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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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 시기에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나는 이십 대 이전에 이 두 권의 짧은 소설을 꼭 읽어내야만 한다는 데, 그것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데 내 명예를 걸겠다. 두 소설은 공히 '성장'을 주제로 한다. 다만 독자와 호흡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데미안>이 내포적이고 철학적인 방법으로 건강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선악善惡의 공유성을 탐구하는 데 비해 <수레바퀴 아래서>는 외연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인간 삶의 내용과 목적을 질문한다.

   십 대는 어떤 시기일까. 이 대목에서 문학평론가 강유원의 말을 빌리자. 이십 대가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시기라면 삼십 대는 애써 찾은 자아를 거부하고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시기이다. 그렇다면 십 대는 무엇인가. 나는 감히 말하겠다. 자아의 최소한의 개념조차 상정하지 못한 채 인생의 수레바퀴 아래서 외롭게 살아가는 위험천만한 비형성적 존재라는 것을.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부조리한 전통에 허덕이며 망가져가는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를 전면에 내세운다. 한스는 작가 헤세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 모든 젊은이들의 초상이다. 한스에게 자신을 짓누르는 바깥 세계의 모든 교조적 전통은 공포이자 폭력이다. '바깥'에 의해 한 소년의 '내면(자아)'이 굴곡되고 짓밟혀가는 소설의 줄거리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수구적守舊的 관습이 얼마나 깨기 어려운 것인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점점 망가져가는 한스의 삶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은 전혀 없었던 걸까.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한스의 내면을 공유했던 세 친구의 존재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던 친구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난다. 고향의 소꼽친구 레히텐하일, 수도원에서 만난 문학소년 하일너, 이성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한 하일브론의 소녀 엠마, 이들은 각기 다른 존재성으로 한스의 내면을 촉촉하게 적셨던 인물들이다. 한스는 이들과 있을 때 만큼은 자기의 삶을 살았고 자기의 내면에 정직했다. 세 인물과 이별할 때마다 자기 삶을 잃어버리며 고독의 자장에 허덕이는 한스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고 쓰라리다.

   행복한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행복하기 위해'라는 무언無言의 전제가 깔려 있다. 불행을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꿈, 공부, 일, 사랑, 취미 등은 모두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자기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는 '어떻게'를 지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이 밝게 빛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지만 정말 우울한 것은 이마저도 호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십 대는, 그 시절은, 그 애매한 시기는, '자기자신'을 잘 모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 대는 정형성定型性과 비정형非定型性이 대립하는 시기이다. 정형은 고착화와 교조화의 폐단을 가진다. 반면 비정형은 무개념과 비정의의 한계를 지닌다. 자아를 명확하게 완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형과 비정형 사이에서 헷갈리며 고뇌하는 어린 시절의 삶의 무게은 분명 고약하고 지독하다.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숭고한 무게이기도 하다. 그 무게는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가 되며, '내'가 '나'로 사는 과정 속에서 점점 '질량'이 되어 보존의 법칙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질량을 알고 체감할 때 비로소 나는 온전한 '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헤세의 이 위대한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한스에게 엄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스의 엄마는 오래전에 죽었다. 엄마라는 존재의 결락缺落은 한스의 짓눌린 삶이 종내 회복되지 못했던 본질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감당하는 모든 내면적인 고통에는 사랑의 부족과 결여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인간 사랑의 가장 거대한 원형인 모성의 결핍은 소설의 시작점부터 치유의 가능성을 파괴해놓은 작가 헤세의 의도인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한스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아빠의 실존은 궁극적 사랑의 현현顯現인 엄마의 부재를 더욱 간절히 각인시키고 만다. 이로써 독자는 한스가 가진 고통의 사회성과 결핍의 본래성을 더욱 명징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메시지를 모성과 연결짓는 사유는 유의미하다. 동시에 이 책의 필독을 청소년으로 한정해서 권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성장의 테마를 생산적으로 관통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주인공적 입장도 중요하지만 기성세대라는 권위로 전통의 벽을 만들어놓은 일차적 '피의자'로서의 부모의 입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위부의 모든 권위에 맞서 싸운 한스의 치열한 삶은 본질적으로 가정에서 치유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된 비극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잇는 연결고리는 항시 가정이었다.

   그 어떠한 해석이든 <수레바퀴 아래서>는 위대한 고전이다. 쉽고 간결하며,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만으로 어린 시절이 갖는 보편적인 질문을 처연하게 담아낸 걸작이다. <데미안>이 주는 철학적 무게와 관념적 천착이 싫은 독자들에게 <수레바퀴 아래서>는 가장 훌륭한 성장소설로 갈음될 수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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