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은 지 어느새 반 년이 지났다. 반드시 서평을 남겨야 하는 작품임에도 아직까지 정리를 못한 채 둥개고 있다. 소설 자체는 쉽다. 갈무리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여태까지 나는 철학자와 사상가로서 카뮈를 대해왔다. 소설가로서의 탐구가 소소한 이상 <이방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나는 지금까지 카뮈를 사르트르의 반대편에서 주로 해석했다. 카뮈에 대한 내 긍정과 동경은 사르트르와 멀어진 내 변화의 크기가 추동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음사판의 <이방인> 해설이 사르트르에서 역자 김화영의 것으로 교체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이방인>을 수용하는 디테일은 사르트르와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주관적 기호와는 별도로 <이방인>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입체적 연결고리를 이어나가야만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카뮈는 사르트르와 이 작품이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사실 사르트르는 카뮈가 <이방인>을 써 문단의 총아로 등장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카뮈의 <이방인>에서부터 <페스트> 그리고 사고로 죽기 3년 전 발표한 <전락> 등을 격찬하면서도, 카뮈가 쓴 <반항적 인간>을 두고 극단적인 논쟁을 벌였다. 더욱이 <이방인>에 대한 카뮈와 사르트르 간의 실존주의 논쟁은 20세기 문학사에서 손에 꼽힐 만한 화두였다.

   주지하다시피 <
이방인>의 키워드는 '부조리'다. 하지만 그 의미와 성격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을 상정했다. 카뮈의 실존주의는 기존의 통설적 실존주의와는 구별된다. 엄정한 철학적인 방법론으로 구성된 학문적 이론이라기보단 그냥 인간이 가지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과 대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르트르와 벽을 세웠던 것 아니겠는가. 카뮈 식의 부조리에 대한 개념화가 결락된 채 그저 사르트르의 대책점에서 <이방인>을 읽어내려 했던 내 천착이 오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깊은 이해와 카뮈 세계관의 진지한 학습이 전제되지 않고는 <이방인>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실존주의 사상의 단초가 되는 부조리 따위를 철학서 속의 사어가 아닌 실제의 삶과 일상 속에서 기묘한 괴리나 위화감과 함께 직접 느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방인>은 무의미한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이방인>의 완벽한 갈무리를 위해 세 가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됐다.

   역자 김화영 교수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엄마'와 '어머니'의 번역 차이가 소설 전체의 느낌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한다. 김화영의 지적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번역판의 재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이에 문학동네판으로 다시 읽기로 했다. 이게 첫 번째 과제다. 그리고 카뮈의 부조리에 깊이 침잠하기 위해서 그 전초가 되는 <시지프 신화>를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요가 생긴다. 이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실존주의의 태동성과 역사성이 담보된 실존 철학과 문학의 알맹이들에 보다 깊이 감화되기 위해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부터 살펴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발생하게 된다.

   상기
세 가지 수고로움은 나에게 소설 <이방인>을 보다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불가결한 과제다. 이를 통해 이 지독한 작품에 대한 내 입장정리가 보다 명료해지기를 기대한다. <이방인>은 분명 흥미로운 텍스트다. 하지만 동시에, 피곤하고 고약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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