유적 울림이 곧 시詩라는 천재적 영역에 닿아 있다. 소설의 형태에서 시적 효과를 담아내는 발군의 문장력을 가진 작가다. 요컨대 신경숙은 소설로 시를 쓰는 소설가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한 말들은 좋아한다. 니체는 '피로써 쓴 글'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피로 쓰라'는 니체의 주문은 곧 성의를 다해 쓰라는 것이다. 항상 느끼지만 신경숙은 성의를 다해 문장을 완성하는 작가다. 소설에 대한, 텍스트에 대한 본질에서 신경숙은 자유롭다. 성의와 집중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아마 니체가 지금 살아있다면 신경숙의 소설을 탐독하지 않았을까.

  너무 잘 쓴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흐뭇하다. 한국 문학사를 다시 쓴 소설가 신경숙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싸인 양장본 소장을 위해 지갑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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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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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가 좋을 때가 있다. 본래 만화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기존의 책들에 지칠 때 간혹 읽는다. 만화의 장점은 간명한 메시지를 빠르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만화만의 맛깔난 매력은 만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갖는 교집합일 것이다. 내가 만화를 간혹 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화의 강점은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한 예로 무겁고 교육적인 소재를 청소년들에게 부드럽고 평이하게 전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을 때가 그렇다. 만화가 폭력이나 연애, 스포츠에 소재를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도 만화는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무거움과 만화와의 만남을 좋아한다. 그 만남의 연장에서 나는 간혹 만화와 만난다.

  창비에서 출간된 최규석의 만화 『100도씨』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격동적인 시기를 그렸다. 인터넷에서 네티즌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은 만화를 단행본으로 출간한 버전이다. 박종철 고문치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1987년 6월 항쟁의 숭고한 역사를 만화가 최규석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6월 항쟁의 시대성과 가치를 적절한 유머와 감동으로 담아내 녹록지 않은 재미를 선사한다. 

  주인공 영호는 운동권에 대해 자못 비판적인 소년이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운동권은 곧 빨갱이요, 데모는 곧 죄악이라는 철저한 사상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후 진실을 목도한다.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이 얼마나 호도된 거짓이었는지를. 잘못 알았던 거짓 사실에 대한 배신감은 한 사람을 더욱 극적인 대척점에 서게 한다. 그는 싸운다. 끓는다. 역동한다. 거짓된 역사의 현장 앞에서 그는 투쟁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영호는 그 시절을 관통해야만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원형이다. 정부와 언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았던가. 80년 광주를 폭도의 현장이라 했고 김대중을 빨갱이라 했다. 평화의댐을 건설해 북한의 물테러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어린이들의 저금통이 뜯겼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불순분자로 둔갑되었다. 적지 않은 대학생들이 갑작스럽게 입영통지서를 받고 입대했다. 그때 그 시절, 거짓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지판단능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영호는 그 시절 '나'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제목처럼 최규석의 『100도씨』는 뜨겁다. 한 청년의 깨달음을 통해 87년 6월의 현장을 만화의 형식에서 가볍지 않게 담아낸 점이 돋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겪었지만 점점 잊혀져 가는,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숭고한 역사의 현장을 『100도씨』는 생명력 있게 그리고 있다. 뒷부분의 부록 <그래서 어쩌자고?>는 15년 전의 당위와 가치가 현재 이 순간에도 살아 숨셔야 한다고 부언하기도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가볍지 않은 고찰들이 잘 조명된 수준있는 끝맺음이다. 

  청소년에게 이 만화가 교육교재로 사용된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만화라는 형식이기에 더욱 부드럽고 재미있게 읽힐 것으로 보인다. 자유라는 당위는 시대와 문화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쟁취해야 할 가장 우선적 선善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말할 수 있고 떳떳하게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자유가 있을 때 가능하다. 15년 전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쟁취할 수밖에 없었던 자유라는 고결한 가치를 우리는 후손들에게 훼손없이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최규석의 만화 『100도씨』가 그 숭고한 바톤터치의 도구로 작지만 힘있게 사용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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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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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386은 항상 경외의 대상이다. 그들이 제도권 밖에서 싸워 이룬 숭고한 의미와 가치들을 존경한다. 이젠 시대가 흘러 제도권 안에도 386은 많이 진출해 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수많은 386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신문과 방송을 도배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행적 대부분을 이해하며 경외한다. 그 이해와 경외의 전제에는 80년대로 대변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격동이 있다.

  80년 광주와 87년 서울에서 386이 이룬 성과는 과히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당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내게 그들은 한없이 큰 존재였다. 옳은 것을 향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그들의 용기와 양심은 젊은 시절의 나를 변화시켰다. 오 386이여. 찬란했던 선배들이여. 이 한 사람의 '포스트386'은 비범한 386 선배들의 역동을 기억하며 감상에 젖는다.

  그렇다. 내게 386은 그런 존재다. 동시에 '80년대 한국'은 항상 경외의 시대였다.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국민의 손에 가져온 시대였다. 그것이 형식에 국한된 것이라 할지라도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싸워온 386과 80년대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이승만 정권을 시작으로 1차원의 선으로 늘여뜨려 보자. 한 눈으로 보자는 얘기다. 지난하고 굴곡지지 않은가. 동족상잔의 비극, 군사 쿠테타, 독재 정권, 자유의 억압, 민중의 봉기 등 참으로 고생이 많은 역사였다. 서구에서 수백년 이상 겪으면서 달성했던 것들을 한국의 현대사는 불과 50년 안에 이루었다. 그만큼 아프다. 그리고 역동적이다. 그렇기에 경외스럽다.

  항상 뼈아픈 글을 쓰는 문단의 거목 현기영은 신작 『누란』을 통해 박정희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우리에게는 남산의 어느 지하실에서 반인간적인 고문이 자행되었던 바로 그때 그 시절이 있었다. 한 사람의 인권이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억압되고 파괴되었던 시절이다. 소수의 죽음은 곧 다수의 삶으로 치환되었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의 통제로 조절되었다. 인간의 기본을 유지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경제발전이라는 호도된 '선善'에 의해 희생되었던 바로 그 시절의 어두운 단면을 작가 현기영은 소설의 시작으로 삼는다.

  허무성은 386이다. 독재 권력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던 대학생 허무성의 삶은 항상 투쟁의 연속이다. 그의 행동이 특별한 건 아니다. 보다 인간답고 보다 상식적으로 살고자 소원했던 그 시대 젊은 열정의 원형이다. 어느날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의 지하실로 끌려간 그는 혹독한 고문의 대가를 치룬다. 고통스럽다. 견디기 힘들다. 고문자 김일강은 허무성을 고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뺑뺑이 돌린다. 반은 죽었을 정도의 고문의 클라이맥스에서 허무성은 동료들의 이름을 불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고문에 약하다. 인내는 한계가 있다. 고문은 너무 고통스럽다.

  허무성의 배신은 지독한 고문이라는 타자적 의지, 즉 국가의 힘에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힌다. 허무성은 외롭다. 하지만 국가의 일에 힘을 보탵 이유로 고문자 김일강은 허무성의 앞날을 책임지는 '은혜'를 행사한다. 김일강의 배려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다. 또한 귀국 후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학 교수가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허무성과 김일강의 동거는 소설의 시공간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관통하는 데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참 지난한 악연이다.

  이 소설은 허무성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현기영의 글에는 수사나 기교가 없다. 실제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묵묵히 서술할 뿐이다. 철저하게 건조한 문체로 일관한다. 또한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다. 절망과 실패라는 어두운 스케치로 허무성의 삶과 평행하는 한국의 현대사를 그리고 있다. 그렇기에 읽는이의 마음은 쓰라리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

  2002년 6월 10일 시청 앞 광장. 한국과 미국의 월드컵 16강전을 향한 예선 2차전이 열린 날이었다. 수십만의 군중이 광장을 점령했다. 현기영은 15년 전에도 수십만의 군중이 동일한 시공간을 점령했었다고 외침한다. 하지만 두 시공간에는 본질적인 괴리가 있다. 물론 진정성의 차이는 아니다. 둘 다 진정성은 있었다. 여기서 진정성은 비본질이 된다. 두 군중의 차이는 본질에서 상치된다. 내용과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축구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강렬한 쇼비니즘 젊은이들이 과연 15년 전 6월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작가 현기영의 무미건조한 질문은 우리 세대에게 거울을 들여다 볼 것을 주문한다.

  현기영이 소설의 제목으로 선택한 '누란([, Lou-lan)'의 의미를 사유하자. 오래전 중앙아시아 고비와 타클라마칸 두 사막 사이에 존재해 한때 크게 번창했던 누란 왕국은 황사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왜 소설가 현기영은 무겁고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를 직선적으로 조명하면서 잊혀진 왕국 '누란'을 소설 전면에 배치한 것일까. 그것은 현기영 자신이 절망과 실패의 기록이라고 고백한 뼈아픈 '과거'의 회상과 쓰라린 '현재'의 응시를 상징화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아픈 현재상에 대한 목도를 외롭고 심각하게 토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는 기억될 때 빛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하지만 그 정지됨 자체만으로도 현재를 일깨운다. 그리고 미래를 추동한다. 인류가 위대한 것은 역사성에 있다. 역사를 통해 인과관계를 학습하는 인간의 지성은 더 좋은 미래를 진취한다. 현기영은 '작가후기'에서 이 소설을 절망과 실패에 대한 기록이라고 고백한다. 절망과 희망, 실패와 성공은 결국 시간차의 문제다. 현기영이 소설의 말미에 그린 절망적 스케치는 어쩌면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희망의 기대로 치환될 수 있다는 내밀한 역설이 아닐까.

  소설의 형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소설처럼 쓰지 않은 현기영의 『누란』은 무겁고 건조하며 직선적이다. 사실이 가진 힘은 강력하다. 사실은 사실과 어울리는 방법으로써만이 그 힘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 사실이 픽션적 구성을 갖출 때 에너지의 양은 은밀하게 방전된다. 그렇기에 현기영은 그저 묵묵하게 직선적 서술을 고집했는지 모른다. 그 역사는 아팠기에, 위대했기에, 그리고 현재 또한 너무 아프고 쓰라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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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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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 시사회
최승환 지음 / 낮에뜨는달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없음. 안심하고 읽어도 되는 서평임. 

 

  학창시절 국어 과목에서 문학의 두 가지 기능에 대해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희적 기능과 교훈적 기능이 그것이다. 문학은 인간에게 유희를 또는 교훈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두가지 견해는 항상 공존해 왔다. 전자는 전통적인 문학의 가장 주요한 기능으로 인식되어온 것으로서 문학 본연의 심미성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독자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주안점을 둔다는 견해이다. 반면 후자는 문학은 독자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거나 인생의 진실을 제시함으로써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고 나아가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찾는 데 봉사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역사적으로 두 견해는 대립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문학의 통합적 기능을 지지한다. 유희 또는 교훈만을 강조할 때 문학적 가치는 하향화된다. 진정한 문학적 감동은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진리를 가르칠 때 발생한다. 호라티우스는 말했다. 시인의 소원은 가르치는 일, 또는 즐거움을 주는 일, 또는 둘을 합친 일이라는 것을. 문학의 양면적 효용성에 대한 지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문학을 좋아한다. 여기서 '재미'라 함은 철저한 내 주관적 기호에 기준한다. 내 재미가 타자의 그것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재미'는 '가벼움'과는 차이가 있다. 가볍다는 단어만큼 문학과 부조화스러운 것은 없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무거움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장중重하다. 본래 그렇다. 문학이 어찌 가벼울 수 있는가. 그것은 읽는이가 가볍게 느낄 뿐. 역시 나는 문학 예찬론자다.

  소설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다시 한 번 고백한다. 나는 재미있는 소설을 좋아한다. 또한 감동이 있는 소설을 좋아한다. 물론 재미와 감동을 두루 갖춘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기에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갖춘 소설을 만나면 흥분된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는다. 몰입도는 최상으로 올라간다. 거기다 문학적 깊이까지 갖춘 작품이라면 더더욱.

  최승환의 장편소설 『사십구재시사회』를 만났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작품이다. 출판사의 사정에 의해 갑작스레 절판된 이 소설은 몇 년이 지나 작가의 필명이 아닌 실명으로 다시 출간된다. "조심하세요, 거대한 감동이 당신의 심장과 충돌합니다"라는 자신감 있는 홍보문구를 표지 전면에 배치한 『사십구재시사회』는 두 남녀의 강렬하고도 감동적인 사랑의 서사를 담은 로맨스 소설이다.

  이 소설에 대해 나는 뛰어난 재미와 깊은 감동, 그리고 훌륭한 문학적 가치까지 갖춘 작품이라고 박수를 보내지 못한다. 한 소설을 평가할 때 '문학적'이라는 예찬은 함부로 붙이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평評은 객관과 주관을 동시에 견지해야 한다. 하지만 읽는 내내 나를 충분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흥미있는 소재와 탄탄한 구성, 잘 짜여진 서사와 속도감 있는 전개, 생각지 못한 반전과 깔끔한 마무리 등은 이 소설이 꽤 재미있고 감동적인 텍스트라는 점을 입증한다. 잘 다듬어진 재미있는 수작, 이 소설에 대한 내 반응의 가장 적확한 표현이리라.

  헬스장에서 우연으로 처음 만나 사랑을 이뤄가는 서준과 다은의 로맨스가 이야기의 본류다. 서로에게 한 눈에 반한 두 사람은 헬스장 계단 중간에 있는 둥그란 창문 앞 화분을 통해 쪽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서준과 다은의 사랑이 농밀해져감과 동시에 점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서준의 과거 비밀이 점점 증폭되면서 이야기 또한 새로운 양상으로 치닫는다. 작가가 만들어낸 흡입력 있는 서사는 지루함 없이 한달음에 이야기의 막장을 독자로부터 확인시키게 한다.

  이 소설이 남다른 감동을 선사한 데에는 뒷부분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강력한 반전에 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 구도의 전복은 충격과 당황을 넘어 감동코드에까지 닿아 있다. 이야기 전체를 뒤엎는 반전이 독자를 놀라게 하는 기계적인 역할 이상으로 감동의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소설 속 두 남녀의 애절한 로맨스는 반전이 있기 전과 후의 현격한 차이로 독자에게 수용된다. 만약 반전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진부한 로맨스 소설의 책더미에 또 한 권을 보태는 수준의 텍스트였을 것이다. 작가가 설정한 강력한 반전은 이 소설의 주제인 '사랑'의 테마를 더욱 농밀하게 집대성하는 핵심적 장치가 되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 소설의 제목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했다. '사십구재'라는 불교식 제사 용어와 '시사회'라는 단어 사이의 상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 어떤 함의를 갖는지 거듭 사유했다. 제목에 담긴 내밀한 의미는 결국 이야기의 종지부에서 실타래가 풀린다. 거대한 반전이 지나간 후 독자들은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올 수밖에 없었는지 소설의 제목 '사십구재 시사회'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작가후기에서 작가는 먼저 읽은 독자들에게 스포일러는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 대한 배려로 이해할 만하다. 동시에 이 소설이 극적 반전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 작가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영화 <식스센스>와 <올드보이>의 예를 보라. 전부 알고 보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옛 성현의 말을 기억하자. 모르는 게 약이다.

  작가는 아마 영화의 제작까지를 염두하고 소설을 집필했을지 모른다. 기존 로맨스 소설의 진부함과는 거리가 먼 독특한 소재, 밀도감 있는 전개, 빠른 서사, 극적 반전,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영상적 스케치 등은 이 소설이 영화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증한다. 이제 소설이 소설 자체만으로 읽히는 시대는 지났다. 소설이 굳이 순문학 안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세계는 넓고 서사는 많다. 재미있는 소설의 '외도'에 뭐라고 할 만큼 한국 독자들의 마음은 그리 좁지 않다. 

  다시 서평의 서두로 돌아가자.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설이 좋은 소설이다, 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소설 『사십구재 시사회』는 좋은 소설이다. 시간가는줄 모르게 읽히는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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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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