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인과 바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나이 먹는 걸 마냥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이고 그만큼 잃어버릴 것이 많다는 것이며 삶의 끝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보편적인 상식에서 사람들은 나이먹는 걸 꺼려하고 젊음을 갈망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인간 또한 하나의 생명체로서 시간이 흐르면 늙는다. 그것이 우주의 이치이다.
나도 그랬다. 나이 스물아홉의 시절을 나는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서른이 되는 게 너무 싫었다. 젊음을 표상하는 스물을 졸업하기 싫었고 어감부터 부담스러웠던 서른의 입학에 소름을 돋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은 삼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지만 당시 서른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내면에서 샘솟는 현실 부정을 주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부질없는 고민이었는지 모른다. 내 힘으로 어쩔수 없는 명확한 우주의 섭리에 대해 시위하고 반발한 것이 공허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본질은 '늙어가는 것'에 있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늙는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늙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품위있고 매력있게 늙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은 분명 신의 축복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노인을 만들어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전형적인 헤밍웨이표 주인공으로서 강렬한 문체만큼이나 힘있는 인물이다. 망망대해에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고 상어와 혈투를 벌이는 산티아고의 집념이야말로 늙음의 본질적인 기준은 나이가 아닌 정신의 문제임을 일깨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포인트를 한 노인(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열정으로 잡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면적 감상은 헤밍웨이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주인공 산티아고가 지닌 근본적인 매력은 며칠동안 청새치와 씨름하고 그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상어떼와 사투를 벌이는 데 있지 않다. 산티아고의 진정한 위대함은 물고기와의 죽음을 건 혈투가 끝난 후 별일 없다는 듯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여유있게 커피를 마시는 데 있다. 강렬하고 지독한 삶의 순간순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노인 산티아고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생 여정 가운데 특별한 것에 경도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삶을 동경하며 자기체면에 걸림으로써 비현실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젊은이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삶의 몇몇 순간이 기적이 되고 이벤트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삶 전체를 기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건 환상이자 탐욕이다. 그것은 기적의 본질에 무지한 이들의 일탈이다. 삶 전체를 송두리째 기적으로 인식하고 싶은 사람들의 망상이 결국 건강한 인생궤도를 이탈하게 만든다. 삶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전적으로 평범한 것이다. 삶의 기적은 시간의 도도한 흐름 가운데 작동되는 일상성의 재발견이다. 결국 보편과 일관一貫이 진정한 삶의 기적을 완성시킨다. 산티아고가 가진 강인함은 바로 이러한 삶의 진리에 맞닿아 있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라는 소설 속 명문장은 헤밍웨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인생의 무대 위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과정과 결과를 만난다. 삶의 과정과 결과는 종속적으로 얽혀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리되기도 한다. 인과관계로 풀이될 수 없는 삶의 다양한 역동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요동친다. "파괴는 있되 패배는 없다"는 말은 결국 정신적 가치의 승리를 웅변하는 것이다. 인간의 참된 승리는 정신의 세계에서 실현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설령 파괴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패배가 아닌 승리의 영역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노인과 바다』를 유독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사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포기하는가. 그리고 결과만을 중시하는가. 학업이든 일이든 사랑이든 그 어떤 것이든 젊음의 가장 큰 힘은 도전과 모험으로 대변되는 과정의 영역에서 나오는 법이다. 최소한의 개척정신마저 결락된 젊음은 이미 죽은 젊음이다. 만약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젊은 사람이었다면 소설의 감동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노인이었기 때문에 헤밍웨이의 메시지가 독자에게 보다 강렬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젊음의 본질을 가장 명확하고 적확하게 그리고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이 소설을 탐독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양한 자아 가운데 자신의 진본을 찾아헤매는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고전 『노인과 바다』를 아낌없이 추천한다.
작년까지 헤밍웨이의 작품은 검증되지 않은 번역본들로 적지 않이 쏟아져 왔다. 올해부터는 사후 50년 저작권법이 풀리면서 역량있는 번역가와 권위있는 출판사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그간 영미문학을 많이 번역해온 김욱동 교수의 번역은 여전히 깔끔하다. 번역자로서 김욱동 교수의 장점은 자신의 번역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평소 빠른 개역이 이를 증명한다. 그가 3년을 준비했다는 민음사판 『노인과 바다』 번역은 부족함이 없을 만큼 깔끔했다. 헤밍웨이 특유의 강건체를 무난하게 번역한 느낌이다. 문장의 호흡을 짧게 처리하고 문체의 건조함을 잘 살렸다. 성실한 각주와 해설작업 또한 훌륭한 부분이다. 문제없는 번역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노인과 바다』는 강력한 소설이다. 주인공의 매력과 특유의 강건한 문체는 독자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명확한 주제의식과 강인한 흡입력은 독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고전은 역시 고전이다. 또한 헤밍웨이는 역시 헤밍웨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