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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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386은 항상 경외의 대상이다. 그들이 제도권 밖에서 싸워 이룬 숭고한 의미와 가치들을 존경한다. 이젠 시대가 흘러 제도권 안에도 386은 많이 진출해 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수많은 386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신문과 방송을 도배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행적 대부분을 이해하며 경외한다. 그 이해와 경외의 전제에는 80년대로 대변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격동이 있다.

  80년 광주와 87년 서울에서 386이 이룬 성과는 과히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당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내게 그들은 한없이 큰 존재였다. 옳은 것을 향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그들의 용기와 양심은 젊은 시절의 나를 변화시켰다. 오 386이여. 찬란했던 선배들이여. 이 한 사람의 '포스트386'은 비범한 386 선배들의 역동을 기억하며 감상에 젖는다.

  그렇다. 내게 386은 그런 존재다. 동시에 '80년대 한국'은 항상 경외의 시대였다.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국민의 손에 가져온 시대였다. 그것이 형식에 국한된 것이라 할지라도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싸워온 386과 80년대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이승만 정권을 시작으로 1차원의 선으로 늘여뜨려 보자. 한 눈으로 보자는 얘기다. 지난하고 굴곡지지 않은가. 동족상잔의 비극, 군사 쿠테타, 독재 정권, 자유의 억압, 민중의 봉기 등 참으로 고생이 많은 역사였다. 서구에서 수백년 이상 겪으면서 달성했던 것들을 한국의 현대사는 불과 50년 안에 이루었다. 그만큼 아프다. 그리고 역동적이다. 그렇기에 경외스럽다.

  항상 뼈아픈 글을 쓰는 문단의 거목 현기영은 신작 『누란』을 통해 박정희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우리에게는 남산의 어느 지하실에서 반인간적인 고문이 자행되었던 바로 그때 그 시절이 있었다. 한 사람의 인권이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억압되고 파괴되었던 시절이다. 소수의 죽음은 곧 다수의 삶으로 치환되었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의 통제로 조절되었다. 인간의 기본을 유지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경제발전이라는 호도된 '선善'에 의해 희생되었던 바로 그 시절의 어두운 단면을 작가 현기영은 소설의 시작으로 삼는다.

  허무성은 386이다. 독재 권력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던 대학생 허무성의 삶은 항상 투쟁의 연속이다. 그의 행동이 특별한 건 아니다. 보다 인간답고 보다 상식적으로 살고자 소원했던 그 시대 젊은 열정의 원형이다. 어느날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의 지하실로 끌려간 그는 혹독한 고문의 대가를 치룬다. 고통스럽다. 견디기 힘들다. 고문자 김일강은 허무성을 고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뺑뺑이 돌린다. 반은 죽었을 정도의 고문의 클라이맥스에서 허무성은 동료들의 이름을 불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고문에 약하다. 인내는 한계가 있다. 고문은 너무 고통스럽다.

  허무성의 배신은 지독한 고문이라는 타자적 의지, 즉 국가의 힘에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힌다. 허무성은 외롭다. 하지만 국가의 일에 힘을 보탵 이유로 고문자 김일강은 허무성의 앞날을 책임지는 '은혜'를 행사한다. 김일강의 배려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다. 또한 귀국 후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학 교수가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허무성과 김일강의 동거는 소설의 시공간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관통하는 데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참 지난한 악연이다.

  이 소설은 허무성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현기영의 글에는 수사나 기교가 없다. 실제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묵묵히 서술할 뿐이다. 철저하게 건조한 문체로 일관한다. 또한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다. 절망과 실패라는 어두운 스케치로 허무성의 삶과 평행하는 한국의 현대사를 그리고 있다. 그렇기에 읽는이의 마음은 쓰라리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

  2002년 6월 10일 시청 앞 광장. 한국과 미국의 월드컵 16강전을 향한 예선 2차전이 열린 날이었다. 수십만의 군중이 광장을 점령했다. 현기영은 15년 전에도 수십만의 군중이 동일한 시공간을 점령했었다고 외침한다. 하지만 두 시공간에는 본질적인 괴리가 있다. 물론 진정성의 차이는 아니다. 둘 다 진정성은 있었다. 여기서 진정성은 비본질이 된다. 두 군중의 차이는 본질에서 상치된다. 내용과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축구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강렬한 쇼비니즘 젊은이들이 과연 15년 전 6월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작가 현기영의 무미건조한 질문은 우리 세대에게 거울을 들여다 볼 것을 주문한다.

  현기영이 소설의 제목으로 선택한 '누란([, Lou-lan)'의 의미를 사유하자. 오래전 중앙아시아 고비와 타클라마칸 두 사막 사이에 존재해 한때 크게 번창했던 누란 왕국은 황사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왜 소설가 현기영은 무겁고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를 직선적으로 조명하면서 잊혀진 왕국 '누란'을 소설 전면에 배치한 것일까. 그것은 현기영 자신이 절망과 실패의 기록이라고 고백한 뼈아픈 '과거'의 회상과 쓰라린 '현재'의 응시를 상징화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아픈 현재상에 대한 목도를 외롭고 심각하게 토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는 기억될 때 빛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하지만 그 정지됨 자체만으로도 현재를 일깨운다. 그리고 미래를 추동한다. 인류가 위대한 것은 역사성에 있다. 역사를 통해 인과관계를 학습하는 인간의 지성은 더 좋은 미래를 진취한다. 현기영은 '작가후기'에서 이 소설을 절망과 실패에 대한 기록이라고 고백한다. 절망과 희망, 실패와 성공은 결국 시간차의 문제다. 현기영이 소설의 말미에 그린 절망적 스케치는 어쩌면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희망의 기대로 치환될 수 있다는 내밀한 역설이 아닐까.

  소설의 형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소설처럼 쓰지 않은 현기영의 『누란』은 무겁고 건조하며 직선적이다. 사실이 가진 힘은 강력하다. 사실은 사실과 어울리는 방법으로써만이 그 힘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 사실이 픽션적 구성을 갖출 때 에너지의 양은 은밀하게 방전된다. 그렇기에 현기영은 그저 묵묵하게 직선적 서술을 고집했는지 모른다. 그 역사는 아팠기에, 위대했기에, 그리고 현재 또한 너무 아프고 쓰라리기에.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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