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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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류 문학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소설가로 톨스토이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적어도 '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서 톨스토이의 포스를 넘어서는 이는 없을 듯하다. 물론 동시대의 천재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주 비견되곤 한다. 하지만 두 인물의 삶과 철학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석은 별도의 논설이 필요하다. 톨스토이가 그려내는 건강한 세계와 아름다운 사랑론, 인간의 섬세한 묘사와 신을 향한 진지한 성찰은 그의 문학적 깊이와 밀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세계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그는 바로 톨스토이다.

  레프 톨스토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세 편의 텍스트가 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은 톨스토이 문학을 관통하기 위한 필독서다. 세 작품 모두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독자를 압도시키는데 각기 고유의 작품성으로 서로 독립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톨스토이 인생의 총체적 관점에서 조망하면 어떤 특별한 힘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 초기작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로 꼽힌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인생의 전환점에서 쓴 가장 예술적인 소설로서 <전쟁과 평화>와 함께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한 장편소설로 우뚝 서 있다. 인생의 노년기에 쓴 <부활>은 문학성과 예술성에서 앞선 두 작품에 비해 힘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신에 대한 톨스토이의 진지한 천착이 엿보이는 수작이다. 세 장편을 읽지 않고 톨스토이를 논한다는 것은 '거짓' 혹은 '교만'이다.


  생각이 다듬어지지 않았던 이십대 때 나는 톨스토이의 세 편의 명작을 힘들게 읽어냈었다. 역자가 누구이고 출판사가 어디이며 완역본인지 여부도 몰랐던 때였다. 심히 힘들고 고통스럽게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1,000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과 빈번하게 출몰하는 톨스토이의 장광설(?)에 내 전두엽은 혹사되었고 작품이 지닌 본래성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월은 흘렀다. 톨스토이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내 안에서 역동했다. 이에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진중하게 읽어보고자 했다. 문장 하나 쉼표 하나까지 톨스토이의 숨결을 느껴보길 원했다. 그래서 다시 손에 잡은 것이 톨스토이의 불멸의 저서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사상과 예술이 집대성된 걸작으로서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형태의 보편들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 나는 여태까지 읽었던 문학작품 중 이 소설을 가장 완벽한 텍스트라고 주장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한치의 흠도없는 완전무결한 작품, 이라고 평가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분명 '완벽한' 작품이다.

  <안나 카레니나>가 완벽한 장편소설이라는 데에는 소설을 이루는 여러요소들이 하나같이 모두 완벽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대담한 주제, 등장인물의 생명력, 인간과 배경 사이의 균형 잡힌 입체성, 담담하지만 세밀한 묘사, 당대를 훑고 있는 역사성, 문장·문단의 유려함, 작품 자체의 문학성과 예술성 등.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신적인 안정감으로 갖춘 흠결없는 작품이다. 소설가로서의 웅대하고 탁월한 기본기. 그것이 톨스토이 문학의 주춧돌이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중심인물이 이야기를 추동한다. 주인공인 안나와 그녀의 정부 브론스키가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다른 한 편에서는 톨스토이의 모습이 투영된 레빈과 그의 아내 키티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네 인물들이 각기 두 명씩 독립적인 서사를 펼치는 듯 보이지만 각자는 관심과 애증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외연적으로는 안나가 가정을 버리고 브론스키와 바람을 피운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지만 내포적으로는 당시 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한 톨스토이식 관찰과 항변이라 할 수 있다. 즉 톨스토이는 가정소설이라는 형태 속에서 당시 러시아가 고민했던 여러 부분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담음으로써 엄연한 사회소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하기에 다루지 않기로 하자. 나는 이번 서평에서 작품의 주제와 톨스토이 소설의 특징, 그리고 등장인물의 매력만을 다루고자 한다. 사실 등장인물의 분석만으로도 서평의 분량을 채우고도 남는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창조한 인물들은 모두 완전하게 살아있다. 대부분의 소설은 현실성 없는 인물이 등장하고 플롯에 맞추어 인물을 유형화시킨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인물이 플롯에 맞춰져가는 게 아니라 플롯이 인물을 뒤따라간다. 완전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기실 '생명력'은 톨스토이 소설의 명징한 특징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플롯에 따라 사건의 전개를 알 수 있는데 톨스토이 소설은 예상이 많이 빗나간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과 현실 속 인물의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소설을 읽는다. 톨스토이 소설은 인물의 성격이 완전히 살기 때문에 소설은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린다. 실제라면 그렇게 진행되겠구나, 가 아니라 완전히 현실적이다. 그런데 그 현실적인 성격을 아주 탄탄하게 전개시키면서 작가 자신이 의도한 결말 쪽으로 몰아간다. 요컨대 톨스토이 소설의 매력은 너무나 현실적인 인물성격을 가지고 너무나 완벽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평론가들은 한결같이 톨스토이를 리얼리즘의 거장이라고 치켜세운다. 그것은 생명력과 동류성을 띠는 톨스토이의 또 다른 마력에 기인하는데 그가 우리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간심리를 끄집어내서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주인공 안나를 살펴보자. 안나는 세계 문학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는 최고의 매혹적인 여성을 창조했다. 안나는 남편과 아들을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삶을 산 여성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녀가 뿜어내는 여성성만큼은 가히 고혹적이다. 그 매력은 카레닌(안나의 남편)과 브론스키를 넘어, 시대와 지역을 넘어, 문화와 인종을 넘어, 현재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독자의 심장에까지 도달하여 빛을 발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브론스키가 안나를 보고 한 눈에 반했던 바로 그 '무도회'와 그때 안나가 입었던 '검은색 드레스'를 생동감 있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안나보다 키티의 매력에 더 매혹되었다. 사실 안나는 책임감 없는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불륜의 늪에 빠져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종국엔 그마저도 지켜내지 못하고 자살로써 삶을 마감한다. 대책없는 무책임성의 극치다. 반면 소설의 초반부터 종결까지 레빈의 사랑을 독차지한 키티는 비록 자신이 처음 사랑했던 남자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뜨겁게 사랑한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성공적으로 이룬 행복한 여성의 전범이 된다.

  가정의 행복은 절대로 대가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논함에 있어 '희생'이 근본 사랑의 본체가 된다는 점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가정의 성공은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사랑의 완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희생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의 전제조건이 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대로 불행하다, 는 소설의 첫 문장은 가정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지를 역설하는 명문장이다.

  부부로서 많은 것이 다르고 부딪혔지만 결국 레빈의 사랑을 사로잡아 행복한 가정의 원형을 건설한 키티의 매력이야말로 '미모'와 '열정'의 일차원적인 매력보다 우위에 있는 '지혜'와 '연합'이라는 여성성 최고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레빈의 형 니콜라이의 임종 전에 찾아간 병문안에서의 키티의 행동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이다.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듯하지만 행위의 목적과 결과는 결국 남편 레빈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키티의 현명함이 있다. 실로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톨스토이는 의도적으로 안나의 매력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하다. 안나의 활력을 지나치게 흘러넘치도록 그려냈다. 그것이 내게는 불편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매력을 발산하는 키티의 아름다움이 내게는 보다 편안하게 와 닿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빈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톨스토이 자신의 소설 속 투영이다. 톨스토이는 전지적작가시점의 완벽한 실현을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레빈이 갖는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독자에게 일직선으로 전달한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 속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것들이 들어가 있다. 그 시대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예술, 건축, 음악, 공연 등 거의 모든 영역을 두루 다루고 있는데 이에 대한 톨스토이의 견해와 입장은 철저히 레빈의 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어쩌면 <안나 카레니나>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뛰어넘는 종합예술작품으로서의 위대한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레빈이라는 인물의 존재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안나보다 레빈에 가깝다.

  사실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레빈으로 시작해 레빈으로 끝이 난다. 특히 소설의 종결은 안나의 죽음 이후에도 꽤 많이 흘러가는데 그 분량은 철저히 레빈의 독백이 점철하고 있다. 형 니콜라이의 죽음과 아내 키티의 출산과정을 목도하면서 레빈은 삶과 죽음에 대해 전회轉回에 가까운 충격적 깨달음에 휩싸인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 삶에서의 선善의 이해, 행복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 삶의 우선순위로서의 신앙 등을 깊이있게 사유하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느끼고 기대하는 레빈의 변화는 소설의 말미를 매우 웅숭깊게 독점한다.

  레빈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주제로 연결된다. 나는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삶이란 무엇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갈무리했다. 톨스토이는 지속적으로 귀족사회에 대해 농도 높은 조소를 던지고 있는데 이는 레빈을 통해 드러냈던 농촌사회에 대한 애착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사교계 모임을 통해 서로 만나고 교감하는 귀족들의 모습은 돈과 명성에만 매달렸던 당시 러시아 귀족의 겉치레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 외에도 톨스토이는 당시 상류층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 사랑과 결혼, 정치와 예술, 더 나아가 습관과 음식까지 비웃는다. 외적인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에 침잠하여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함을 넌지시 교훈한다. 요컨대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가'는 결국 삶에 대한 인간의 책임있는 태도를 유도한다. 초기작 <전쟁과 평화>는 끊임없이 '삶'을 말했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는 니콜라이의 죽음에 번민하는 레빈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수 있듯이 '죽음'에 대한 자못 진지한 고뇌를 드러낸다. 전작과의 이러한 차이점을 발견하는 일은 톨스토이 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대목이 톨스토이가 소설가에서 성자로 변화하는 동기점이자 그의 만년작 <부활>과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인생관은 명징하다. 인간은 죽음을 통제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초월적이고 신성한 존재를 통해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진다는 사상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한 것이며 본질에 벗어난 모든 요소들을 버림으로써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톨스토이의 역설은 깊이있게 천착할 만하다.

  톨스토이가 제기한 삶과 죽음의 동일성에는 사랑과의 동류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즉 삶과 죽음과 사랑은 매한가지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랑 예찬론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말년이 되면 될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실패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둘은 분명 사랑했지만 결국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랑의 '도입'에는 성공했지만 사랑의 '완성'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비극적이었다. 사랑은 본래적으로 시공간성의 무의미함을 담보한다. 부재하지는 않지만 분명 무의미하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사랑의 본질은 변질되지 않으며 시작점에서 발현된 에너지는 몇 개의 우주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질량에는 변화가 없다. 불변성과 고유성이야말로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는 가장 긴요한 원리인 것이다.

  사랑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엄연한 하루하루를 살아감에 있어 사랑타령만 주구장창 늘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도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과 사람을 만난다. 삶의 복잡다단한 관계망 가운데 울고 웃고를 반복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할 것이다. 삶과 행복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사고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선善하게 산다면 그것이 가능할까. 만약 그렇다면 선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무엇이며 인간은 그것을 판가름할 수 있을까. 삶에 대한 다양한 물음들이 소설의 막장을 확인함과 동시에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결국 톨스토이는 삶과 선의 함수성과 그것에 대한 농밀한 이해를 통해 진정으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들춰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만큼이나 생명력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이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나에게 더욱 느린 속도를 요구했다. 톨스토이가 글을 어렵게 쓰는 작가가 아님에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정독하다시피 했다.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박형규 교수의 깔끔하고 유려한 번역이 가독의 집중력을 배가시켰다. 중간에 다른 책을 읽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지만, 장장 한 달에 걸친 <안나 카레니나>의 여정은 내 안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느꼈다. 생명력에도 '수준'과 '밀도'가 있다는 것을. 대범한 주제의 생동감과 흘러넘쳤던 안나의 활력, 발군의 은유와 묘사로 대변되는 톨스토이 문장의 맛깔남과 길지만 격렬했던 호흡은 걸작 <안나 카레니나>가 나에게 선사한 찬탄스러운 생명력의 본질이었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가졌던 신적인 생명력은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100년의 시간차를 넘어 나에게까지 흘러넘쳤던 것이다. 고백컨대, 난 지금 톨스토이로 인하여 무한한 생명력 가운데 놓여 있다. 미치도록 뜨겁고 강렬한. 아. 톨스토이여.

  세계적인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천재를 가늠할 잣대를 제시한다. 먼저 "창조적 자아를 위한 자유와 정신적 의식의 확장을 위한 자유"를 얼마나 성취했나 따져야 한다. 이 기준을 통과한 작가들에게 재차 서열을 매기는 또 다른 지표가 있다. 생명력이다. 블룸은 최고의 천재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가르는 지점을 단호하게 설명한다. 단테는 <신곡>을 넘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로 건너오지는 못하는 반면 셰익스피어는 문학을 삶에 적용한, 즉 문학을 통해 인식의 수준을 높이려 한 최고의 사례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며 찬탄해 마지 않는다. 하지만, 블룸의 말은 틀렸다. 셰익스피어와 우리 사이에는 바로 톨스토이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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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바보 - 대양 육대주에서 만난 사랑하는 영혼들과의 대화
오소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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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가 의미있는 공간인 것은 바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자연의 규모와 화려한 동식물의 향연도 한 사람의 존엄을 압도하지는 못한다. 과학과 종교는 한 목소리로 일갈한다. 인간 이외의 만물은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물질을 발견하고 다스리는 인간 정신의 고차원성은 이 세계가 곧 인간의 시공간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입증한다. 지구의 존재 이유. 그것은 바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를 지닌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치있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은 어디에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바로 '사랑'이다. 인간이 지구를 의미있는 공간으로 존재케 한다면 인간이 발현해내는 사랑이라는 초월적인 자기력은 지구를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있는 차원의 선상 위에 올려놓는다. 여기서 신의 존재는 명징해진다. 인간은 신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저차원적 현현顯現이었고 사랑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아가고자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인류사는 결국 사랑사다. 크고 작은 인간사의 굴곡은 사랑에 대한 각각의 이해와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서 창조 또는 진화된 존재다. 인간은 사랑한 만큼 행복했고 사랑하지 않은 만큼 불행했다. 사랑했기 때문에 선善을 완성했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惡에 함몰되었다. 사랑이 가득 찬 사람은 두려움을 망각했고 그 망각 가운데 시간을 가장 빨리 흘러가게 했다. 그렇다. 사랑은 아름답고 위대하며 궁극적인 힘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사랑은 이론화나 구조화가 불가능한 초자연적 에너지다. 만물의 영장이자 강력한 이성理性을 지닌 인간조차도 사랑이 가진 거대한 포스의 원리를 오롯하게 이해하고 사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인간이 사랑에 실패한다. 어쩌면 이것은 신의 장난질일 것이다. 신은 절대고차원에서 생성·사용되는 힘을 인간의 시공간, 즉 한낱 3차원의 세계 속으로 유입시켰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모습 속에서 당신의 형상을 찾고자 했다. 신의 장난은 인간을 둥개게 한다. 한없이 낮아지게 하고 결국, '바보'가 되게 한다. 요컨대 인간은 사랑 앞에서 모두 바보가 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에세이 작가 오소희는 신간 『사랑바보』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만난 인연들에게서 발견한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소개한다. 이 책은 국적과 지역, 언어와 문화가 다르더라도 결국 인간은 사랑 안에서 동일해진다는 진리를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들려준다.

  작자가 소개한 사랑의 카테고리는 가히 폭넓다. '자기애'로 시작하여 '타자애'와 '모성애'를 넘어 '동성애'와 '노년애'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양한 사랑의 색상을 발굴하고 음미한다. 작가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경험했던 사랑에 빠진 다양한 영혼들과의 대화는 각각이 소중한 의미를 지님으로써 독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저 바라만 봐도 심금을 울리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직접 개입하여 사랑학개론을 나눠야만 하는 영혼도 있다. 사랑에 빠진 세계 각지의 많은 영혼들과의 교감을 통해 저자는 과거로 돌아가고 현재를 응시하며 미래를 상정한다. 이러한 시점의 이동은 작가와 독자 모두를 사랑이라는 웅대한 신적 발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게 한다. 겸손치 못한 자. 사랑할 수 없다.

  작가 특유의 감성적인 문체는 여전히 돋보인다. 총 다섯 편의 에세이를 써오면서 작가는 어느덧 시인이 다 되었다. 사랑을 테마로 한 책인 만큼 문장 곳곳에 작가의 감정선이 생명력 있게 꿈틀거린다. 간혹 눈에 띄는 비유와 묘사를 음미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시인' 오소희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된다. 시는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다. 세계의 수없이 많은 글쟁이들이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던가. 작가에게 기대한다. 언젠가 시를 써볼 것을. 갑자기 『욕망이 춤추는 곳 라오스』에서의 짧디 짧은 응축된 문장이 뇌리를 스친다.

  전작과의 차별성 또한 눈에 띈다. 이전 네 권의 에세이에서 작가는 아들 중빈을 통해 세계를 관찰했다. 세계에 대한 천착은 들여다보는 렌즈의 성격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선사한다. 작가와 아들 중빈은 세계를 쳐다보는 기준과 태도에 있어 많은 부분이 상치했다. 다른 간극의 차이만큼 이해가 필요했다. 작가가 세계를 여행하며 포착했던 다양한 글감들은 아들의 '순수'와 '열림'에 의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어린아이의 유치함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고 때로는 진공에 가까운 순진함에 넋을 잃고 경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에세이만큼은 다르다. 아들은 엑스트라로 물러나 있다. 아들을 향한 작가의 초점과 세계에 대한 아들의 시각은 최대한 탈피되어 있다. 작가가 1인칭의 주인공이 되어 사랑하는 영혼들과의 접속을 시도한다. 시점의 고저와 방향을 철저히 작가 자신만의 것으로 자유화한 문체의 변화가 보기 좋다.

  책의 막장을 덮으며 난 생각했다. 작가가 들려준 아홉 가지 형태의 사랑 외에도 한 가지의 사랑이 더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작가와 독자 사이의 사랑이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독자도 작가를 사랑한다. 작가에 대한 독자의 사랑은 은근히 집요하다. 돌아보건대 난 작가 오소희를 사랑했다. 그의 '자유'는 언제나 나의 '진지함'과 친구가 되었다. 사석에서 수차례 만났던 그는 항상 나에게 자유의 에너지를 발현했고 그것을 통해 나는 삶과 사랑이 결국 동의어라는 깨달음에 고개를 숙이곤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자유로운 만큼 나는 더욱 진지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어느덧 작가 오소희는 내 삶에서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사랑은 참 어려운 것이다. 사랑 특유의 고통의 난해성은 인간을 바보로 만든다. 사랑은 규정될 수 없다. 다만 끊임없이 발현되고 진행될 뿐이다. 사랑에는 수식어구가 필요없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이 세계가 물질만능주의에 찌들어 모든 정신적 가치의 굴곡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사랑의 본질만 훼손되지 않는다면 위험하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진본에 근접하게 된다. 유일하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면 바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바보가 되어도 좋다. 사랑할 수만 있다면.

  사랑 예찬론자 오소희의 신간 『사랑바보』를 이 땅의 수많은 '사랑 바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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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것 - 고병권 선생님의 철학 이야기 너머학교 열린교실 1
고병권 지음, 정문주.정지혜 그림 / 너머학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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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어가면 많은 것들이 변한다. 그중 하나가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와 생각은 양적인 면에서 비례하는 것 같다. 생각이 많을수록 삶은 고달프다. 인생은 깊고 풍성한 생각의 바다에서 펼쳐지는 시간의 흐름이다. 인간이 다른 종과 구별되는 '생각'이라는 우월성이 어떨 때는 인간을 옥죄고 번민하게 만든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 아. 데카르트여. 인간은 정말 그런 존재란 말입니까.

  생각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좋은 생각은 많이 할수록 좋고 좋지 못한 생각은 버릴수록 좋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건강하고 건설적인 생각은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동력이 된다. 반면 잡념과 사념은 인간의 마음을 불안하고 두렵게 한다. 생각 버리는 연습을 통해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일본 모스님의 수필집이 국내 베스트셀러 1위까지 오른 현상은 생각하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하는 한국 독자들의 관심이 그대로 반영된 것일 게다. 

  '너머학교'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생각에 대한 책이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저작발굴 및 출판지원사업' 교양부문 당선작이기도 한 이 책은, 철학자 고병권이 청소년을 위해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쓴 쉽고 새로운 철학책이다. 고병권은 이 책을 통해 인류사를 위대하게 장식했던 다양한 철학자들과 사상을 소개함과 동시에 인간 삶의 본질과 행복하게 살기 위한 다양한 조건을 알려준다.

  먼저 저자는 철학의 긴요성에 대해 매우 명쾌하게 정리한다.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삶을 잘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여기서 '잘'이라는 부사는 경제적이고 명예적인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보다 근원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바로 철학의 힘이 있다. 영어 공부와 수학 공부와는 다른 것이다. 삶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쓰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 그것이 바로 철학의 정의이자 이 책이 알려주고자 하는 '생각한다는 것'의 목적이기도 하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저자는 총 여덟 파트로 철학의 세계를 안내한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함께 관련 철학자가 각 파트마다 연이어 소개된다. 디오게네스부터 니체에 이르기까지 고결한 사상을 만들어냈던 위대한 지성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독자의 앎은 배부르다. 또한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현실의 이슈 한 가지씩을 제기하여 관념이 아닌 실재의 세계에서 생각해야 함을 일깨운다.

  저자가 제기한 '북한 핵 개발', '이라크 전쟁', ' 이주노동자 문제' 등은 비단 기성세대만 고민해야 할 부분은 아니다. 사회는 변하고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 또한 변화한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변한다 하더라도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다. 예컨대 '자유'와 '평등', '인권'과 '관용'은 문화와 시대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인간의 고유한 가치들이다. 청소년 때부터 이에 대한 숭고한 신념을 갖는다는 건 매우 필요하다. 지금의 아이들이 훗날 이 나라를 책임질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기성세대로서 우리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다음 세대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줘야 하는 책임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가 그 다음 세대에게 더 좋은 세계를 물려줄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도 응당 우리 기성세대의 몫이다. 이러한 건강한 물려줌의 선순환 속에서 우리사회는 보다 희망이 있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위 '생각'의 방향과 필요를 제시한 『생각한다는 것』은 참 좋은 책이다. 

  삶의 변성기를 겪어내는 이 땅의 십대들에게 건강한 사고와 행복한 삶의 필요성을 주문하는 저자와 철판사의 수고가 멋지다. 다만 책의 두께와 읽을 대상을 고려할 때 책값이 다소 비싼 점은 아쉽다. 동기와 노력이 좋은 만큼 책가격도 합리적으로 책정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정리하자.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철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되 대상을 명확히 하여 간단한 구성과 수월한 내용으로 쉽게 풀어낸 책이다. 청소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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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오랜만에 '톨스토이'를 읽고 있다. 요즘 내 책읽기는 늪에 빠져 있다. 최근 책을 읽을 때의 내 정신적 에너지는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책에 대한 의지박약 및 열정감소 현상은 읽을 만한 책이 없다고 판단해버리는 내 자신의 추악한 교만에서 발생된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항상 그러했듯이, 이 권태를 이겨내는 매우 적확한 처방법을.

  책으로 마음에 감동을 얻지 못할 때, 읽을 만한 책이 부재하다고 느낄 때, 책읽기의 권태가 주는 고독에 번민할 때, 바로 그때 내게 긴
요한 것은 '고전'이었다. 고전은 독자를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전은 독자에게 최소한의 어렴성을 넌지시 주문한다. 태동 이후의 인류사를 매혹시켜왔던 그 장엄한 '입증'이 한낱 머리카락 하나보다도 못한 내 교만한 기호嗜好를 압도해버는 것이다. 이미 검증되어진 위대한 텍스트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깊이있게 천착해나가다보면 책읽기의 첫사랑이 어느새 회복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러시아'다. 대학시절에 흠취했었던 '러시아문학'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를 끄집어냈다. 푸쉬킨은 나와 거리가 있었고 투르게네프는 다소 약했다. 단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톨스토이를 집었다. 집요하고 병적으로 인간의 심연만 파고드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인간(내부)과 세계(외부)에 균형을 맞추는 그림을 건강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톨스토이가 지금의 내게 더 필요했던 것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소설가 톨스토이의 숨결을 느끼며 어제도 오늘도 <안나 카레니나>의 매력에 잠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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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왕(王)'은 무엇인가. 사전은 왕의 의미를 "군주 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풀이한다. 왕에게 대항할 자는 없다. '백수의 왕' 사자에게 덤벼들 동물이 없듯이 왕의 권위는 강력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의 정치제도 안에서도 왕의 권한은 무한대다. 입법 사법 행정을 한 손에 주무를 수 있는 초월적 권력자인 것이다. 그렇다. 왕이란 존재는 심히 매혹적이다.

  왕의 매력은 인간의 내면적 속성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강한 집념이 왕을 선망케 했고 결국 만들어냈다. "짐은 곧 국가"라고 외쳤던 프랑스 절대왕정의 어느 군주처럼 왕은 인간성을 넘어선 신의 위치에 서길 원하는 인간의 교만이 아이콘화되어 있다. 인간의 끊임없는 권력 추구의 속성이 만들어낸 산물이기에 왕이라는 존재는 '두려움'과 '의심'을 기본적으로 함의한다. 인간이 왕을 만들어냈고 왕이 된 인간은 인간 이상의 초월성을 끊임없이 누리려 했다. 그러다 결국 파멸되기도 했다. 파멸된 왕은 다시 인간이 됐으며 그 파멸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왕이 가진 힘은 충분히 매혹적인 것이었지만 그 매혹만큼이나 위험했다. 그랬기에 인류사 이래로 대부분의 왕은 결국 '파멸'을 맞이했다.

  우리 시대가 낳은 최고의 입담꾼 성석제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을 통해 힘과 권력에 집착된 인간의 본성을 깊이있게 탐구한다. 15년 만의 개정판으로 독자를 찾은 소설가 성석제의 거침없는 서사는 왕의 매력만큼이나 매혹적이다. 도시를 벗어난 한 지역사회 건달들이 뿜어내는 거칠고 굵직한 이야기가 성석제 특유의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독자의 가독력을 속도화한다. 

  소설가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왕을 찾는 이야기다. 그 '찾음'의 일차적인 의미는 주인공 장원두가 어린 시절에 영웅으로 추앙했던 동네 건달두목 마사오를 향한 경외와 그리움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보다 입체적으로 소설을 조망해보면 등장인물 대부분의, 어쩌면 모든 인간의 내면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왕을 향한 욕망의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힘과 권력을 갈구하는 인간의 태초적인 속성과 그것의 사회적 인과성, 그리고 권력의 비영속성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소설을 읽는 내내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성석제표 입담에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 장원두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그토록 경외했던 고향의 건달두목 마사오의 부고를 접한다. 개인적인 상처로 고향을 떠났던 원두는 마사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는다. 장례식에서 그는 마사오와의 추억과 자신의 친구였던 몇몇 건달들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도 넘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마사오의 빈 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우고 또 다른 사람이 다음을 채우는 권력의 지속성에 원두는 놀란다. 그는 깨닫는다. 왕으로 대변되는 힘과 권력의 양태는 그 주체만 바뀔 뿐 계속적으로 순환되고야 마는 것을.

  인간은 힘을 갖고 있는 상태를 유지할 때만 온전한 왕이 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유신조, 마사오, 조창용, 박재천으로 이어지는 왕권 교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는 원두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원두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세희도 이 남자 저 남자를 거쳐 결국은 최후의 왕 재천의 여자가 된다. 권력의 가장 강력한 속성은 소유욕을 장악하는 데 있다. 돈과 인간뿐만 아니라 사랑까지도 소유하고야 마는 강력한 힘이 인간의 권력 속에는 존재한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사랑의 발걸음을 내디뎠던 세희를 향한 원두의 성실함은 왕이 될 가장 능동적인 '세자'였던 친구 재천의 권력성 앞에서 처절하게 짓밟히고 만다. 그렇다. 왕은 힘이 세다. 그리고 매혹적이다. 사랑의 진실과 성실을 뒤엎고 호도시킬 만큼.

  소설은 마사오 이후 권력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한 지역 건달들의 야욕과 패권싸움을 적나라게 그려나간다. 조폭세계에 대한 스케치는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가 수없이 그려왔던 레퍼토리이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신뢰성을 상실한 건달세계의 모습은 인간이 지향해야만 하는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들과는 철저히 대척점에 서 있다. 성석제는 태생적으로 권력욕에 지배당한 인간세계의 한계를 가장 낮은 바닥의 이야기를 통해 묵묵히 그려내고자 했을 것이다. 거짓과 파괴, 간교와 악의가 득실대는 깡패세계의 모습이야말로 왕의 영광과 파멸의 대극(對極)을 가장 역동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강점은 성석제 특유의 문체에 있다. 선굵은 지역 건달들의 이야기가 건조하지 않게 한 숨에 읽히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역량 덕분이다. 가독력이 가히 발군이다. 독자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성석제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작가는 주인공 장원두를 통해 자유자재로 시점을 이동시키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유머, 재치, 익살, 해학으로 점철된 개성있는 문체는 가벼우면서도 서사의 권위를 흠집내지 않고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는 힘이 있다. 쉽게 읽히지만 흡입력 있는 서사는 흐트러지지 않은 채 소설의 말미까지 안전하게 당도한다. 쉼없이 이야기에 몰두한 독자의 집중력은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에는 무언가의 깊은 여운을 확인하는 에너지로 자연스럽게 대체된다. 성석제의 힘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사회는 그곳 건달들이 힘의 논리로 겨루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은유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인간세상 전체를 풍자해놓은 공간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비단 지역 깡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에 해당되는 엄연한 약점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곧 '지구'였던 것이다. 동시에 소설의 제목 '왕을 찾아서' 또한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암시를 함의한 배치일 것이다. 왕 마사오에 대한 원두의 방향성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강한 것'에 대한 야심을 메타포한다. 왕을 찾아서. 그렇다. 인간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왕을 찾아서' 헤매며 갈등하는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간만에 성석제의 소설을 만나서 즐거웠다. 놀랐던 것은 성석제가 이토록 소설을 매력적으로 쓰는 작가였나 하는 점이다. 그간 몇 편의 작품에서 그의 가벼운 입담에 거리감을 느꼈던 내가 그의 첫 장편소설에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누린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 게다. 좋은 작품은 언젠가는 독자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된 소설이 15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독자를 찾은 필연이 그것을 넌지시 증명한다. 한 작가에 대한 오해가 오늘로서 풀리게 됐다. 독자로서 흐뭇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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