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바보 - 대양 육대주에서 만난 사랑하는 영혼들과의 대화
오소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가 의미있는 공간인 것은 바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자연의 규모와 화려한 동식물의 향연도 한 사람의 존엄을 압도하지는 못한다. 과학과 종교는 한 목소리로 일갈한다. 인간 이외의 만물은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물질을 발견하고 다스리는 인간 정신의 고차원성은 이 세계가 곧 인간의 시공간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입증한다. 지구의 존재 이유. 그것은 바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를 지닌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치있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은 어디에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바로 '사랑'이다. 인간이 지구를 의미있는 공간으로 존재케 한다면 인간이 발현해내는 사랑이라는 초월적인 자기력은 지구를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있는 차원의 선상 위에 올려놓는다. 여기서 신의 존재는 명징해진다. 인간은 신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저차원적 현현顯現이었고 사랑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아가고자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인류사는 결국 사랑사다. 크고 작은 인간사의 굴곡은 사랑에 대한 각각의 이해와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서 창조 또는 진화된 존재다. 인간은 사랑한 만큼 행복했고 사랑하지 않은 만큼 불행했다. 사랑했기 때문에 선善을 완성했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惡에 함몰되었다. 사랑이 가득 찬 사람은 두려움을 망각했고 그 망각 가운데 시간을 가장 빨리 흘러가게 했다. 그렇다. 사랑은 아름답고 위대하며 궁극적인 힘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사랑은 이론화나 구조화가 불가능한 초자연적 에너지다. 만물의 영장이자 강력한 이성理性을 지닌 인간조차도 사랑이 가진 거대한 포스의 원리를 오롯하게 이해하고 사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인간이 사랑에 실패한다. 어쩌면 이것은 신의 장난질일 것이다. 신은 절대고차원에서 생성·사용되는 힘을 인간의 시공간, 즉 한낱 3차원의 세계 속으로 유입시켰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모습 속에서 당신의 형상을 찾고자 했다. 신의 장난은 인간을 둥개게 한다. 한없이 낮아지게 하고 결국, '바보'가 되게 한다. 요컨대 인간은 사랑 앞에서 모두 바보가 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에세이 작가 오소희는 신간 『사랑바보』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만난 인연들에게서 발견한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소개한다. 이 책은 국적과 지역, 언어와 문화가 다르더라도 결국 인간은 사랑 안에서 동일해진다는 진리를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들려준다.

  작자가 소개한 사랑의 카테고리는 가히 폭넓다. '자기애'로 시작하여 '타자애'와 '모성애'를 넘어 '동성애'와 '노년애'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양한 사랑의 색상을 발굴하고 음미한다. 작가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경험했던 사랑에 빠진 다양한 영혼들과의 대화는 각각이 소중한 의미를 지님으로써 독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저 바라만 봐도 심금을 울리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직접 개입하여 사랑학개론을 나눠야만 하는 영혼도 있다. 사랑에 빠진 세계 각지의 많은 영혼들과의 교감을 통해 저자는 과거로 돌아가고 현재를 응시하며 미래를 상정한다. 이러한 시점의 이동은 작가와 독자 모두를 사랑이라는 웅대한 신적 발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게 한다. 겸손치 못한 자. 사랑할 수 없다.

  작가 특유의 감성적인 문체는 여전히 돋보인다. 총 다섯 편의 에세이를 써오면서 작가는 어느덧 시인이 다 되었다. 사랑을 테마로 한 책인 만큼 문장 곳곳에 작가의 감정선이 생명력 있게 꿈틀거린다. 간혹 눈에 띄는 비유와 묘사를 음미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시인' 오소희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된다. 시는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다. 세계의 수없이 많은 글쟁이들이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던가. 작가에게 기대한다. 언젠가 시를 써볼 것을. 갑자기 『욕망이 춤추는 곳 라오스』에서의 짧디 짧은 응축된 문장이 뇌리를 스친다.

  전작과의 차별성 또한 눈에 띈다. 이전 네 권의 에세이에서 작가는 아들 중빈을 통해 세계를 관찰했다. 세계에 대한 천착은 들여다보는 렌즈의 성격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선사한다. 작가와 아들 중빈은 세계를 쳐다보는 기준과 태도에 있어 많은 부분이 상치했다. 다른 간극의 차이만큼 이해가 필요했다. 작가가 세계를 여행하며 포착했던 다양한 글감들은 아들의 '순수'와 '열림'에 의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어린아이의 유치함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고 때로는 진공에 가까운 순진함에 넋을 잃고 경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에세이만큼은 다르다. 아들은 엑스트라로 물러나 있다. 아들을 향한 작가의 초점과 세계에 대한 아들의 시각은 최대한 탈피되어 있다. 작가가 1인칭의 주인공이 되어 사랑하는 영혼들과의 접속을 시도한다. 시점의 고저와 방향을 철저히 작가 자신만의 것으로 자유화한 문체의 변화가 보기 좋다.

  책의 막장을 덮으며 난 생각했다. 작가가 들려준 아홉 가지 형태의 사랑 외에도 한 가지의 사랑이 더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작가와 독자 사이의 사랑이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독자도 작가를 사랑한다. 작가에 대한 독자의 사랑은 은근히 집요하다. 돌아보건대 난 작가 오소희를 사랑했다. 그의 '자유'는 언제나 나의 '진지함'과 친구가 되었다. 사석에서 수차례 만났던 그는 항상 나에게 자유의 에너지를 발현했고 그것을 통해 나는 삶과 사랑이 결국 동의어라는 깨달음에 고개를 숙이곤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자유로운 만큼 나는 더욱 진지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어느덧 작가 오소희는 내 삶에서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사랑은 참 어려운 것이다. 사랑 특유의 고통의 난해성은 인간을 바보로 만든다. 사랑은 규정될 수 없다. 다만 끊임없이 발현되고 진행될 뿐이다. 사랑에는 수식어구가 필요없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이 세계가 물질만능주의에 찌들어 모든 정신적 가치의 굴곡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사랑의 본질만 훼손되지 않는다면 위험하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진본에 근접하게 된다. 유일하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면 바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바보가 되어도 좋다. 사랑할 수만 있다면.

  사랑 예찬론자 오소희의 신간 『사랑바보』를 이 땅의 수많은 '사랑 바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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