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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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중편소설 <설국>은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분량 자체가 짧을 뿐더러 극도의 매력적인 문체가 읽는 동안의 '일시정지'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어의 운율과 일본인의 혼을 모르고서는 오롯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설국>의 번역자는 고통스럽다. 일본어 원문이 아닌 번역본으로는 본래의 가치를 절반 가까이 잃어버리는 태동적 한계를 지닌 소설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설국>의 첫 문장은 매우 유려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雪國이었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는 가장 유명한 명문장으로 꼽힌다. <설국>은 국내에서 다양한 출판사로 번역됐다. 이 소설은 자못 독특한 신비함을 갖고 있는데, 첫 문장을 어떻게 번역했는지에 따라 소설 전체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즉 <설국>의 첫 문장은 소설 전체의 문체적 조망성을 규정하는 신비한 마력을 지닌 것이다.

   이러한 문체상의 독특함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가 됐다. 1968년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는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문체가 아니었다면 결코 문학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유명작은 의외로 짧은 소설들인데 <설국> 외에도 단편 <이즈의 무희>가 대표작이다. 두 소설 모두 비슷한 소재와 비슷한 문체를 가졌다. 플롯은 없고 이야기 전개도 단순하다. 인물 사이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대화와 행동이 작가 특유의 세밀한 문체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설국>의 내용은 간단하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주인공 시마무라가 나가타현의 온천 마을의 기녀妓女 고마코를 만나는 이야기다. 사건도 없고 갈등도 없다. 소설이라면 으레 갖추고 있을 만한 이렇다 할 이야기의 전개展開나 절정絶頂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애소설이 분명한데도 전혀 연애소설 같지 않다. 가와바타는 단 한번도 소설에서 사랑이 어떠니 이별이 어떠니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소설은 그저 지루할 정도로 사소한 변화들, 그리고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그저그런 일상적 행위들을 묘사한다.

   나는 <설국>의 주제를 '아름다움'으로 갈무리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니카타 현의 눈 덮인 묘사는 과히 압권이다. 작가는 발군의 감성적 묘사로 눈의 고장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독자는 각 문장이 빚어내는 하얀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기 머리속에서 재해석하여 가슴속으로 밀어넣게 된다. 이는 배경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표현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시마무라의 시점인데, 그가 살피는 시선과 내면의 심리는 이야기를 추동하는 근력이 된다. 시마무라가 목도하며 관심을 갖는 두 여인(고마코, 요코)의 모습은 '생기'와 '절제'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아름다움에 닿아 있다.

   가와바타가 그려낸 여성성의 아름다움은 중첩된 미美로서의 아름다움이다. 즉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시마무라가 열차를 타고 가며 잠긴 상념과, 이야기 전개상으로 그 어떤 적절성도 가진다고 볼 수 없는 엔딩 장면, 혹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들어오는 장면에서 풍기는 분위기 등은 문장을 읽어내는 자체만으로 미의식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다. 이미지적인 장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소설로서만 구사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결국, <설국>은 여성에 대한 찬사다. 눈 덮힌 풍경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여성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순간을 두고 타오르는 여자의 마음을 매우 감각적으로 포착했다. 특히 고마코가 내뿜는 활력이야말로 여성성의 원형적原形的 정열情熱에 닿아 있는데 이는 작가의 절묘한 여성심리 묘사가 추동한다. 순간에 끊어오르는 여자의 열정이란 그런 것일까. 작가가 그려낸 여성 내면의 아름다운 형용은 '과감'이고 '생동'이며 '진실'이고 '절제'였다. 소설을 깊이 읽어 내려가다 보면
, <설국>은 결국 고마코의 스토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국>의 본질적인 주인공은 시마무라가 아닌 고마코다. 물론 소설의 시점은 분명 시마무라의 시선에 있다. 그러나 소설 전체를 흔드는 생명력에서는 '모든 미美의 흡수'를 발현한 고마코에 보다 높은 밀도가 부여된다. 사실 두 남녀는 서양과 동양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아름다운 일본'을 주창한 가와바타의 작품세계를 집약한 인물구도가 된다. 시마무라가 서양적인 교양을 익힌 지식인이라면, 고마코는 산천초목, 삼라만상, 사계절의 미를 나타내는 일본의 자연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겨울, 고마코를 다시 찾아온 시마무라의 마음은 한없이 얼어붙어 텅 빈 동굴과 같이 되었다. 바로 그때, 고마코의 애정이 시마무라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동굴을 메워가게 된다. 맨 처음 고마코는 시마무라의 눈에 비치는 환상이었지만, 이윽고 시마무라의 시선을 초월하여 일본의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가와바타의 이러한 미의식은 일본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해 근대 일본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했다. 그것이 동력이 되어 노벨상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가와바타의 노벨상 수상을 공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동아시아권에 노벨문학상을 주어야 하는 기류가 흐르는 와중에 그나마 제대로 영문으로 번역된 소설이 <설국>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상했다는 소문이 팽배했었다. 그러나 소문의 진위여부와는 별도로 <설국>은 인상적이고 훌륭하며 매력적인, 지극히 문학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가와바타와 노벨상을 두고 어쩔 수 없는 경쟁을 펼쳤던 미시마 유키오의 평은 이를 잘 압축한다. '여인의 단정한 의상을 연상케 하는 문체에 의해 묘사된 대낮의 신비세계는 가와바타씨의 절묘한 동화이며, 동화란 또한 가장 순수한 고백인 것이다.'

   애석하게도 미시마 유키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공히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두 사제의 자살은 많은 풍문을 낳았다. 당시 일본문단은 노벨문학상이 두 사람의 일본작가를 죽였다고 떠들어댔는데, 한 사람은 받지 못해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받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미시마의 자살동기를 좌절된 노벨상의 꿈에서 찾거나 가와바타의 자살을 노벨상의 중압에 기인된 것으로 해석하는 상상력은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흥미로운 소문과는 무관하게, <설국>은 노벨상에 값하는 문학세계를 충분히 구축한, 과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누가 뭐래도 그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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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7-08-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혹시... 어떤 번역본으로 읽으면 좋을런지 여쭤봐도 될까요?
 
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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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만인가. 헤세의 불멸의 작품 <데미안>을 다시 만난 지가. 이십 대 초반 처음 만난 <데미안>은 나에게 지독한 소설이었다. 융의 심리학과 소설의 멀티구조를 알 리 없었던 그 시절의 <데미안>은 무의미한 관념과 철학의 산더미로 내게 다가왔다. 그 산더미가 무너지고 내 속에서 '새로운 <데미안>'이 세워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새로운 <데미안>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면서 내 머리와 가슴을 내 진본 속으로 하염없이 밀어넣었다.

   <데미안>은 신비한 소설이다. 성장소설이 분명한데도 청소년이 읽기는 부담되고 벅차다. 초반은 어려움 없이 읽힌다. 그러다가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는 지점부터 헤세의 문장은 쉽지 않은 사유의 심연 속으로 잠수한다. 선악의 이중성, 신성神性의 양면적 고찰, 자아로의 끊임없는 침잠,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등 소설은 적지 않은 소재를 관통하면서 참다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냈다.

   주지하다시피 <데미안>의 핵심주제는 '자기탐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내면에서 샘솟는 울림을 경청하고, 그것을 통해 '참 나'를 찾아가며, 그 찾아감 속으로 실제 나아가는 삶, 을 지향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야기 전개방식은 싱클레어의 회상으로 진행된다. 철저히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플롯 구도 가운데 데미안을 위시하여 싱클레어가 흠모하고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관계맺기를 통해 이야기를 생성시킨다.

   싱클레어의 관계맺기는 유의미성 측면에서 세 인물로 연결된다. 친구 데미안, 오르간연주자 피스토리우스, 데미안의 엄마 에바 부인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시종 싱클레어의 정신세계를 압도하며 이야기를 추동한다. 소설에서 제기된 종교, 관념, 철학, 사유, 의식 등의 모든 실타래들은 이 세 인물을 통해 제시되고 공유된다. 싱클레어와 그들 사이의 묘한 종속성과 신비한 거리감, 그리고 약동적 피드백성은 소설을 이루는 주요한 뼈대가 되고 있다.

   내가 <데미안>에서 가장 깊게 고찰한 부분은 '신성의 양면적 천착'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 새가 날아가야 할 궁극은 '아프락사스'라는 신"이라고 얘기한다. 이전까지 싱클레어에게 신성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선'으로서의 통속성·관습성·교조성의 의심없는 수용이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이 엄연하게 공존하는 신이다. 요컨대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실제의 나'가 되어가는 과정은 병립적竝立的 관계로서의 선악세계를 받아들임으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철저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헤세의 이단적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는 소설 속에서 '카인과 아벨',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야곱의 씨름'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미안의 풀이를 통해서도 은연히 드러난다. 기존 진리의 불변성을 전복시키는 데미안의 해석은 기독교에 대한 헤세의 반항적 도전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끝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헤세의 의지를 추론해보건대, 소설 속의 데미안 식 해석은 본질적으로 신성 모독을 통한 교리의 파괴가 아닌 신성 재해석을 통한 인간 내면의 명징화·개성화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사실 선과 악은 이분법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본체가 아닌 이상 전제적前提的으로 악의 일면을 내재한다. 심리학자 융의 말대로라면 아프락사스는 선악을 공유하면서도 엄연한 '창조주의 본질本質'이다. 즉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스스로 존재했던 신성 속에 선과 악이 함께 병립했다는 것이다. 융의 이 말은 절반의 논리를 완성시킨다. 신의 허용 속에 악함이 없었다면 창세 후 인간이 행했던 죄의 근원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반은 논리적 생명력을 잃는다. 신과 악의 상관관계는 '신의 불가해성不可解性' 안에서 용해되고 분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락사스는 신비주의적 전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가지고 있는 신성"이다. 소설 전반부에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적 관점의 양극성의 문제를 후반부에서는 아프락사스라는 신비주의적 신성의 상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모든 신비주의는 일원론을 그 근간으로 한다. 이 아프락사스는 <데미안> 이후 헤세가 일생 동안 지향하는 양극성 너머의 전일사상 및 일원론적 신비주의 종교사상을 보여 주는 문학적 상징인 것이다. 소설 <데미안>이 헤세의 '영혼의 전기'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소설 <데미안>의 보다 정밀한 주제가 추출된다. "'완전한'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선악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선의 무조건적 지향은 상대성 안에서 궤멸된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했다. 피레네 산맥 이쪽의 정의가 저쪽에서는 불의가 된다는 것을. 문학과 철학을 넘어 보다 넓은 카테고리에서 '정의'와 '선'의 의미를 조망하게 되면 둘이 동의적同意的 성격을 띤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파스칼의 일갈은 자연스럽게 선악의 병존성으로 연결된다. 헤세가 하나님(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이 아닌 아프락사스라는 고대 희랍의 신으로 후퇴(혹은 갈음)하여 자신의 세계를 전달한 것도 바로 이런 의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끝맺음된다.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싱클레어는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데미안과 대면한다. 이제 떠나야 한다고 말하며 싱클레어에게 키스하는 데미안의 마지막 현현顯現은 어쩌면 처음부터 실존하지 않았던 싱클레어의 '참자아眞我'였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참자아를 찾았던 싱클레어의 지독한 여행에서 데미안의 존재는 독립된 실체 이전에 오롯한 내면화 과정으로서의 싱클레어의 진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합일은 다시 한 번 이 소설의 메세지를 가감없이 표출한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스스로 자기 실존의 내용과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꼭 그 길로만 가야 한다는 것을.

   성장이라는 테마를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의 방식으로 이렇게 깊은 곳까지 언어로 표현해낸 헤르만 헤세는 과히 대작가답다. <데미안>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고전이 됐다.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은 헤세의 이 보석같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심연을 관통적貫通的으로 사색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헤세의 신비로운 문장을 통해 뜨거운 감동의 열정을 담아냈는가. 그러나, 흥미롭게도, 정작 한없이 감화된 사람은 바로 헤세 자신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인생은 '<데미안> 전'과 '<데미안> 후'로 정확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헤세야말로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진본을 찾았던 것이다. <데미안>은 실로 괴물과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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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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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 시기에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나는 이십 대 이전에 이 두 권의 짧은 소설을 꼭 읽어내야만 한다는 데, 그것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데 내 명예를 걸겠다. 두 소설은 공히 '성장'을 주제로 한다. 다만 독자와 호흡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데미안>이 내포적이고 철학적인 방법으로 건강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선악善惡의 공유성을 탐구하는 데 비해 <수레바퀴 아래서>는 외연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인간 삶의 내용과 목적을 질문한다.

   십 대는 어떤 시기일까. 이 대목에서 문학평론가 강유원의 말을 빌리자. 이십 대가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시기라면 삼십 대는 애써 찾은 자아를 거부하고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시기이다. 그렇다면 십 대는 무엇인가. 나는 감히 말하겠다. 자아의 최소한의 개념조차 상정하지 못한 채 인생의 수레바퀴 아래서 외롭게 살아가는 위험천만한 비형성적 존재라는 것을.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부조리한 전통에 허덕이며 망가져가는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를 전면에 내세운다. 한스는 작가 헤세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 모든 젊은이들의 초상이다. 한스에게 자신을 짓누르는 바깥 세계의 모든 교조적 전통은 공포이자 폭력이다. '바깥'에 의해 한 소년의 '내면(자아)'이 굴곡되고 짓밟혀가는 소설의 줄거리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수구적守舊的 관습이 얼마나 깨기 어려운 것인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점점 망가져가는 한스의 삶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은 전혀 없었던 걸까.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한스의 내면을 공유했던 세 친구의 존재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던 친구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난다. 고향의 소꼽친구 레히텐하일, 수도원에서 만난 문학소년 하일너, 이성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한 하일브론의 소녀 엠마, 이들은 각기 다른 존재성으로 한스의 내면을 촉촉하게 적셨던 인물들이다. 한스는 이들과 있을 때 만큼은 자기의 삶을 살았고 자기의 내면에 정직했다. 세 인물과 이별할 때마다 자기 삶을 잃어버리며 고독의 자장에 허덕이는 한스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고 쓰라리다.

   행복한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행복하기 위해'라는 무언無言의 전제가 깔려 있다. 불행을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꿈, 공부, 일, 사랑, 취미 등은 모두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자기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는 '어떻게'를 지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이 밝게 빛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지만 정말 우울한 것은 이마저도 호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십 대는, 그 시절은, 그 애매한 시기는, '자기자신'을 잘 모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 대는 정형성定型性과 비정형非定型性이 대립하는 시기이다. 정형은 고착화와 교조화의 폐단을 가진다. 반면 비정형은 무개념과 비정의의 한계를 지닌다. 자아를 명확하게 완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형과 비정형 사이에서 헷갈리며 고뇌하는 어린 시절의 삶의 무게은 분명 고약하고 지독하다.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숭고한 무게이기도 하다. 그 무게는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가 되며, '내'가 '나'로 사는 과정 속에서 점점 '질량'이 되어 보존의 법칙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질량을 알고 체감할 때 비로소 나는 온전한 '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헤세의 이 위대한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한스에게 엄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스의 엄마는 오래전에 죽었다. 엄마라는 존재의 결락缺落은 한스의 짓눌린 삶이 종내 회복되지 못했던 본질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감당하는 모든 내면적인 고통에는 사랑의 부족과 결여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인간 사랑의 가장 거대한 원형인 모성의 결핍은 소설의 시작점부터 치유의 가능성을 파괴해놓은 작가 헤세의 의도인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한스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아빠의 실존은 궁극적 사랑의 현현顯現인 엄마의 부재를 더욱 간절히 각인시키고 만다. 이로써 독자는 한스가 가진 고통의 사회성과 결핍의 본래성을 더욱 명징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메시지를 모성과 연결짓는 사유는 유의미하다. 동시에 이 책의 필독을 청소년으로 한정해서 권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성장의 테마를 생산적으로 관통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주인공적 입장도 중요하지만 기성세대라는 권위로 전통의 벽을 만들어놓은 일차적 '피의자'로서의 부모의 입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위부의 모든 권위에 맞서 싸운 한스의 치열한 삶은 본질적으로 가정에서 치유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된 비극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잇는 연결고리는 항시 가정이었다.

   그 어떠한 해석이든 <수레바퀴 아래서>는 위대한 고전이다. 쉽고 간결하며,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만으로 어린 시절이 갖는 보편적인 질문을 처연하게 담아낸 걸작이다. <데미안>이 주는 철학적 무게와 관념적 천착이 싫은 독자들에게 <수레바퀴 아래서>는 가장 훌륭한 성장소설로 갈음될 수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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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은 지 어느새 반 년이 지났다. 반드시 서평을 남겨야 하는 작품임에도 아직까지 정리를 못한 채 둥개고 있다. 소설 자체는 쉽다. 갈무리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여태까지 나는 철학자와 사상가로서 카뮈를 대해왔다. 소설가로서의 탐구가 소소한 이상 <이방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나는 지금까지 카뮈를 사르트르의 반대편에서 주로 해석했다. 카뮈에 대한 내 긍정과 동경은 사르트르와 멀어진 내 변화의 크기가 추동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음사판의 <이방인> 해설이 사르트르에서 역자 김화영의 것으로 교체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이방인>을 수용하는 디테일은 사르트르와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주관적 기호와는 별도로 <이방인>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입체적 연결고리를 이어나가야만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카뮈는 사르트르와 이 작품이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사실 사르트르는 카뮈가 <이방인>을 써 문단의 총아로 등장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카뮈의 <이방인>에서부터 <페스트> 그리고 사고로 죽기 3년 전 발표한 <전락> 등을 격찬하면서도, 카뮈가 쓴 <반항적 인간>을 두고 극단적인 논쟁을 벌였다. 더욱이 <이방인>에 대한 카뮈와 사르트르 간의 실존주의 논쟁은 20세기 문학사에서 손에 꼽힐 만한 화두였다.

   주지하다시피 <
이방인>의 키워드는 '부조리'다. 하지만 그 의미와 성격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을 상정했다. 카뮈의 실존주의는 기존의 통설적 실존주의와는 구별된다. 엄정한 철학적인 방법론으로 구성된 학문적 이론이라기보단 그냥 인간이 가지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과 대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르트르와 벽을 세웠던 것 아니겠는가. 카뮈 식의 부조리에 대한 개념화가 결락된 채 그저 사르트르의 대책점에서 <이방인>을 읽어내려 했던 내 천착이 오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깊은 이해와 카뮈 세계관의 진지한 학습이 전제되지 않고는 <이방인>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실존주의 사상의 단초가 되는 부조리 따위를 철학서 속의 사어가 아닌 실제의 삶과 일상 속에서 기묘한 괴리나 위화감과 함께 직접 느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방인>은 무의미한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이방인>의 완벽한 갈무리를 위해 세 가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됐다.

   역자 김화영 교수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엄마'와 '어머니'의 번역 차이가 소설 전체의 느낌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한다. 김화영의 지적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번역판의 재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이에 문학동네판으로 다시 읽기로 했다. 이게 첫 번째 과제다. 그리고 카뮈의 부조리에 깊이 침잠하기 위해서 그 전초가 되는 <시지프 신화>를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요가 생긴다. 이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실존주의의 태동성과 역사성이 담보된 실존 철학과 문학의 알맹이들에 보다 깊이 감화되기 위해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부터 살펴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발생하게 된다.

   상기
세 가지 수고로움은 나에게 소설 <이방인>을 보다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불가결한 과제다. 이를 통해 이 지독한 작품에 대한 내 입장정리가 보다 명료해지기를 기대한다. <이방인>은 분명 흥미로운 텍스트다. 하지만 동시에, 피곤하고 고약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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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남미편 2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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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에 대해 말했다. '지식에 대한 탐구욕', '사랑에 대한 갈망',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그것이다. 러셀의 자전적 고백은 곧바로 내 책 읽기의 목적과 부합한다. 러셀의 인생이 다독多讀과 다작多作으로 점철된 책 속의 삶이었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그와 나는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세 가지 목적에서 일치하게 된다. 즉 나는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사랑을 탐구하며 박애를 반추하는, 고독하지만 행복한 독자인 것이다.

   이러한 내 독서철학은 작가 오소희의 문필철학과 보기 좋게 일치한다. 러셀의 세 가지 열정에서 뒤의 두 가지는 오소희의 텍스트와 자연스럽게 양립한다. 오소희는 떠나야 할 때 비로소 떠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항시 사랑을 말해왔다. 또한 인류를 향한 깊은 연민을 표출해왔다. 터키에서 남미로 이어지는 그의 비블리오그래피 속에는 '사랑-연민' 코드로 엮인 오소희표 휴머니즘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내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세 번째 이유다.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는 여행작가 오소희의 남미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1권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에 연속된 텍스트로서 '콜롬비아-에콰도르-칠레-볼리비아'로 이어지는 여행후기를 담았다. 2권은 1권에서 다루지 않은 여러 나라를 관통한다. 각 나라의 특징과 그곳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여전히 백미다. 저자의 글감을 포착하는 능력과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내는 문필력 또한 연속적이다. 무엇보다 장장 세 달에 걸친 지독한 여행의 말미가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갈무리되었다.

   남미의 각 나라가 갖는 개별성은 남미국가 전체가 갖는 보편성 만큼이나 흥미롭다. 저자는 크고 웅장한 것보다 소소하고 보잘 것 없는 데서 여행의 가치를 발견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남미여행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미의 부국 브라질은 핵심만 짚고 아르헨티나는 이구아수 폭포 때문에 잠시 들릴 뿐이다. 저자가 가장 매료된 나라는 최빈국 볼리비아로 보인다. 라파스에서 살림을 차렸을 정도로 오래 체류했을 뿐만 아니라 돌고 돌아 다시 와서 결국 볼리비아에서 남미여행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비록 국력은 왜소한 나라였지만 항시 활기와 온정이 넘쳤던 볼리비아만의 매력이 저자가 그곳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남미에서도 중빈의 존재는 작지 않다. 중빈은 첫 여행지 터키에서 세 살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열 살이 됐다. 지난 7년간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나는 두 권의 여행기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중빈의 존재적 크기를 무의식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남미에서 중빈은 '힐링'이었다. 중빈이 가져간 바이올린은 여행지 곳곳에서 사람을 감싸고 공간을 채우는 힐링의 아이콘이었다. 라파스에서는 거리의 악사로서, 오타발로에서는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사막의 지프차 안에서는 지친 자들을 위로하는 격려자로서 중빈의 바이올린은 쉼없이 연주됐다. 그때마다 그곳의 사람들은 평온해졌고 그곳의 온도는 따뜻해졌다. 연주실력과는 무관하게 음악이 선사하는 전우주적 공감대가 중빈의 바이올린을 통해 곳곳으로 마음마음으로 오롯하게 전파된 것이다. 중빈의 연주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변질되거나 훼손될 수 없는, 예술이 본래적으로 지닌 궁극적인 순수성을 진솔하게 발현해냄으로써 사람과 공간을 빛나게 했다.

   지난한 여행의 끝은 사막이다. 원래 사막여행이 마지막 코스는 아니었다. 볼리비아 여행 당시 버스파업으로 인해 남부로 가는 길이 전면 차단된 것이다. 저자는 라파스에서 파업 소식을 듣고 볼리비아의 아타카마 사막과 남부의 소금사막 우유니를 여행코스의 마지막으로 변경한다. 돌고 돌아 볼리비아로 다시 가는 비효율적인 코스였지만 소금사막 우유니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멋진 결말로 이어졌다. 경로를 수정하면서까지 꼭 가야만 했던 볼리비아의 기묘한 사막은 저자의 '긴 이완'을 완벽하게 갈무리한 아름다운 '필연'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사막은 객관이 최대를 넘어 과잉으로 피드백되는 공간이다. 모든 외연이 허물을 벗고 자기 자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구조와 계급이 파괴되고 형용사와 부사가 삭제된다. 오직 명사만 남는다. 지구라는 작은 행성을 가꾸고 책임지는 평등한 존재로서의 '인간' 말이다. 그 보통명사만이 아무런 수식 없이 담백하게 놓여질 뿐이다. 그렇기에 사막은 고독하다. 인간의 동일성과 평등성을 묵묵히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막이 선사한 실존적 고독을 깊이 음미하면서 기나긴 여행의 대미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책을 덮고 오랫동안 상념에 빠졌다. 인간에 대해 새삼 궁구했다. 항시 개인주의를 경도했던 내게 오소희의 일갈은 '내'가 아닌 '우리'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는 항시 인간을 탐구했고 조명했다. 공간은 비본질이었다. 오직 본질은 인간뿐이었다. 그가 극도의 집중력으로 인간을 관찰할 때면 여행지는 어느덧 배경으로 멀리 물러나 그 목적가치를 철저히 휘발시켰다. 그의 여행패턴은 언제나 사람이 시종始終을 지배하게 했다. 이러한 오소희식 인간학人間學은 러셀의 세 번째 열정에 그대로 침잠한다.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야말로 작가 오소희가 세계여행에서 그토록 갈급해왔던 유별난 사랑의 원류源流였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이 작은 행성에 공존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같이 2세들의 미래를 소중해하는 기본적 공통점으로 묶여 있는 동일종족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나'를 뛰어넘는 '우리'의 평화를 지향할 의무가 부여된다. 그것은 진실된 평화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평화, 단지 우리 시대만이 아닌 영원한 평화인 것이다. 작가 오소희의 에세이는 바로 그 선상에까지 닿아 있다.

   오소희가 옳았다.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Written By David

http://blog.naver.com/gils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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