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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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류 문학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소설가로 톨스토이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적어도 '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서 톨스토이의 포스를 넘어서는 이는 없을 듯하다. 물론 동시대의 천재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주 비견되곤 한다. 하지만 두 인물의 삶과 철학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석은 별도의 논설이 필요하다. 톨스토이가 그려내는 건강한 세계와 아름다운 사랑론, 인간의 섬세한 묘사와 신을 향한 진지한 성찰은 그의 문학적 깊이와 밀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세계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그는 바로 톨스토이다.

  레프 톨스토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세 편의 텍스트가 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은 톨스토이 문학을 관통하기 위한 필독서다. 세 작품 모두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독자를 압도시키는데 각기 고유의 작품성으로 서로 독립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톨스토이 인생의 총체적 관점에서 조망하면 어떤 특별한 힘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 초기작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로 꼽힌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인생의 전환점에서 쓴 가장 예술적인 소설로서 <전쟁과 평화>와 함께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한 장편소설로 우뚝 서 있다. 인생의 노년기에 쓴 <부활>은 문학성과 예술성에서 앞선 두 작품에 비해 힘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신에 대한 톨스토이의 진지한 천착이 엿보이는 수작이다. 세 장편을 읽지 않고 톨스토이를 논한다는 것은 '거짓' 혹은 '교만'이다.


  생각이 다듬어지지 않았던 이십대 때 나는 톨스토이의 세 편의 명작을 힘들게 읽어냈었다. 역자가 누구이고 출판사가 어디이며 완역본인지 여부도 몰랐던 때였다. 심히 힘들고 고통스럽게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1,000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과 빈번하게 출몰하는 톨스토이의 장광설(?)에 내 전두엽은 혹사되었고 작품이 지닌 본래성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월은 흘렀다. 톨스토이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내 안에서 역동했다. 이에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진중하게 읽어보고자 했다. 문장 하나 쉼표 하나까지 톨스토이의 숨결을 느껴보길 원했다. 그래서 다시 손에 잡은 것이 톨스토이의 불멸의 저서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사상과 예술이 집대성된 걸작으로서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형태의 보편들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 나는 여태까지 읽었던 문학작품 중 이 소설을 가장 완벽한 텍스트라고 주장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한치의 흠도없는 완전무결한 작품, 이라고 평가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분명 '완벽한' 작품이다.

  <안나 카레니나>가 완벽한 장편소설이라는 데에는 소설을 이루는 여러요소들이 하나같이 모두 완벽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대담한 주제, 등장인물의 생명력, 인간과 배경 사이의 균형 잡힌 입체성, 담담하지만 세밀한 묘사, 당대를 훑고 있는 역사성, 문장·문단의 유려함, 작품 자체의 문학성과 예술성 등.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신적인 안정감으로 갖춘 흠결없는 작품이다. 소설가로서의 웅대하고 탁월한 기본기. 그것이 톨스토이 문학의 주춧돌이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중심인물이 이야기를 추동한다. 주인공인 안나와 그녀의 정부 브론스키가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다른 한 편에서는 톨스토이의 모습이 투영된 레빈과 그의 아내 키티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네 인물들이 각기 두 명씩 독립적인 서사를 펼치는 듯 보이지만 각자는 관심과 애증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외연적으로는 안나가 가정을 버리고 브론스키와 바람을 피운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지만 내포적으로는 당시 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한 톨스토이식 관찰과 항변이라 할 수 있다. 즉 톨스토이는 가정소설이라는 형태 속에서 당시 러시아가 고민했던 여러 부분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담음으로써 엄연한 사회소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하기에 다루지 않기로 하자. 나는 이번 서평에서 작품의 주제와 톨스토이 소설의 특징, 그리고 등장인물의 매력만을 다루고자 한다. 사실 등장인물의 분석만으로도 서평의 분량을 채우고도 남는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창조한 인물들은 모두 완전하게 살아있다. 대부분의 소설은 현실성 없는 인물이 등장하고 플롯에 맞추어 인물을 유형화시킨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인물이 플롯에 맞춰져가는 게 아니라 플롯이 인물을 뒤따라간다. 완전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기실 '생명력'은 톨스토이 소설의 명징한 특징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플롯에 따라 사건의 전개를 알 수 있는데 톨스토이 소설은 예상이 많이 빗나간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과 현실 속 인물의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소설을 읽는다. 톨스토이 소설은 인물의 성격이 완전히 살기 때문에 소설은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린다. 실제라면 그렇게 진행되겠구나, 가 아니라 완전히 현실적이다. 그런데 그 현실적인 성격을 아주 탄탄하게 전개시키면서 작가 자신이 의도한 결말 쪽으로 몰아간다. 요컨대 톨스토이 소설의 매력은 너무나 현실적인 인물성격을 가지고 너무나 완벽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평론가들은 한결같이 톨스토이를 리얼리즘의 거장이라고 치켜세운다. 그것은 생명력과 동류성을 띠는 톨스토이의 또 다른 마력에 기인하는데 그가 우리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간심리를 끄집어내서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주인공 안나를 살펴보자. 안나는 세계 문학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는 최고의 매혹적인 여성을 창조했다. 안나는 남편과 아들을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삶을 산 여성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녀가 뿜어내는 여성성만큼은 가히 고혹적이다. 그 매력은 카레닌(안나의 남편)과 브론스키를 넘어, 시대와 지역을 넘어, 문화와 인종을 넘어, 현재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독자의 심장에까지 도달하여 빛을 발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브론스키가 안나를 보고 한 눈에 반했던 바로 그 '무도회'와 그때 안나가 입었던 '검은색 드레스'를 생동감 있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안나보다 키티의 매력에 더 매혹되었다. 사실 안나는 책임감 없는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불륜의 늪에 빠져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종국엔 그마저도 지켜내지 못하고 자살로써 삶을 마감한다. 대책없는 무책임성의 극치다. 반면 소설의 초반부터 종결까지 레빈의 사랑을 독차지한 키티는 비록 자신이 처음 사랑했던 남자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뜨겁게 사랑한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성공적으로 이룬 행복한 여성의 전범이 된다.

  가정의 행복은 절대로 대가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논함에 있어 '희생'이 근본 사랑의 본체가 된다는 점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가정의 성공은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사랑의 완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희생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의 전제조건이 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대로 불행하다, 는 소설의 첫 문장은 가정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지를 역설하는 명문장이다.

  부부로서 많은 것이 다르고 부딪혔지만 결국 레빈의 사랑을 사로잡아 행복한 가정의 원형을 건설한 키티의 매력이야말로 '미모'와 '열정'의 일차원적인 매력보다 우위에 있는 '지혜'와 '연합'이라는 여성성 최고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레빈의 형 니콜라이의 임종 전에 찾아간 병문안에서의 키티의 행동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이다.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듯하지만 행위의 목적과 결과는 결국 남편 레빈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키티의 현명함이 있다. 실로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톨스토이는 의도적으로 안나의 매력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하다. 안나의 활력을 지나치게 흘러넘치도록 그려냈다. 그것이 내게는 불편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매력을 발산하는 키티의 아름다움이 내게는 보다 편안하게 와 닿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빈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톨스토이 자신의 소설 속 투영이다. 톨스토이는 전지적작가시점의 완벽한 실현을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레빈이 갖는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독자에게 일직선으로 전달한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 속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것들이 들어가 있다. 그 시대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예술, 건축, 음악, 공연 등 거의 모든 영역을 두루 다루고 있는데 이에 대한 톨스토이의 견해와 입장은 철저히 레빈의 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어쩌면 <안나 카레니나>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뛰어넘는 종합예술작품으로서의 위대한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레빈이라는 인물의 존재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안나보다 레빈에 가깝다.

  사실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레빈으로 시작해 레빈으로 끝이 난다. 특히 소설의 종결은 안나의 죽음 이후에도 꽤 많이 흘러가는데 그 분량은 철저히 레빈의 독백이 점철하고 있다. 형 니콜라이의 죽음과 아내 키티의 출산과정을 목도하면서 레빈은 삶과 죽음에 대해 전회轉回에 가까운 충격적 깨달음에 휩싸인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 삶에서의 선善의 이해, 행복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 삶의 우선순위로서의 신앙 등을 깊이있게 사유하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느끼고 기대하는 레빈의 변화는 소설의 말미를 매우 웅숭깊게 독점한다.

  레빈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주제로 연결된다. 나는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삶이란 무엇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갈무리했다. 톨스토이는 지속적으로 귀족사회에 대해 농도 높은 조소를 던지고 있는데 이는 레빈을 통해 드러냈던 농촌사회에 대한 애착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사교계 모임을 통해 서로 만나고 교감하는 귀족들의 모습은 돈과 명성에만 매달렸던 당시 러시아 귀족의 겉치레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 외에도 톨스토이는 당시 상류층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 사랑과 결혼, 정치와 예술, 더 나아가 습관과 음식까지 비웃는다. 외적인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에 침잠하여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함을 넌지시 교훈한다. 요컨대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가'는 결국 삶에 대한 인간의 책임있는 태도를 유도한다. 초기작 <전쟁과 평화>는 끊임없이 '삶'을 말했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는 니콜라이의 죽음에 번민하는 레빈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수 있듯이 '죽음'에 대한 자못 진지한 고뇌를 드러낸다. 전작과의 이러한 차이점을 발견하는 일은 톨스토이 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대목이 톨스토이가 소설가에서 성자로 변화하는 동기점이자 그의 만년작 <부활>과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인생관은 명징하다. 인간은 죽음을 통제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초월적이고 신성한 존재를 통해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진다는 사상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한 것이며 본질에 벗어난 모든 요소들을 버림으로써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톨스토이의 역설은 깊이있게 천착할 만하다.

  톨스토이가 제기한 삶과 죽음의 동일성에는 사랑과의 동류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즉 삶과 죽음과 사랑은 매한가지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랑 예찬론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말년이 되면 될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실패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둘은 분명 사랑했지만 결국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랑의 '도입'에는 성공했지만 사랑의 '완성'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비극적이었다. 사랑은 본래적으로 시공간성의 무의미함을 담보한다. 부재하지는 않지만 분명 무의미하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사랑의 본질은 변질되지 않으며 시작점에서 발현된 에너지는 몇 개의 우주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질량에는 변화가 없다. 불변성과 고유성이야말로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는 가장 긴요한 원리인 것이다.

  사랑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엄연한 하루하루를 살아감에 있어 사랑타령만 주구장창 늘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도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과 사람을 만난다. 삶의 복잡다단한 관계망 가운데 울고 웃고를 반복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할 것이다. 삶과 행복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사고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선善하게 산다면 그것이 가능할까. 만약 그렇다면 선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무엇이며 인간은 그것을 판가름할 수 있을까. 삶에 대한 다양한 물음들이 소설의 막장을 확인함과 동시에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결국 톨스토이는 삶과 선의 함수성과 그것에 대한 농밀한 이해를 통해 진정으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들춰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만큼이나 생명력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이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나에게 더욱 느린 속도를 요구했다. 톨스토이가 글을 어렵게 쓰는 작가가 아님에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정독하다시피 했다.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박형규 교수의 깔끔하고 유려한 번역이 가독의 집중력을 배가시켰다. 중간에 다른 책을 읽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지만, 장장 한 달에 걸친 <안나 카레니나>의 여정은 내 안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느꼈다. 생명력에도 '수준'과 '밀도'가 있다는 것을. 대범한 주제의 생동감과 흘러넘쳤던 안나의 활력, 발군의 은유와 묘사로 대변되는 톨스토이 문장의 맛깔남과 길지만 격렬했던 호흡은 걸작 <안나 카레니나>가 나에게 선사한 찬탄스러운 생명력의 본질이었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가졌던 신적인 생명력은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100년의 시간차를 넘어 나에게까지 흘러넘쳤던 것이다. 고백컨대, 난 지금 톨스토이로 인하여 무한한 생명력 가운데 놓여 있다. 미치도록 뜨겁고 강렬한. 아. 톨스토이여.

  세계적인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천재를 가늠할 잣대를 제시한다. 먼저 "창조적 자아를 위한 자유와 정신적 의식의 확장을 위한 자유"를 얼마나 성취했나 따져야 한다. 이 기준을 통과한 작가들에게 재차 서열을 매기는 또 다른 지표가 있다. 생명력이다. 블룸은 최고의 천재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가르는 지점을 단호하게 설명한다. 단테는 <신곡>을 넘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로 건너오지는 못하는 반면 셰익스피어는 문학을 삶에 적용한, 즉 문학을 통해 인식의 수준을 높이려 한 최고의 사례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며 찬탄해 마지 않는다. 하지만, 블룸의 말은 틀렸다. 셰익스피어와 우리 사이에는 바로 톨스토이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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